번역만 하는 건 아니에요
회사원의 숙명.
프리랜서처럼 본인이 원하는 일을 고를 수 없다. 뭐, 프리랜서라 해도 경제적 이유로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문제이니 잠시 제쳐두자.
번역 회사에 다닌다 해도 번역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사라든지 총무, 회계, 영업 등의 직무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번역 업무의 프로세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번역은 출발어(Source)를 도착어(Target)로 옮기면 땡 하고 끝나는 작업이 아니다.
이 부분에는 잠깐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번역 업무에는 통상 TEP라고 부르는 세 단계가 있다. 굳이 한국어로 옮기자면 번역(Translation), 교정(Editing), 검수(Proofreading) 정도일 텐데 업계에서는 다들 그냥 영어로 말한다.
간단하게 두 단계로 나눌 때도 있는데 번역과 리뷰(Review)다.
어떻게 나누든 말만 다르지 실상 업무는 비슷하다. 3단계일 때는 번역사가 번역을 하고, 에디터나 리뷰어가 교정을 보며, 프루프리더나 다른 링귀스트가 검수를 한다. 2단계일 경우에는 번역사가 번역을 마치면 리뷰어가 교정과 검수를 거치는 식이다.
여기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자면,
나는 번역 회사의 인하우스 링귀스트이다. 링귀스트란 번역, 리뷰, 프루프리딩, 에디팅 등의 업무를 모두 소화하는 직무라고 보면 된다. 내 명함에는 영어로 Linguist라 적혀 있다.
리뷰를 하게 되는 날의 프로세스는 이렇다.
프리랜서든 사내의 동료든 번역사가 번역을 마친다. 그 후 리뷰 단계로 들어가는데, 리뷰의 1차 목표는 물론 오역을 잡아내는 것이다.
번역은 사람이 하는 일이어서 아무리 뛰어난 번역사라 해도 오역이 나올 수밖에 없다. 혹시나 번역사 지망생이라면 '나는 절대 오역을 내지 않는 번역사가 되어야지'라는 꿈은 접어두는 게 좋다. 불가능하다. 정말이다.
그렇다고 오역이 많아도 괜찮을 리는 없다. 어떤 게 많고 적은 것이냐?
나만의 기준을 살짝 공개하겠다.
당부하고 싶은 점은, 내가 이렇다는 것이지 이러한 기준은 아마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지 않을까 싶다.
영어 기준 1,000워드 이내라면 오역이 아예 없는 것이 이상적이고, 3,000워드 정도 분량이라면 한두 군데 오역이 있어도 음, 그럴 수 있지, 눈감아준다. 번역사의 역량이 우수한 데다 원문의 난이도가 낮다면 5,000워드가량의 작업물에도 오역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오역이 단 하나라도 결코 넘어갈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숫자나 이름이 틀리는 경우이다. 이건 치명적이다.
만약 클라이언트 측에서 먼저 제시한 지침이나 용어집, 가이드, 레퍼런스가 따로 있었다면 이를 지키는 것이 오역을 교정하는 것보다 우선이다.
아무리 오역이 적고 멋진 문장으로 번역해 냈다 하더라도 고객의 요청을 따르지 않은 번역은 쓰레기통으로 갈 수밖에 없다. 번역사는 예술가가 아니다. 직업인이다. 좋은 번역사가 되고 싶다면, 번역으로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돈값을 하는 번역을 해 내야 한다.
그다음으로는 번역된 문장이 읽기 좋고 이해하기 쉽도록 다듬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어 실력이 중요하다. 어떤 문장이 좋은 문장인지 구분할 눈이 있어야 교정이 필요한 문장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고, 또 그 문장을 매끄럽게 고쳐주려면 깔끔한 문장을 쓸 수 있는 문장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작가적 재능 같은 게 필요한 건 아니다. 언어적 감각이라든지 글쓰기에 대단한 애착이 없는 사람이라도, 경험이 쌓이면 단정하고 매끄러운 문장 정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이때 경험이 부족하면 저지를 수 있는 실수가 있다. 오역이 없고 괜찮은 문장을 써 냈더라도 번역문의 톤이 문서의 전체적인 성격이나 방향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좋은 번역사라면 클라이언트가 별도의 지침을 주지 않았더라도 원본 문서의 성격을 고려해 그에 대응하는 적절한 용어와 톤으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언뜻 생각하면 제로부터 시작하는 번역보다, 틀린 것을 잡아내고 고치면 되는 리뷰가 쉬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번역이 훌륭하다면 수월하고 기분 좋게 리뷰 작업을 할 수 있지만 번역 품질이 떨어지는 경우 아예 새로 번역하는 게 빠르겠다 싶을 때도 왕왕 있다. 원문이 까다롭고 리서치가 많이 필요하다면 거기에도 시간과 품이 제법 든다. 번역문이 적절한 것인지 아닌지 쉽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번역만 하고 싶으냐면 또 그런 건 아니다.
리뷰를 해 보는 것이 번역에도 도움이 되고, 번역을 할 수 있어야 리뷰도 제대로 할 수 있다. 다른 이의 번역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 번역문을 보게 되면 한 수 배워간다는 생각도 들고 공짜 팁을 얻은 느낌이다. 번역할 때보다는 조금 마음이 편한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그래도 번역이 좀 더 재미있긴 하다. 리뷰할 때보다 번역할 때 더 창의력이 발휘되고, 뇌의 능력을 한층 끌어올려 사용하는 기분이 든다. 작업을 마친 뒤의 보람도 상대적으로 크다. 아마도 내 적성에는 번역이 더 맞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