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를 독립시키고 눈물쟁이를 웃게 하는데 어떻게 안 울어요
픽사의 신작 '엘리멘탈'을 보고 초반부터 엉엉 울었다. 엠버와 웨이드가 첫 데이트 하는 장면부터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하면 다들 어떤 부분 때문에 운 건지 의아해했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왜 그렇게나 울었지 싶어 조금은 머쓱하기도 했는데, 지난 상담 시간에 나눴던 대화에서 눈물의 실마리를 찾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수용하지 못하는 아이들, 상황 개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징징대기만 하는 아이들을 받아 주기가 너무 싫고 힘들다고, 나는 ‘아 내가 수학 성적이 안 나오는구나’ 인정하고 중학교 1학년 과정부터 다시 봤다고 말하는 나에게 상담선생님은 왜 그렇게 열심히 했냐고 물으셨다.
-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냥 했죠.
- 그냥이 아닌데.
음....... 크게 세 가지 정도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계속 잘했으니까 유지해야겠다는 압박이랑 자존심, 우리 집에 걱정은 언니로 충분하니까 나는 알아서 잘해야겠다는 생각, 중고생의 알아서 잘한다는 건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는 거였으니까요. 그리고 서울에 가겠다는, 집을 떠나겠다는 생각. 대구나 대전도 가깝다, 서울이나 부산 정도는 가야 한다, 하는 마음이었달까.
- 집에 계속 있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음.... 귀찮고 싫은 일들이 계속 벌어지겠죠.
- 그렇죠. 여길 떠나지 않으면 내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게. 계속 양보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게 너무 선명했던 거죠. 그게 눈에 선하게 보이니까 공부하는 힘듦은 '그냥' 이겨낼 수 있었던 거고. 근데 아이들은 그런 게 아직 안 보이는 거야. 선생님은 기본 마음이 다르니까 그런 애들이 이해가 안 되고 답답한 거고. 꼭 이해할 필요 없어요. 악착같이 서울에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나한테 딸려 있는 사람 없이 내 이름으로 혼자 좀 잘 살아보려고 왔잖아요. 나로 살아보려고. 그런데 여기서도 계속 중간에 끼여서 남들 살펴주고 있으니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싶지 않겠어요. 이게 이래서 힘들어 이유를 설명하려니 또 언니 얘기를 다 해야 하고. 저기 지방에 있는 언니가 옆에 딱 붙어서 계속 있는 것 같잖아요. 그거 더 안 해도 돼요. 그럴 필요 없어요. 다 둘러보고 아 그때 그걸 좀 더 노력해 볼걸 하면 그때 다시 와도 돼요. 혜은 씨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내 이름 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혜은 씨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일을 해요. 그래야 혜은 씨 한이 좀 풀릴 것 같아. 그래도 돼요.
내 인생만 그런 지 남의 인생도 그런 지 잘 모르겠지만, 경험한 인생을 기준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인생은 아무래도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우리 집에서 나는 스포트라이트 바깥에 있었다. 좋은 관심이든 나쁜 관심이든 간에 언니가 모든 관심을 끌어당겼으니까. 내가 좀 튀는 아이였다면 달랐을까? 나는 공부 잘하는 착한 딸이었다. 상담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역할에 맞는 능력을 갖춘 아이’였다. 뭐든 되도록 조용히, 혼자 알아서 해냈다. 엄마 아빠는 이미 충분히 힘드니까, 나한테까지 신경 쓰게 하지 말아야지.
영화 초반 엠버의 모습에서 나를 엿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신경 쓰지 않도록 가게를 잘 운영해 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부모님의 희생과 노고에 보답해야 한다고 여기는, 그러느라 자기 자신은 살펴주지 못하는 착한 딸. 그런 엠버가 웨이드를 만나러 평생을 지낸 파이어타운을 제 발로 벗어난다. ‘어디 불에 물을 타!’ 소리치는 아버지도, ‘너를 불과 결혼시키는 게 네 외할머니 유언이었잖니’하는 어머니도, 긴 시간 엠버의 집이자 짐이었던 가게도 그 순간 엠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 순간들로 가득 찬 인생에서 연애는 너와 내가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인 몇 안 되는 이벤트. '캘선생(@calirocktfuel)'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 하나 나 하나 영혼의 맞다이'. 네가 하늘, 나는 그 하늘을 채우는 날씨가 되는 것. (You’re the sky, I’ll be the weather. - 엘리멘탈 OST ‘Steal The Show’ 가사, LAUV)
엠버가 가족을 벗어나 독립적인 주인공이 되는 순간, 엠버가 엠버라는 이름으로 서는 순간이 너무 아름답고 부러웠다.
공짜 폭죽 하나만 필요하다며 떼를 쓰는 손님 앞에서 폭발하던 엠버는 (당연함, 화날 만 함) 웨이드를 만난 후로 진상 손님들에게도 조금 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로 침울해. 내 흐름에 맞는 일을 못 찾겠어.’라고 말하던 웨이드는 엠버와의 모험을 통해 웃음과 생기를 되찾는다. 나로서 숨 쉴 곳이 생기면, 내 마음을 내 마음인 채로 둘 곳이 있으면 일상도 넉넉해진다. 웨이드는 엠버에게 여유를, 엠버는 웨이드에게 반짝임을 선물한다. 결국 둘은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게 된다. K-장녀를 독립시키고 눈물쟁이를 웃게 하는 사랑이라니. ‘내 인생’을 살 용기를 주는 짝꿍이라니.
나는 딸려 있는 사람 없이 홀로 서고 싶다.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를 만나서 그동안 혼자되려고 애썼구나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다.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요구받지 않고 다른 사람 생각은 안 하고 그냥 둘이 꼭 끌어안고 싶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혼자되는 것도, 혼자인 사람들이 서로를 살피게 되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인 걸 알기에 엠버와 웨이드의 만남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엠버와 웨이드가 행복하기를, 새로운 세상과 고향을 마음껏 오가기를,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부채감과 종속감을 가지지 않기를, 계속해서 서로를 살피고 아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P.S. 김웨이드 씨 빠른 시일 내에 나타나 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