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금이(사십 살 금쪽이 )들의 변화

나 베트남에 가

by heyokeum

“나 베트남 가.”
친구의 말은 잔잔한 호수에 불쑥 던져진 돌멩이처럼 내 마음을 흔들었다.
“응? 갑자기? 거긴 왜?”
“입시학원을 해보려고.”

짧은 대화였지만, 그 속에 담긴 기운은 낯설고 강렬했다.
베트남이라니.
그저 휴양지나 여행지쯤으로만 여겼던 그곳을 친구는 터닝포인트의 무대로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에 어리둥절하며 동시에 본능적으로 반대하고 싶은 욕구가 스멀거리고 올라와
이유 없는 불신, 김 빠지는 말들로 친구의 결심을 꺾으려 했었다.
사실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이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건 늘 가장 가까운 이들이 한다는 말이 있는데 돌이켜보면 내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친구는 달랐다. 남편과 함께 스페인 한 달 살기 중 가우디 투어에서 만난 베트남 사업가의 말이 친구 마음에 불씨를 지핀 듯했고 그 불씨는 시장조사를 마치기도 전에 행동으로 옮겨졌다.
시장조사를 끝내자마자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작은 교실은 금세 학원으로, 지금은 버젓한 입시 전문 학원으로 성장해 있었다.
추진력과 실행력, 평소 내가 알던 친구의 모습은 아니었다.

나는 너무 놀라웠다. 삼십 년 넘게 지켜본 친구는 늘 나와 비슷했고 시작하기 전 백 번은 고민하는 타입, 오버싱킹의 동지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달라져 있었다. 망설임 대신 행동을 택했고, 생각은 곧 실행으로 이어졌다.

‘무엇이 이 친구를 이렇게 바꾼 걸까.’
이에 대한 궁금증은 오래 남았고 나도 언젠가 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를 품게 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여전히 아이 곁에 붙잡혀 있었고 큰아이 입시가 내 삶의 전부가 되면서 사람들은 “너 고3이야? 네가 입시해?” 하며
하루에도 많이 하는 날은 족히 10번씩 라이드를 하는 나를 측은해하며 종종 농담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웃어넘길 수 없었다. 실제로 나는 아이 대신 입시를 치르고 있었으니까. 생활 전부가 아이의 공부와 스케줄, 컨디션을 관리하는 일에 묶여 있었고
그래서 한 번은 딸에게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나 고3 때 이렇게 했으면 서울대 갔겠다.” 라며

농담이었지만, 동시에 진심이었다.
아이와 함께 한 그 시간은 너무도 소중했지만 갈수록 내 안은 점점 텅텅 비어갔다.

그때 마음속에 절실하게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안식년.
잠시라도 멈추지 않으면, 내가 나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친구가 도전으로 변화를 맞이했다면, 나는 도피라도 해서 쉼을 찾아야 했다. 그 차이가 우리의 길을 갈라놓았지만, 어쩌면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을 다시 만나기 위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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