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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이 Jun 22. 2023

어쩌다 보니 책 디자이너

어느새 네 번째, '하는 일'이 달라져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던 3년의 세월은 새로운 도전으로부터 도망치기 좋아하는 나조차 움직이게 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사실, 도망치고 싶었는데 등 떠밀어 줄 핑계가 필요했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은 여전히 두려워서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할 명분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계획에 없던 디자이너가 되었다.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해야 할 것들이 딱히 많거나, 그 과정이 복잡하지는 않았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세대라, 국가 지원을 받아 ‘출판 편집 디자인 과정'이 있는 학원을 등록했다. 수업은 주 5일, 오전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5개월 동안 진행됐다.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다루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한 달 만에 자격증 취득을 위한 시험을 봤다. 자격 취득을 위해 보았던 시험은 정확한 판단력, 프로그램을 다루는 능력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손이 빨라야 했다. 신중하고 손이 느린 탓에 한 가지 자격시험은 재수하기도 했다. 5개월의 시간 동안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었어도, 내가 무엇에 재미를 느끼고 좋아하는지, 또 어떤 역량을 더 길러내야 하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시험공부를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디자인을 통한 작업물이 나오기까지 '시장분석 - 트렌드 정리 - 제작 방향 설정 - 제작 - 수정 - 확정'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나의 언어로 적었기 때문에 흔히 통용되는 것과 다를 수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기획 단계에서 가장 큰 재미를 느꼈다. 개인적으로는 디자인 수업을 듣기 전까지 기획 단계가 가장 어렵고, 지루하고, 어렵다고 느껴왔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학원 수업을 듣는 동안 선생님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너희 생각, 너희 취향은 중요하지 않아."였다. 이전에도, 또 지금도 '나'의 주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게는 그보다 어려운 과제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만드는 모든 작업물은 '창작물'이면서도 클라이언트의 요청으로 만들어지는 상업적 작업물이기 때문에 만드는 나의 취향이나 주관을 염두에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행히, 좋아하는 '기획 과정'을 꾸준하게 연습하다 보면 대중의 취향을 읽어내는 눈을 더 길러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우연히 시작했지만, 이전보다 훨씬 업무 만족도가 높다. 피드백이 빠른 덕분이다. 부정적인 피드백이든 긍정적인 피드백이든 관계없다. 디자인 업무를 시작해 보니 내가 생각하고 결정하고 만들어 낸 것에 대해 좋은지 나쁜지 빠르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것과 다음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느껴졌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리고 분명한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 회사 내부적인 평가 외에 대중들을 통해 공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역시 높은 업무 만족도를 느끼게 했다. 


 이전까지는 진로나 직업을 정하는 데 가치관이나 강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했던 일도 여러 조건에 빗대어 나를 분석하고 찾아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좌절감이 컸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내가 살아내고 싶은 삶의 방향이 있고, 그것을 위해 다양한 일 경험을 쌓아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진로를 전환할 때마다 새롭게 '찾아지는 나'라니. 앞으로는 새롭게 도전할 기회를 앞두고 도망치기 위한 망설임은 덜하지 않을까? 


 디자인 수업을 수료하고도 한참 동안 어떤 것을 만들고 싶은지, 가장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할 수 있는 주제가 되지 못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나머지는 우연의 기회가 닿는 대로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책을 만들고 있다. 나는 책을 읽기 좋아하고 만들기도 하는 책 디자이너가 되었다. 아직 첫 책은 나오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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