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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회사 다닙니다. (11)

언제까지 인간이 번역을 할 수 있을까

by 글쓰는비둘기


4년차 번역사의 두런두런


11. 미래에 사라질 직업 1위




학창 시절, 교과서였는지 신문이었는지 아니면 책이었는지 몰라도 10년 내에 사라질 직업 목록 같은 것에 항상 번역가가 끼어 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언제나 상위권에 있었다.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만든 목록이겠지만 그 근거에 대해서는 기억이 안 난다. 어쩌면 기계 번역이라는 것이 그때쯤 태동했는지도 모르겠다. 전자사전도 혁신적인 물건이었을 테고. 기술의 놀라움에 매료된 나머지, 아마 그 당시에는 ‘번역기’라기보다는 ‘단어 변환기’ 수준에 가까웠을 그 기술에 사로잡혀 번역가는 곧 기계에 밀려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라고 떠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로부터 15년가량이 지난 지금. 어느 샌가 10년 내에 사라질 직업 목록에서 번역가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모르겠다.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꼽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내가 본 목록에는 없었다고 기억한다. 2020년대의 지금은 놀랍게도 번역가보다 약사나 변호사가 더 먼저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했다.

뭐, 그전에도 번역가라는 직업이 사라질까 걱정한 적은 딱히 없었지만(내 일이 아니었다) 정작 내가 번역을 하는 사람이 되고 난 뒤에는 더더욱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언젠가는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솔직히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brett-jordan-POMpXtcVYHo-unsplash.jpg Unsplash @Brett Jordan




일단 인간이 언어를 구사하는 방식 자체가 단순히 입출력의 구조로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언어는 문화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사전을 그대로 옮겨다 단어만 바꾼다고 올바른 번역이 되지는 않는다. 특히나 영어에는 컬처럴 레퍼런스(Cultural Reference)가 많고 돌려 말하는 경우도 많다. 영어가 직설적이고 한국어가 돌려 말한다는 것은 흔한 오해이다. 반대로 한국어가 훨씬 노골적이며 직선적인 언어다. 이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야기가 너무 딴 길로 새는 것 같으니 이쯤하자.


여하튼 기계는 그러한 문화적 차이는 감안하지도 못할뿐더러, 빤한 반어법조차 알아듣지 못한다. 맥락에 따라 다르게 쓰이는 단어나 숙어도 셀 수 없이 많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밈도 많고 축약어도 많다. 한국어의 줄임말은 그래도 단어마다 달라서 구분하기 쉬운 편이지만 영어는 알파벳 축약어이기 때문에 같은 축약어에 다른 의미가 수백, 수천 개도 있을 수 있다. AOC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 의원인지, 성교 동의 연령(Age of Consent)인지 기계가 무슨 수로 알겠는가? 심지어 사람이라 해도 이런 맥락 파악 능력은 차이가 나는데 말이다.






물론 요즘의 번역기는 정말 많이 발전했다. 특히나 여행에서 쓰이는 간단한 회화 정도는 거의 완벽하게 번역한다(고들 한다. 나는 사실 안 해 봐서 모른다). 그렇지만, 음. 일할 때 흥미로운 문장을 만나면 가끔 파파고나 구글번역기가 어떻게 번역할까 궁금해서 번역기를 돌려볼 때가 있는데, 솔직히 엉망진창이다. 문장 형식이 조금만 문법에서 어긋나거나 겹문장이 너덧 개만 들어가도 이상한 소리를 해 대는 걸 많이 봤다. 그렇다고 문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않은 글쓴이를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원래 말이란 것이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는 건데. 그러니 아직 멀었다. 번역기 동지들(?)에게는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


두 번째 이유. 이렇게나 복잡한 언어 구사 방식과 문화적 차이, 맥락 등등을 모두 읽어내면서 파악하는 AI를 만들려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들 텐데, 그런 비용을 감당하기에는 아웃풋이 너무 보잘것없다. 엄청난 경제적 비용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가 고작 번역기 하나 만들겠다고 그 돈을 들이겠는가? 지금 당장 그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번역사를 고용할 수 있는데 말이다. 아주 길게 봐 줘서, 번역기 하나를 만들어 전 세계의 모든 통번역 관련 시장을 백 년이고 이백 년이고 장악할 수 있다면 모를까…아니, 그렇다 해도 모르겠다. 번역기는 애초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같은 OS처럼 생활에 필수적인 프로그램도 아니다. 그렇게 돈이 안 된다. 그러니 누가 굳이 자금과 인력과 시간을 투자해 만들겠는가? 사업에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이라니? 흠, 일론 머스크가 갑자기 번역에 꽂히면 모를까.



그렇다 해도 언젠가는 그런 번역기도 나오긴 할 것이다. 인간의 기술력이란 정말 경이롭고 기술 발전에는 가속도가 붙으니까. 그렇지만 내 생각에, 그건 아마 블레이드 러너처럼 인간에 가까운 안드로이드가 나오는 시기에 가까웠을 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희한한 점은 이미 AI가 예술을 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거다. AI가 작곡도 하고 그림도 그리며 소설도 쓴다. 그런데 그 소설이 영어로 쓰였다 가정했을 때, 그걸 한국어로 번역하는 건 제대로 못 할 거라는 거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AI가 쓴 소설을 인간이 번역하는 때가 올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작품은 AI의 것일까 인간의 것이 되는 걸까? 어느 쪽이 더 재미있을까? 그 소설의 예술적 가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 흥미롭고도 기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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