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사, 영어의 달인?
번역을 한다고 하면 번역하는 언어를 완전히 통달한 언어의 마스터이겠거니 하는 인식을 갖는 경우가 많다. 딱 잘라 말하겠다. 잘못된 인식이다. 매우. 아주. 몹시. 마스터라니? 정말 크나큰 오해십니다.
그런 건 있다. 번역사가 말하는 ‘영어 못해요’와 보편적으로 말하는 ‘영어 못해요’는 같지 않다. 영어와 친하지 않지만, 그러나 왠지 영어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의 기준과 번역사의 기준은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번역사들이 듣기․읽기․쓰기․말하기를 유창하고 능숙하게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는, 말하자면 거의 원어민에 가까운 실력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한 번 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나는 토종 한국인으로 서울에서만 평생을 자랐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문예 창작을 부전공했다. 흔한 어학연수 한 번 가본 적 없다. 대학을 졸업한 뒤 도쿄에서 1년을 살았고, 외국인과 연애해 본 적도 없었으며, 영어와 관련된 일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원도 가지 않았다. 이런 내가 영어를 잘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영어 번역을 하고 있다. 참고로 일본어는 전혀 하지 않고 있으며 100% 영어만 작업한다.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실은 조금 뿌듯하기는 하다) 나처럼 영어를 듣거나 말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사람도 번역 일을 하고 있다. 나는 듣기와 읽기 외에 말하기와 쓰기는 별로 자신이 없다. 영어와 별 인연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 비하면 조금 낫겠지만 원어민 수준이라고는 절대 못 한다.
물론 영어 실력이 대단히 뛰어난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봐 온 번역사들 중 많은 수가 본인은 영어를 못한다며 고개를 설설 저었다. 혹여나 누군가 농담조로라도 영어의 마스터처럼 이야기하면 황송해하거나, 기겁하며 양손을 크게 좌우로 흔들어댄다.
번역을 하고 싶은데 외국에서 공부할 기회가 없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또는 너무 대단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보여서 도전할 엄두조차 안 난다면, 그러지 마시라(내가 그랬다). 요즘처럼 넷플릭스와 유튜브가 있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물론 국내에서 혼자 공부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언어의 모든 영역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원어민처럼 보이고 싶다면 그것만으로는 어렵다. 그러나 번역사가 되고 싶은 거라면, 문제없다.
하지만 현실적인 부분도 지적하고 싶다.
나를 포함해 스스로 영어를 못한다 자조하는 그 모든 번역사들. 모두 언어적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다. 재능이 있어야 번역을 할 수 있다. 단순히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번역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인데, 사실 이것은 해 봐야 안다.
공부만 할 때는 알 수 없다. 영어만 잘해도 안 되고, 한국어만 잘해도 안 된다. 텍스트만 보았을 때 원문에서 어떤 의도를 품고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 읽어내고, 맥락에 따라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감각. 이런 감각은 노력 여하에 따라 길러지기도 하지만 애초에 기를 감각조차 없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영문학도도 아니었고 영어권 체재 경험도 없지만 나는 특이 케이스인 것 같기도 하다. 나의 동료들은 대부분 국제학교에 다녔거나 해외 유학 경험이 있다. 원어민이나 영어의 달인과 비교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지, 영어를 정말 못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영어는 잘해야 한다. 중요하니까 한 번 더 쓰겠다. 영어는 잘해야 한다.
내가 영어 실력도 얼마간 되는 것 같고 글쓰기도 좋아하고. 번역을 해보고 싶은데 내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다? 그렇다면 이력서를 예쁘게 만들고 번역 회사에 들이민 뒤 번역 테스트를 받아 보면 된다.
하고 싶은 게 영상이나 출판 번역이라도 뭐 어떤가. 붙을까 봐 걱정인가? 안 가면 그만이다. 떨어질까 걱정인가? 한두 번 떨어졌다고 좌절해 포기할 정도면 당신의 길이 아니다. 그러니 일단 도전해보자. It's that sim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