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번역회사 다닙니다. (8)

프리랜서 번역사의 역량

by 글쓰는비둘기


4년차 번역사의 두런두런


8. 능력 있는 프리랜서 번역사가 되고 싶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어떤 프리랜서가 좋은 프리랜서일까?

번역 품질이 일관되며 뛰어난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일감을 많이 받아가는 건 소통이 잘 되는 번역사다. 메일을 보내면 수 분 내에 답장이 오고 의사소통이 원활한 상대가 함께 일하기 편하다. 품질이 좋아도 연락이 안 되거나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면 업무를 맡길 수 없다. 이따금 자잘한 오역이 있더라도 얼마간 품질을 유지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이 매끄러운 편이 훨씬 좋다(어차피 오역에서 자유로운 번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감 기한을 지키는 건 너무나도 기본적인 자질이기 때문에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춰야 프리랜서 번역사가 될 수 있을까?

이를 알아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프리랜서 번역사 구인공고를 낸 회사에 지원해 보는 것이다. 이력서를 내고 번역 테스트에서 통과해 프리랜서로 등록한 뒤, 꾸준히 일감이 들어오면 역량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프리랜서 등록도 되었고 납품도 기한에 맞추어 제대로 했는데 일감이 한두 번 들어온 뒤 끊기면 테스트는 어찌어찌 잘 보았으나 납품한 작업의 품질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뜻이다. 번역 테스트에서 떨어지면 아직 공부와 훈련이 부족하다는 뜻일 거고.


프리랜서 번역사들의 실력은 사람마다 천양지차다. 오역도 적고 문장력도 준수해 정말 깔끔하게 작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리뷰할 때마다 한숨을 내쉬게 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번역 업계에 발을 들이기 전에는 프리랜서란 엄청난 실력자들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피 튀기는 전장에서 회사라는 뒷배(?) 없이 맨몸으로 일을 수주한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alizee-baudez-QElq3IdWzlQ-unsplash.jpg Unsplash @alizeebaudez



현업 프리랜서 번역사들이 이 글을 본다면 속이 상할지 모르지만(그렇다면 사과드린다), 솔직히 말해 기본을 지키지 못하는 프리랜서도 많다. 윤문이나 멋진 문장력까지 바라는 것도 아니다. 지침과 가이드라인을 제대로 지켜주면서 콘코던스*를 잘 참고하고, 오역을 너무 많이 내지 않으면서 읽을 만한 한국어로 만들고 맞춤법을 잘 지켜주기만 하면 사실 프리랜서로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제법 많은 수의 프리랜서가 지침은 대강 훑어보기만 하고 콘코던스상의 일관성을 무시하기도 하며, 오역을 쏟아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회사 입장에서 무작정 일을 끊을 수는 없다. 프리랜서를 구하는 데에도 시간과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만약 프리랜서로 발돋움을 막 시작한 경력 1년 이하의 프리랜서라면, 작업을 진행할 때 우선순위가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납품 기한 >>> 지침/가이드라인 > 콘코던스/TM >>> 맞춤법 > 오역 없음 > 문장력


유려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오역을 내지 않는 것보다, 고객이 요청하는 가이드라인과 지침, 해당 번역의 히스토리를 따라 주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Damage를 ‘피해량’보다 ‘대미지’로 번역하는 게 더 자연스럽고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더라도(흔히 ‘데미지’로 쓰지만 원칙상 ‘대미지’가 옳은 표기다), 여태껏 ‘피해량’으로 번역되어 왔다면 이에 따라주어야 한다. 보통 열정 과다한 신입 번역사들이 콘코던스를 따르지 않고 자기 입맛대로 번역하는 경우가 잦다.


어쩌면 오역보다 맞춤법이 앞에 있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겠다. 오역 여부는 작업에 대한 집중도, 그리고 영어 실력에 달린 문제라 언제나 100%를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맞춤법은 1) 일단 한국어이며 2) 맞춤법검사기라는 툴이 있고 3) 맞춤법이 많이 틀리는 문서는 신뢰성이 떨어진다. 오역은 사람이니 낼 수 있지만 맞춤법까지 틀려서야... 라는 느낌이랄까.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렇게 떠들어대고는 있지만 사실 오역 여부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번역 품질을 공격하기에는 오역이 가장 좋은 표적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영상이나 게임 시네마틱 화면 등에서 보이스오버와 자막이 같이 나올 때는 치명적이다. 또 오역이 얼마간 나오는 게 어쩔 수 없다 해도 너무 쉬운 표현을 틀리면 좀 곤란하다(Saturday를 목요일이라고 한다든가. 근데 놀랍게도 이런 오역이 제법 있다. Left를 오른쪽이라고 한 것도 봤다. '남았다'라는 뜻의 left를 '왼쪽'이라고 한 것도 봤다).

그러니까 결국 다 잘해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휴. 번역이란 참 어렵다.



어찌되었건, 번역 회사에게나 프리랜서에게나 서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회사에서는 결코 작업을 내부에서 전부 처리할 수 없고, 프리랜서는 모든 일감을 엔드 클라이언트(End Client)라 불리는 최종 고객과 접촉하여 따낼 수는 없다.

지켜야 할 것도 많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으며, 들이는 노력에 비해 페이도 그리 많지 않은 고된 업계이지만 이 생태계에 들어온 이상 어쩔 도리 없다. 흰동가리와 말미잘처럼 공생하는 것이다.



*콘코던스(Concordance): 쉽게 말해 번역 히스토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Trados에서는 콘코던스, memoQ에서는 TM(Translation Memory)이라 한다. Trados와 memoQ는 번역 시 사용하는 CAT Tool 이름이다.




keyword
이전 08화번역회사 다닙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