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뒤에 수험생이 되어있을 그 날을 미리 짐작하다.
오늘 아침 등굣길. 집 앞 편의점이 여느 때완 달리 아이들로 북적인다. 아침마다 자주 보이던, 지각할까 눈썹휘날리며 뛰던 아이들의 걸음걸이도 사뭇 여유롭다. 두 아이를 등원하는 내 손엔 집앞 상가에서 산 카페라뗴도 들려있다. 오늘 아침이 한가로울 수 밖에 없는 단 한가지 이유. 바로 수능날이기 때문이다.
매해 수능날이 되면 교통혼잡을 염려해 늘 교육청에서는 등교시간을 9시 이후로 하라는 지침이 내려온다. 덕분에 일년에 한 번, 아침에 이런 호사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늦은 등교로 인해 오늘은 피치 못하게 아침활동을 건너띄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늘은 매주 두 번 세줄쓰기날. 날이 날이니 만큼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주제가 있었다. 나는 초록색 전자칠판에 오늘의 세줄쓰기 주제를 비장하게 띄운다.
"내가 오늘 수능을 보는 수험생이라면 어떤 기분일까?"
10분 남짓여의 시간동안 긴 글은 어려울테고 간단하게 나마 기분이라도 쓰며 오늘 수능을 맞은 수험생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느끼게 하고 싶은 나의 깊은 의도가 담겨있는 주제였다. 아직 아이들에게 수능이라는 시험은 멀고 아득한 무언가로 느껴지는 지 그 주제를 본 아이들의 눈빛이 오늘 아침에 본 희부윰한 안개를 꼭 닮아있다.
이럴 땐 내 이야기로 먼저 시작해야 연필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캐치한 나는 서랍 속 깊은 곳에 넣어둔 나의 고삼 수능날 이야기를 조심스레 풀어헤친다. 1교시 언어영역부터 마지막 제 2외국어영역까지. 아직까지 뇌리에 또렷이 박인 그날의 기억.
시험을 반 쯤 치른 후 돌아온 점심시간. 속이 얹혀 넘어가지 않던 반찬 돈까스를 꾸역꾸역 씹어 삼켰던 일. 영어듣기 평가 한 문제를 제대로 못들어 속이 상했던 일. 시험을 치르고 나와서 어둑한 사위를 보며 후련함 보다는 앞으로의 미래가 아득해 꺼이꺼이 울었던 일. 실타래처럼 얽힌 수능날의 이야기를 풀어놓다보니 교실의 공기도 미세하게 바뀌어있었다. 어찌나 집중했던지 내 수능이야기에 폭 빠져든 25개의 눈동자가 깜빡이는 소리만 들릴정도로 교실은 이내 적막해졌다.
2교시 수업을 시작하는 종소리가 그 적막을 깨부수고 들어온다. 오늘따라 그 종소리가 마치 수능장에 울리는 종소리마냥 날카롭게 내 귀에 박혀들었다. 종소리가 끝나자마자 맨 첫 줄 앞자리에 앉은 수현이의 발표로 2교시의 포문을 연다.
"오늘 이 한 번의 시험으로 내 인생이 결정될 것 같아 너무 긴장되고 떨립니다.
내 이야기를 유독 집중해 들은 수현이의 발표하나에 그 다음 아이들의 마음도 다 복사붙여넣기 한 듯 꼭 같은 마음이었다. 대부분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 하나라도 틀리면 내가 원하는 대학에 못간다는 생각에 불안할 것 같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못 앉아있을 것 같다. 몇 년간 공부한 게 한 번의 시험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이 무서울 것 같다. 대부분 부정적인 기분이 교실을 가득 메웠다. 그 와중에 불쑥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되어 설렐것 같다는 우리반 귀염당당 준희의 한 마디가 잿빛 일색이던 교실을 환히 밝힌다.
발표 순서가 뒤로 갈 수록 아직 수능은 8년이나 남았으니 지금 열심히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해야겠다는 나름의 포부를 다지는 당찬 아이들도 있어 내 마음을 뜨겁게 적셨다. 25명의 발표가 끝나자 교실은 수능시험장을 방불케할 정도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험생의 마음으로 세줄쓰기를 하며 온전히는 아니라도 그들의 마음에 가닿았기 때문이리라.
누군가에겐 한없이 여유로운 아침이었을테지만, 수험생인 누군가에겐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 가득 얹힌 그런 날. 같은 아침이지만 가벼움과 무거움이 엇갈린 날. 이런 날엔 온전히 그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할 순 없지만 이렇게 세줄쓰기를 하면서 잠시라도 그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포개보며 가슴이 뭉근해지는 경험을 하는 것도 참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 하루. 요즘 세줄쓰기에 소홀해졌지만, 이런 아이들의 마음을 엿보며 다시금 열심히 세줄쓰기를 해나가야겠다는 추진력을 얻는다.
아직 8년이나 남은 수험생의 마음을 이미 경험해본 아이들, 아마 8년 후엔 더 단단한 마음으로 수능시험장에서 오늘 일을 살풋이 떠올리며 힘껏 미래를 향한 발돋움을 하고 있으리라.
지금쯤이면 수능장을 빠져나와 가족의 환대를 받으며 돌아갔을 수험생들. 10여년 전 나를 떠올리며 작게 응원의 메세지를 남기고 싶다.
지난 수 년간, 무거운 가방을 메고 딱딱한 책상과 의자를 꿋꿋이 버티고, 수많은 유혹과 고난을 잘 헤쳐가며, 대망의 종착역인,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리게 만드는 이 수능시험까지 무사히 달려오고 완주해낸 수험생들.
오늘 하루는 다 잊고 푹 쉬기를. 일단은 끝났으니까. 그간 수고해온 자신을 한껏 토닥이는 밤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