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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회사 다닙니다. (10)

번역하는 사람들

by 글쓰는비둘기


4년차 번역사의 두런두런


10. 번역은 어떤 사람들이 할까




번역 회사는 여초다. 어쩔 수가 없다. 여성의 뇌가 남성의 뇌에 비해 언어 학습에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나는 이래봬도 갇힌 시야를 가진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편견을 가지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는 편이다. 언어를 전공하고 언어 공부를 오랫동안 해 오면서 많은 사례를 봐 왔지만 그동안 '꼭 여자가 언어를 잘하란 법 있냐'며 애써 스스로를 설득해 왔는데 이쪽 업계에 들어온 뒤로 그 노력은 산산이 무너져 버렸다.

프리랜서 비율을 보아도, 사내의 성비를 보아도, 또 업계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 봐도 이 업계는 여초였다. 그것도 압도적 여초. 심지어 이름이 중성적이거나 남성적으로 느껴져서 남자라고 생각했던 프리랜서들마저 여자들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남자가 없는 건 아니다. 상사들은 많은 수가 남자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여자가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는 사례가 많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에서 빠져나간 여성들이 많기 때문에 남녀 비율이 약간 맞아지게 되어버린 것 아닐까 싶다. 내가 페미니즘적 시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페미니즘적 시선을 가진 사람이 맞기는 하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시당하는 반쪽짜리다). 실제로 몇몇은 회사에서 짝을 만났기 때문에 아내 분들도 모두 번역사였지만 지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 세대였다면 상황이 달랐을 거라 생각한다.



어쨌거나 성별 이야기는 넘어가자. 여자가 많다는 걸 빼면 뭐가 있을까?

통역과 번역 이야기를 다뤘던 에피소드에서 한 번 말한 바와 같이, 내향인이 많다. 이건 남녀 성비보다 더 극심하다. 9.5:0.5 수준으로 외향인은 거의 눈 씻고 찾아봐야 겨우 한 명 있을까말까 한 것 같다.

우리 회사는 그래도 다들 친하고 화기애애한 편이라 가끔 수다도 떨고, 실없는 이야기도 나누기 때문에 사무실 분위기가 완전한 정적은 아니다. 그러나 듣기로 많은 번역 회사들이 개미 지나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한 와중에 키보드 소리만 들린다고 한다. 좀 심한 곳은 같이 일하는 사이인데도 인사도 겨우 건네는 수준인 곳도 있단다. 그러니까 내향인도 그냥 내향인이 아니라 극도로 내향적인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외향인들은 아마 견디기 힘들 것이다.

나는 내향인이기는 하지만 55:45 정도의 비율로 외향성도 있는 편이어서, 나도 그 정도 분위기는 힘들 것 같다. 차라리 혼자 재택을 했지.



andrew-neel-cckf4TsHAuw-unsplash.jpg Unsplash, Andrew Neel




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 같지만 많은 이들이 열정적인 콘텐츠 소비자다. 무슨 말인고 하면, 책과 영화, 드라마, 시리즈 등에 빠삭한 사람이 많다. 게이머도 많은 편이다. 그러니까 점심을 먹으면서 새로 개봉한 마블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노벨문학상을 탄 아니 에르노로 화제가 넘어가고, 또 갑자기 위쳐나 젤다 이야기를 꺼냈다가 지난 주에 간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랄까.


사회의 분위기나 세상이 흘러가는 트렌드에도 빠른 편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에 관심이 많은 성향이어서기도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그렇게 되기도 한다. 패션업계나 방송 업계만큼 선도적인 수준으로 빠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어느 정도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IT와 게임 업계의 끝자락에 쬐금 걸치고 있기 때문에 뒤처지면 좀 곤란하다. 특히나 업무 특성상 한국 콘텐츠가 아니라 외국 콘텐츠만 다루기 때문에 영어 문화권의 트렌드를 좀 빠르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참고로 요즘은 어디든 아주 엄격한 직업군이 아니고서야 복장이 대부분 캐주얼하게 변하는 추세이긴 하지만, 우리 회사는 타투나 피어싱, 삭발(여성 포함)도 아무 문제없다.


그러니까 이걸 다 합치면 영화나 미드 보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정장이나 답답한 옷보다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더 선호하며 머리는 염색을 하고 귀에는 피어싱을 박은 내향적인 여자가 나온다. 음. 안녕하십니까. 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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