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번역의 현실
일전에 한 번 이야기했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내 직업을 소개할 일이 생기면 게임 번역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게임 번역은 일반적인 문서 번역보다는 단가가 높고 상대적으로 숙련된 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보통 이렇다. 만약 비교적 무난하고 평이한 사내 교육 자료 번역 건과 게임 번역 건 두 가지가 있다면 교육 자료는 프리랜서 번역사에게 맡기고 게임은 인하우스로 진행하는 식이다. 이런 상황은 회사마다, 팀마다, 클라이언트마다, 매번 다를 것이다. 프리랜서의 경우에도 게임 번역의 요율이 일반 문서보다는 조금 높은 편이다.
여하튼 그런 연유로 코로나 사태 이후로 나의 업무는 90% 이상이 게임에 관련된 프로젝트가 되었다. 번역이 되었건 리뷰가 되었건 게임 작업을 한다. 게임은 소비자에게 직접적으로 노출되는데다, 우리가 납품한 번역 텍스트에 대해 별도로 LQA*를 거치지 않고 서비스되는 경우도 많다.
규모가 큰 게임 회사에서는 언어별로 로컬라이제이션** 인력을 갖추고 있어 최종 에디팅이나 LQA를 거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자본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중소 규모 개발사에서 만든 게임이라면, 대부분 영국인으로 구성되었을 게임 회사의 인력이 한국어 번역 건을 살펴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게임 번역은 우리가 납품한 그대로 게임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층 신경 써서 작업해야 한다. 한 번에 이해되지 않는 요상한 문장으로 번역해 버렸거나 오역을 바로잡지 못한 것을 게임 화면으로 직접 보게 되면 정말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
사실 번역으로 제법 알려진 블리자드와 같이 전체 인하우스로 로컬라이제이션을 소화하는 경우는 특이 케이스이다. 블리자드는 유독 현지화에 공을 많이 들이는 편에 속한다. 블리자드에 버금갈 정도의 거대 규모 게임 회사라도 로컬라이제이션은 외주를 통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번역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느끼는 것일지 모르지만, 전반적인 게임 개발 프로세스에서 번역을 포함한 로컬라이제이션은 많은 경우 상대적으로 천대받는 기분이 든다. 애초에 할애되는 시간도, 자본도 별로 없어서 게임 개발의 거의 마지막 단계에 적은 예산으로 후다닥 해치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뜩이나 시간도 부족한데 단가도 싸기 때문에 고급 노동력을 계속해서 투입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한 게임의 번역을 여러 회사가 동시에 작업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따금 같은 게임 내에서도 한 용어가 통일되지 못하고 중구난방이 되거나, 심지어는 캐릭터의 이름까지도 다르게 번역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 이 까닭이다. 물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일관성을 확인하는 도구와 단계가 여럿 있지만, 그럼에도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녀석들은 생기기 마련이다.
질 낮은 번역을 변호하는 어설픈 변명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번역 업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어떤 게임의 현지화나 번역 품질이 그다지 높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해당 게임의 개발사에서 로컬라이션 자체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도 높다.
만약 내가 하는 게임의 번역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고쳐지길 바란다면 인터넷에서 한국어로 번역 욕을 하기보다는 게임 개발사 측에서 볼 수 있는 경로에 영어로 불만을 표하는 것이 효과적일 거다. 품질 높은 로컬라이제이션의 수요가 확연히 올라간다면 게임 시장과 번역 업계, 유저에게까지 여러 모로 선순환이 되지 않을까.
*LQA: 뒤의 QA는 Quality Assurance의 약자. 앞의 L은 Linguistic/Language/Localization 등 그때그때 다르게 쓰인다.
**로컬라이제이션: 엄밀히 따져 Localization과 현지화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Localization을 현지화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현지화가 로컬라이제이션에 포함되는 느낌이랄까. 교육 자료가 아니니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