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쇼이 Jun 27. 2023

디자인'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요.

 


우연히 닿은 기회로 출판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학원을 다니면서도 배운 거라고는 디자인 툴을 다루는 것 뿐이라, 당연하게 ‘디자인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처음으로 받았던 업무지시는 출간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책표지 디자인 시안을 두 가지 만들어 오는 거였다. 시안을 완성해서 공유하기 전에 책의 콘셉트와 원하는 느낌을 전달받고 레퍼런스가 될 후보를 추려서 ‘왜 이 표지 디자인들을 레퍼런스로 생각했는지' 중간보고를 했다. 정리해간 레퍼런스가 통과되고, 다른 느낌의 두 가지 시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채 안 되는 동안 어떤 게 더 주제에 맞는 표지라고 생각하는지 불특정 다수에게 투표를 받았다. 그렇게 출간될 책의 표지 시안이 먼저 결정됐다.  


내가 할 일은 이제 끝났구나 싶어서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기획하고 있었는데, 대표님이 시간이 더디게 걸려도 좋으니 이왕이면 책 편집도 내가 해보면 좋겠다고 하셨다. 당시의 나는 교정 교열도 볼 줄 몰랐을 뿐 아니라, 책을 어떤 과정을 거쳐 제작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서 (철저히 디자이너의 입장으로) 정해둔 판형(규격)에 맞게 잘 배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작가의 건강이 나빠져서 모든 작업이 일시 정지되는 상황이 생겼다. 아직 원고를 다 받지 못한 상태였다.


큰 도움이 되었던 '편집자 K'님의 편집자 강의
원고를 교정교열할 때는 종이로 출력해서 보는 게 훨씬 몰입이 잘되는 듯하다. 기분 탓인가.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지만, 일이 멈춰있던 동안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이라서요'라고 말하며 엉망진창인 책을 낼 수는 없는 거니까. 잘 만들고 싶고 제대로 만들고 싶었다. 오프라인으로 배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온라인으로 배울 수 있는 책 편집 교육을 찾았다. 3개의 강의를 듣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때에 따라 원고를 챕터별로 받기도 하지만 되도록 모든 원고를 다 수령한 후에 이후 과정을 시작하는 게 좋다는 것, 원고의 교정을 거친 후 책의 내지 디자인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작가들이 자기 글을 쓰면서 교정 교열까지 진행해서 전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리 내 읽어보며 좋은 표현을 찾아서 글을 디자인해야 한다고 말이다. 알고 보니 진행 과정도 뒤죽박죽이었다. 아이고, 두야. 


 여전히 첫 책은 작업을 마치지 않은 상태지만, 확정된 부분들을 가지고 여러 곳에 인쇄 견적을 문의했다. 약 12군데에 견적을 문의했는데, 응답이 온 건 네 군데 정도였다. 그중 전화 통화를 했던 몇몇 인쇄소에서는 "담당자님, 혹시 이번에 만드는 책이 처음인가요?"라고 물어왔다. 미숙한 신입인 걸 들키면 바가지 쓰고 사기를 당하게 될까 봐 한껏 가드를 올려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경력자에게 아무리 알은척해 봐야 미숙한 신입인 게 티 나기 마련이라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네, 처음 책이라 모르는 게 많아요. 알려주세요."라고 했더니 "처음인 것 같아서 물어봤어요."라고 하면서, 돈을 들여가며 물성으로 만들어지는 건데 실수해서 망치면 안 되지 않겠느냐며. 견적을 문의할 때 알아두어야 하는 점이나 아직 인쇄를 맡기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수정해야 하는 부분들을 짚어주셨다. 솔직히 창피했다. 꼼꼼히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배운 대로 잘 적용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견적을 문의하고 들었던 응답내용들은 나중에 따로 모아 공유하려고 한다) 


 공부하고 배웠던 것들이 실제에서 다르게 쓰이는 것을 일을 하며 배우고 있다. 인터넷과 책에 아무리 많은 정보가 나와 있어도 정말 현장에서 필요한 정보들은 부딪쳐 가며 익혀야 한다. 창피는 잠깐일 뿐, 나의 실수로 인해 잘못된 책이 나오는 건 더 큰 문제니까. 인쇄 제작이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정해야 할 부분들을 알게 됐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내가 했던 실수들, 그래서 바로 잡아간 내용들을 꼼꼼하게 기록해 놓자. 15년 차, 20년 차들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보다 더 왕초보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이전 01화 어쩌다 보니 책 디자이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