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공부
영어 번역을 업으로 삼으려면 꼭 영문과를 나오거나 해외 체재 경험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 사람이 많기는 하다. 우리 회사를 보면 대다수가 해외 체류 경력이 있거나 영문과를 나왔다. 그러나 나처럼 영어 전공도 아니고,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어학연수조차 해보지 않은 사람도 있다.
영어 공부를 죽어라 하지는 않았다. 그냥 어릴 때부터 그랬다. 초등학생 때는 부모님이 사준 영어 동화책 테이프를 틀어놓고 신나게 동화를 따라 읽었고, 조금 더 자라서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 심취해 원서를 읽어보려 용을 썼다(별로 성공적인 시도는 아니었다). 미드와 영화에 푹 빠졌고 셰익스피어나 반지의 제왕도 좋아했다. 그 모든 콘텐츠는 다 영어로 되어 있었다.
공부 머리가 없는 편이어서 성적은 그저 그랬다. 외국어영역에서 2등급은 가끔 받았으나 1등급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영어를 잘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서 영문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수험생 신분에서 벗어난 이후로는 미드를 엄청나게 봤고, 유튜브에서 보는 건 대부분 영어로 된 영상이었다. 학교에서 영문과 수업도 조금 들었다. 원서로 읽는 책도 점점 늘었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로는 넷플릭스를 달고 살았다. 그건 다 공부가 아니라 그저 취미생활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영어를 번역하는 게 생업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외국을 다녀오든 다녀오지 않든, 영어를 좋아하고 언어를 다루는 일에 애정이 있다면 누구든 번역사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번역사가 된 뒤로 영어 공부를 훨씬 많이 한다. 전문 번역 회사로 이직한 뒤로는 영어 공부를 놓은 적이 없다. 평일에 퇴근한 뒤에는 거의 매일 공부를 한다. 아무리 미드나 영화를 많이 본다고 해도 영미권 국가에서 사는 것보다 영어에 많이 노출될 수는 없기 때문에 그저 더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난 영어를 많이 접했고 좋아했지만 그게 제대로 된 공부라고 할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영어를 어느 정도 하고, 토익 900점을 넘긴다고 문법 공부를 다 뗀 게 아니었다. 원서를 주루룩 읽는다고 문법이 다져지는 건 아니다. 내가 한국 소설 읽기를 좋아한다고 한국어 문법의 대가가 아니듯, 영문법도 잘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문법을 제대로 모르면 번역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난 아직도 영문법 공부를 한다.
한 가지 어려운 점은 우리나라에 영어학원은 많으나, 고급 영어를 가르치는 곳은 의외로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대부분 토익, 아이엘츠 등의 자격증 영어 혹은 비즈니스 영어이다. 좋은 번역을 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강의를 찾기가 은근히 쉽지 않다. 그래서 아직도 이런 저런 학원이나 강의, 공부 모임 등을 전전하며 독학을 병행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나뿐이 아니다. 번역이라는 업의 특성은 끝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든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든 상관없다. 번역 실력은 언어의 실력과는 별개이다. 그러니까 내가 영어가 부족하다고 영어 공부만 죽어라 파면 끝나는 게 아니다. 게다가 끊임없이 갈고닦지 않으면 점점 무뎌진다. 경력이 쌓인다고 능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되레 고여 버린다는 것이 억울하다.
물론 경력과 경험으로만 얻을 수 있는 노련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원문의 맥락과 성격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그렇다. 그러나 그 노련함은 3년차쯤 되면 슬슬 무뎌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일에 익숙해지는 만큼 점점 타성에 젖게 되고, 타성에 젖는 순간 번역의 질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번역의 품질을 유지하려면, 또는 더 발전하려면 쉬지 않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동력이 되어 더 정력적으로 일하게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지치거나 고인물이 되어 버려서 어쩔 수 없이 그저 그런 번역사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역시 성격적으로 모든 사람이 하기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다. 휴.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택한 일이니 받아들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