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과 번역
이따금 통역과 번역의 차이를 혼동하는 경우를 본다.
통역사와 번역사가 크게 다를 것 없는 직업이라고 여기거나, 아예 통번역사로 뭉뚱그려 얘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영어로 접근해도 이 점은 비슷하다. 영어 사용자들(English speakers) 중에도 Translator와 Interpreter를 헷갈려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통역과 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긴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공통점이 없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통번역사’라는 말은 ‘내외과의사’만큼 이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통번역대학원 중에는 통역과 번역을 함께 가르치는 곳도 있기 때문인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면 둘 다 병행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한국의 통번역대학원에서는 사실상 통역에 치우친 커리큘럼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고, 번역사보다는 통역사 양성 프로그램을 가졌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라고 통번역대학원 졸업생에게 들었다).
무엇이 되었든 결국은 본인의 적성과 성향에 맞는 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그 점에서 번역과 통역은 몹시 달라서 두 가지 모두 동일한 수준으로 탁월하게 해 내는 사람은 솔직히 온 나라를 통틀어도 거의 없을 것 같다.
앞에서 가볍게 든 예시이지만 의사들 또한 진료과에 따라 성향이 다르다고 들었다. 전문의 자격증을 두 개 가진 경우도 드물겠으나 그 두 가지가 반대되는 성격인 경우는 더욱 찾기 힘들지 않을까?
상상해 보면 간단하다.
통역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정신없이 흘러가는 말과 분위기를 읽어내고, 번역사는 사무실이나 집에 틀어박혀 내내 키보드만 두드린다.
보통은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이 통역으로 쏠리고 내향적이며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번역으로 흘러가게 된다. 업무의 성격이 극단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두 가지를 똑같이 잘해내기는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내가 본 경우에 한하면 통역과 번역을 모두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실 본업은 통역사로, 가끔 번역 일을 외주로 맡아서 한다거나 하는 정도였다. 전업 번역사로서 미안하지만 그런 경우는 부업일 뿐이지 전문 번역사라고 부르기 어려울 것 같다.
반대로 전업 번역사들 중에는 통역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내향인에게 그런 걸 시키면 고문이나 다름없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통역사와 번역가에 대해 한 가지 조그만 의문이 있다. 호칭 문제다.
통역사는 통역가라고 하지 않는데, 번역가는 왜 번역사가 아닌 걸까?
의사, 회계사, 노무사 등 통상 전문직에 붙이는 사(師 또는 士) 자를 붙여주기에는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인 걸까? 작가(作家)의 가(家) 자를 붙여준 걸 보면 많은 사람이 번역이라는 행위를 예술에 가깝다고들 보는 모양이다.
그러나 번역을 업으로 삼은 입장에서는 솔직히, 번역은 예술이라기보다는 기술에 가깝다.
어떤 누군가가 예술적 감각이나 언어적 재능이 있다고 해서 당장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대단한 수준의 번역을 할 수는 없다. 적어도 몇 년간의 훈련과 경험을 쌓아야 오역이 적고 매끄러우며 원문에 대한 이해가 깊은 번역이 나온다.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번역 업계에서는 직업적인 성질에 초점을 맞추어 ‘번역가’ 보다는 ‘번역사’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 출판 번역, 특히 문학의 경우에는 ‘번역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는 ‘번역사’라고 지칭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나 싶다.
사실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수 있다. ‘가’를 ‘사’로 고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애당초 변리사나 공인중개사처럼 자격증이 필요한 직업도 아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언어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의미적으로 조금 더 적절한 표현이 널리 사용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