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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회사 다닙니다. (9)

보안, 그리고 보안

by 글쓰는비둘기


4년차 번역사의 두런두런


9. 떠벌릴 수 없어 섭섭한 직업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나는 번역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번역에서 보안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것이 사내 문건이건 외부로 노출될 마케팅 자료건 간에, 번역하는 시점에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자료일 확률이 높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이미 공개된 내용이라 해도 국내 시장은 또 이야기가 다르니 마찬가지로 조심해야 한다. B2B로 기업과 함께 일하며 해당 회사의 문서를 상당히 이른 시일에 보게 되는 것이니 보안이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나 정보 자체가 돈이 될 수 있는 거대 기업의 경우에는 보안 이슈에 더욱 예민하다.


그래서 번역사들은 진행하는, 진행했던, 혹은 앞으로 진행할 프로젝트에 대해 입을 꾹 다물어야 한다. 구체적인 작업 내용은 물론이고 많은 경우 어떤 회사의 프로젝트를 맡았는지도 알리지 말아야 한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에 글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오프라인의 공개된 장소에서 떠드는 것, 친구나 가족에게 말하는 것까지도 금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NDA(비밀유지서약서)도 많이 쓴다.






게임의 경우 제조업이 아니라 콘텐츠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덜하지 않을까 싶을 수 있지만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게임 회사가 상장기업인 경우 제조업 계열의 회사와 다를 바 없이 엄격하고, 그렇지 않다 해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프로젝트를 맡긴 곳이 인디 게임 회사라 아주 소규모라 해도 그렇다. 사실 번역 당사자가 홍보담당자도 아닌데 이 게임 한국어로 번역된다며 떠들어서야 되겠는가? 이미 작업을 마치고 출시된 서비스라 해도 해당 회사와 협력하고 있음이 드러나면 정보가 누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디 어디의 뭐를 번역했다느니, 그런 말도 웬만하면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마음 놓고 이거 번역했다고 자랑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면... 음, 크레딧에서 이미 내 이름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면 괜찮을 거다.

실제로 이러한 보안 이슈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기도 한다. 정보 보안이라는 것이 여러 사람이 연관되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흘러나가기 쉽다.



회사에 처음 입사해 보안 교육을 받으면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NDA에 처음 서명을 할 때도 신기할 따름이다. 남들이 갖지 못한 정보의 접근 권한을, 그것도 국내의 그 누구보다 빨리 쥐는 것은 마치 권력을 쥐는 것처럼 무형의 어떤 힘을 가지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기도 하고.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같은 사회초년생 친구들이 회사 자랑을 할 때 나도 이러이러한 회사랑 이런 걸 한다고 자랑하고 싶은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섭섭해진다. 내가 번역을 한다는 건 알고들 있으니 다들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고, 그나마 이야깃거리로 삼을 만한 내용은 떠벌리고 다닐 수가 없다. 재미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저 찌들어가는 사회의 고인물이 되어 이것에도 저것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어진다. 내 일은 관성적으로 하게 되고, 남의 일은 관심도 없다. 어쩌다 회사 자랑, 일 자랑을 하는 사람을 마주치게 되면 무성의하게 듣고 한 귀로 흘리거나 자리를 피해 버린다. 그렇게 되었다. 일이란 게, 사회인이란 게 다 그런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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