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기억이 까무룩 할 만큼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 일하느라 집에 계시지 않는 동안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사다 놓은 책들을 읽었다. 심지어 화장실 갈 때도 책을 들고 갔을 정도니까. 책은 내게 가장 좋은 놀잇감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아마 사춘기와 함께 발현된 나의 지적 허영심은 지금껏 책을 읽고 사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책을 읽기만 하던 때에는 딱히 책을 고르는 어떤 기준이 없었다. ‘궁금해!’라는 생각이 들면 일단 샀다. 원래 책은 사둔 것 중에서 읽는 거라고 하길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어 일단 사고 본다. 덕분에 사둔 책 중에 다 읽지 않고 버린 것도 수십 권이 된다.
나는 편독이 심한 편이다. 몇 해 전까지는 다양하게 읽지 못하고, 좁디좁은 주제 안에서만 책을 읽는 자신의 독서 취향이 조금 부끄러웠던 것도 같다. 학교에서 꼭 읽어보라고 하는 책, 두껍고 어려운 책, 들고 다니기만 해도 있어 보이는 책들은 나와 친해지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조금 난도 있는 책을 즐길 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여전히 결핍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나만의 취향이 분명해진 거로 생각하기로 했다. 읽고 싶은 책이 조금 더 분명해진 거라고. 독자로서의 나에게는 그저 ‘지금의 내 관심사와 가까운가?’가 책을 고르는 가장 우선의 기준이었다.
책 본문을 교정하기 시작하고, 본문 디자인을 잡아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여느 때처럼 환기가 필요하면 가까운 서점에 나들이 가듯 놀러 가곤 했는데,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구경만 하고 오는 게 아니라 어느새 내 품에는 사 가려고 안아 챙긴 책들이 하나둘 쌓였다. 불과 몇 달 전의 이야기지만, 그때가 가장 건방지고 열정 넘치던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이제 본문 좀 만지기 시작했다고 책의 주제나 내용보다도 디자인적 요소들이 책을 고르는 기준이 되었다.
‘이 책은 여백이 왜 이래?’ ‘이 책은 글자 배열이 별로인데?’ ‘이 책은 왜 이 표지를 사용한 거지?’ 기존에 나와 있는 책을 보고 제작자의 의도를 궁금해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생각이 먼저 들었다. 좋게 봐서, 신입이라 할 수 있던 생각이었다. 뭘 몰랐다.
작가님과 원고를 여러 번에 걸쳐 수정하고 다듬는 과정을 거치면서, 또 수정원고를 기다리는 동안 배열과 오탈자를 다시 점검하고 수정할수록 겸손해졌다. 아니,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수정은 해도 해도 계속 틀린 게 보이는 건지, 처음에 만들 땐 ‘이거 진짜 마음에 든다! 괜찮다!’ 생각했던 레이아웃이 답답해 보이고. 그제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힘들이지 않고, 정성 들이지 않고 만든 책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동료와 함께 애쓴 장면 하나하나가 모여 본문 사이에 켜켜이 쌓인다. 그 노력의 결과는 독자가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보이지 않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가독성이 떨어져서 읽다 말았다고 생각한 책이 있다면 그건 텍스트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편집자와 디자이너는 책을 온전히 책으로 보지 못한다.’ - 이지은, <편집자의 마음> 중에서
물론 여전히 책을 고를 때마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생각이 먼저 든다. 다만, 비판하고 비난하려는 마음보다도 ‘어떤 의도로 만든 걸까?’ 공부하기 위한 마음으로 보게 된다. 그래서 내 눈에 잘 만든 책이든, 그렇지 않은 책이든 관계없이 다시 독자의 마음으로 기꺼이 구매한다.
단연 책의 핵심은 내용이다. 독자들이 책을 가독성 있게 오래도록 읽게 하는 힘은 디자인에 있을 수 있지만, 그게 책의 내용과 저자의 의도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걸 점점 더 깨닫는다. 그래서 인쇄소에 맡기기 전까지 계속 이래저래 수정해 보며 다시 점검하기를 반복한다. 제작자가 힘들고 귀찮고 수고로울수록 결과물이 좋다는 걸 아니까. 내가 만드는 책을 읽게 되는 독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피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용의 난도와 관계없이 ‘읽기 수월한 책'이라고 느꼈으면 좋겠다. 아마도 그게 가장 큰 칭찬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