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멸의 방정식 2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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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나 자신이 무척이나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희열에 쌓여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행복한 기분 따위가 아니었다.
지독한 상실감, 허무, 슬픔이 한데 휘몰아쳐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선 듯한 공허함, 그것들이 나를 감쌌다.
존재가 희미해져 제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의 느낌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깃털이 불안하게 떠다니듯 가벼워진 존재감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다가왔다.
스모그가 가득 깔린 잿빛 하늘에 비친 플로팅 홀로그램과 무기력하게 고개 숙인 채 정처 없이 떠도는 인간들, 그리고 어지러이 움직이는 로봇까지(사전적 분류에서 휴머노이드, 안드로이드, 사이보그 등이 엄연히 다른 카테고리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편의상 이것들을 전부 로봇이라 칭하겠다. 사실 그것들, 특히 사이보그와 같은 부류는 이미 21세기에 보편적이었던 인류의 모습으로부터 멀어져 육안으로 휴머노이드나 안드로이드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적어고 문외한인 내가 보기엔 말이다.) 전부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불현듯 낯설고 섬뜩하게 느껴져 발 밑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아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의 존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기에 생의 감각이 흐려져 걸음을 떼는 순간 날아가 버려 나의 존재가 낱낱이 흩어져 버릴 것 같았다.
흐려진 초점 속에서 선명히 다가오는 존재의 모호함이 어찌할 수 없는 아이러니로 다가와 나를 어지럽혔다. 결국 이 감각 속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었기에 방전된 로봇처럼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1. 이인감
을씨년스럽다고 느낄 만큼 방은 비어있었다.
커다란 창문을 배경으로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코팅스틸 재질의 책상과 자질구레한 사무용품, 가죽 재질의 검은색 소파 하나가 방을 이루고 있는 전부였다.
책상 앞에는 은색 안경을 쓴 채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서류를 읽으며 앉아있었다.
냉담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남자는 황량한 방과 잘 어울리는 듯했다.
"이 시대는 미쳐있습니다."
Q가 의자에 앉아 서류를 보다 말고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대뜸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이 시대가 미쳐있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쓰레기통에서 쓸만한 부품들을 뒤져 찾아가는 저 안드로이드인가 사이보그인가 하는 로봇 놈들도 알고 있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사실은 내가 이 원인 모를 감각에 시달리고 있고, 일상생활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겁니다. 계속 이대로 내버려 두다간 그저 감각이 아니라 현실이 되겠죠. 말 그대로 낱낱이 흩어져 버릴 것 같단 말입니다."
도대체 저 인간은 내가 여기에 왜 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순간, 필요 이상으로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이 들끓었다. 이 감각이 나를 엄습한 이후부터 항상 이런 식이다. 상황에 맞춰 어떤 감정을 꺼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어 강렬하게 타오르는 일시적인 감정들만이 휘돌았다.
"일단 앉으시지요."
Q는 나를 소파로 안내하며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시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평가는 섣부르게 내리지만 한 시대가 끝나기 전까지 그 시대를 풍미한 시대정신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요. 이 시대는 너무 빠르게 질주하고 있지만 패러다임이 쉽게 바뀔 것 같지 않아 언제 시대가 끝날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혼란스러운 감각 때문이 아니라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꺼내는 Q의 말에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침묵을 선택했다. Q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차를 건넸다.
"캐모마일입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죠. 물론 진짜 캐모마일로 우려낸 차는 아닙니다. '센트 컵'에서 적당한 향기를 조합해 그럴듯한 냄새 정보를 뇌에 전달하는 방식이죠. 아시다시피 진짜를 구하기 어려운 세상이지 않습니까."
차의 냄새를 맡으니 예의 그 감각이 더 선명해지는 듯했다. 냄새는 분명 향기로웠지만 가짜라는 말을 들으니 가장 즉각적이고 예민하게 반응해야 할 오감까지 고장 나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예의상 한 모금을 마시고 차를 내려놓았다. Q는 나의 그런 모습을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의 과민 반응 때문인지, 혹은 차로 인해 선명해진 그 감각의 여파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으나 공기가 무거웠다.
"상담에서 래포 형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한마디 하려 몸을 살짝 일으킬 때, Q는 나의 불편함 따위 고려할 대상도 아니라는 듯 갑자기 말을 시작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그들 사이에 형성되는 긍정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래포라고 합니다. 쉽게 형성되지는 않지만 공감대를 만드는 것이 때로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죠."
그가 서류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아까 세상이 미쳐있다는 말, 당신의 이야기를 읽어보니 저와 어느 정도 공통점이 보이는 것 같아서 꺼낸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무엇보다 차 한잔도 진짜를 구할 수 없는 세상이지 않습니까."
Q는 정신과 의사이다. 이 시대의 정신과 의사는 인간뿐 아니라 로봇까지 환자로 상대하기 때문에 21세기와 다르게 기계공학적 측면과 컴퓨터 공학적 측면에 더불어 인간의식의 미묘함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인간의 의식은 과학의 발전과는 무관하게 탐구할 수밖에 없는 난해한 영역이기에 이들은 심리학, 철학, 인문학에 통달해야 했고 로봇의 인식체계와 관련된 회로를 수리하기 위해 기계과 컴퓨터 공학에 능숙해야 했다. (극단적 박애주의자들은 로봇의 인공지능은 인간의 의식체계와 매우 유사하하기에 이들에 대한 수리를 '치료'라 부른다. 그 과정에 필요한 것이 약물과 상담이 아니라 기름과 회로의 교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음, 그 감각이라는 것 말입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봅시다.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나타났습니까?"
"일주일 전부터입니다. 퇴근길이었죠. 왜, 그럴 때 있지 않습니까? 갑자기 오감이 흐려져 주변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워지고 원인 모를 이질감이 엄습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이요."
"공황장애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공황장애는 아닐 겁니다. 확실히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증상만 보면 공황장애와 매우 흡사합니다."
"열감, 가슴 통증, 공포, 오한 이런 증상들 말이죠? 맞습니다. 증상은 흡사합니다. 하지만 무게감이 다릅니다. 주변에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물어봤고, 제 나름대로 찾아보니 그들의 증상은 무겁습니다. 육신을 떠나려는 생의 감각을 억지로 붙드려는 발버둥의 산물이라 할까요. 전문가가 아니라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그 감각을 최대한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 육신은 그렇지 않아요. 마치 몸이 영혼에게 떠날 테면 떠나라, 붙잡지 않겠다, 라며 흔쾌히 보내주는 듯합니다. 세상을 초월해 버릴 듯 한 '그 감각'이 갑자기 엄습해 오는 겁니다. 저는 제 삶에 미련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 감각'이 찾아올 때 느껴지는 이인감이 참을 수 없게 불쾌한 겁니다."
"자꾸 '그 감각'이라 하니 불편하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부르는 게 좋을까요. 음, 이건 어때요? 우리, 그 감각을 초월감이라 불러봅시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증상에서 착안한 이름입니다. 이름 붙이기에서 오는 주관화가 오히려 대상을 직시하는데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초월감이라. 세인의 법칙을 넘어선 고매한 수련자들이나 느낄법한 멋들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런 감각을 나 같이 찌들 대로 찌든 인간이 느낄리는 없다. 이건 수십 년간 딥러닝 한 구형 AI가 데이터 량이 많으니 Cade(Clavis ad evolutionem)사에서 갓 출시된 AI와 같은 성능을 가질 것으로 지레짐작 하는 것과 같다.
Q는 자신의 작명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떤 증상인지 알았으니 당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이야기해 보세요."
그에게 휘둘리는 듯했지만 한시라도 이 구역질 나는 감각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