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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회사 다닙니다. (13)

이상하고 신기한 게임 번역 세계

by 글쓰는비둘기


4년차 번역사의 두런두런


13. 게임 번역의 특수성





출판 번역이나 영상 번역은 한 콘텐츠를 한 사람이 도맡아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에 한 번 이야기했듯 게임 번역은 한 사람이 담당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다.

게임 제작 프로세스에서 번역을 비롯한 로컬라이제이션은 거의 막바지 단계에 자리잡고 있는데, 제작 기한의 끝자락에 붙어 있기 때문에 이 기한 내에 끝내려면 언제나 시간이 촉박하다. 한 사람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볼륨의 작업을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짓기 위해 게임 번역에는 많은 경우 다수가 참여하게 된다. 가끔 인디 게임이나 아주 규모가 작은 게임인 경우 번역사 한 명, 리뷰어 한 명이 작업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보통은 인디 게임이라 해도 최소 두 명 이상의 번역사, 한 명 이상의 리뷰어가 작업하는 것 같다. 이로 인해 많은 점이 출판 번역이나 영상 번역과 달라지게 된다.


물론 작업은 게임의 기본적인 방향성과 톤을 비롯해 글로서리(Glossary), TB(Termbase)와 같은 용어집을 공유하며 진행된다. 그럼에도 번역 스타일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역량의 차이도 조금씩 있을 것이다. 게임에 대한 이해도 제각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같은 게임이라 해도 중간 중간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진다던가, 반말을 하던 캐릭터였는데 존댓말이 불쑥 튀어나온다던가,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쭉 번역했다면 상대적으로 발생 가능성이 낮은 일들이다. 이런 문제를 다듬고 전반적인 품질을 향상하기 위해 리뷰어가 있지만 리뷰어가 하는 일은 말 그대로 리뷰에 국한된다. 번역문의 스타일이 들쭉날쭉하다고 죄다 뜯어고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게임 번역이 소설 번역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발생하기 쉬운 것이다.






또 레퍼런스 문제도 있다. 번역을 시작할 때쯤이면 미출시 게임이라도 데모 버전 정도는 이미 완성된 시점인 경우가 많다. 이때 고객사에서 번역사들에게 데모 버전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제공해 준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문제는 데모 버전이 있어도 일정이 너무 빠듯해서 그걸 플레이해 볼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을 때도 있다). 로컬라이제이션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고객사라면 원문 텍스트가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지 코멘트가 첨부된 원문 파일이나 게임 플레이 영상, 이미지 파일 등을 첨부해 주기도 하는데 이런 레퍼런스의 유무 여부에 따라 번역 품질이 크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아무런 콘텍스트 없이 move라는 단어만 띡 나온다면 이것에 적합한 번역이 '이동'이 될지, '출발하자'일지, 아니면 '치우기'가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이처럼 맥락이 없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원문이 비일비재하며, 안타깝게도 콘텍스트 정보가 어떤 방식으로나 전혀 제공되지 않는 경우도 적잖이 있다. 심지어는 동사나 주어도 아닌 to나 in만 적혀 있을 때도 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고객사에 문의(Query)를 넣게 되는데 그래도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에는 지레짐작으로 번역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런 원문이 적절하게 번역될 리가 없다.

그래서 게임 번역의 경우에는 훌륭한 품질의 번역을 해 내기 위해서는 번역사의 역량뿐 아니라 고객사의 태도, 담당 PM의 능력도 중요하다. 고객사가 다소 소극적이라 해도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PM이 소통에 능하며 업무 역량이 뛰어나다면 이러한 부분을 메꿀 수 있다.



mark-cruz-VW2oU66mwbc-unsplash.jpg Unsplash @mark_crz



마지막으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번역사의 게임 플레이 경험치이다.

책을 번역하든 드라마를 번역하든 해당 콘텐츠를 많이 접한 사람이 업무에 유리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게임은 조금 더 그 부분에 예민한 것 같다. 일단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는 책이나 영상물과 달리 게임은 본인이 직접 취미를 갖지 않는 이상 플레이 경험이 거의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게임 플레이 경험이 없으면 게임에서 쓰이는 용어에 대해 잘 알 수가 없다.


게이머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게임 용어들은 은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쓰는 단어와 조금 다르다. 또한 게임의 인터페이스나 각종 환경, 퀘스트와 보상 등 플레이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시스템적 요소도 있다. 이런 것은 말로 알려주기 어려운 것들이다.


번역 툴에 텍스트만 덩그러니 들어가 있고 이미지 레퍼런스도 없는 미출시 게임 작업을 한다고 치자. 스트링 ID에 적힌 quest_desc 따위의 몇 글자로 콘텍스트를 파악해야 한다. 게임 플레이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것이 게임의 퀘스트 창을 열었을 때 화면에 뜨는 퀘스트 설명 란에 들어가는 부분이겠구나,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런 부분들 때문에 게임 번역은 번역사의 경험이 중요한 편이며 단순 문서 번역에 비해 단가가 높다. 까다롭지만 재미있고, 보람도 있는 작업이다.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면 뿌듯하기도 하다. 다만 번역사들은 게임 회사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화면을 보며 LQA를 할 기회는 별로 없다. 그 때문에 게임이 서비스되었을 때 화면으로 보이는 번역문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에 안 드는 경우도 많다. 가차없는 유저들에게 인터넷 게시판에서 대차게 까일 수도 있다.

장차 게임 번역을 해 보고 싶고 그런 부끄러움을 감내할 자신도 있다면, 되도록 항상 똑같은 게임이 아닌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해볼 것을 추천한다. 세상에는 정말 각양각색의 게임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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