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자가 갑자기 먹고 싶어서 “새우깡 먹고 싶어!”라고 혼잣말했는데, 6학년인 막내딸이 학원 다녀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사 온다고 했다. 딸은 내가 아까 자기한테 삐진 줄도 모르고 대꾸한 거다. 사실 나는 스트레스가 쌓여서 과자가 당겼다. 막내 주려고 양말을 사 왔는데, free 사이즈의 양말이 발에 끼인다며 신으려는 시늉만 하고 던져버린 거다. 나는 자기 생각해서 사 온 것이고 그냥 신지 뭘 그렇게 까탈스럽게 구나 싶어 딸에게 예민하다고 했는데, 그걸 인정하지 않은 것도 섭섭했다.
“새우깡 먹고 싶어!”
순간 머릿속을 스친 과자였다. 나는 문득 며칠 전에 아들이 한 말이 생각났다. 요즘 밖에 신고 나갈 양말이 없다며 양말 좀 사달라고 했던 말. 나는 다음 날 대형마트에 가서 열 켤레나 되는 양말 세트를 사 와서 자신 있게 아들에게 내밀었다. 아들은 한 켤레를 신어보려 하다가 말았다.
“왜 이렇게 양말이 거칠어요! 빨아서 주지 않고. 못 신겠어요!”
순간 나는 또 신데렐라 병에 사로잡혔다. 자식들이 새엄마, 새언니 같고 나는 신데렐라가 된다고 생각하는 병. 아들은 양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팽개쳐 놓고 거실에서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들이나 딸이나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예민함이 꼬리를 물고 아들의 핀잔보다 더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남편에 대한 기억이었다. 항상 수건을 빨면 세탁기의 건조 기능을 사용하는데 그날은 탈수만 하고 수건을 말린 거다. 남편이 화장실 수납장에 바싹 마른 수건을 보고 핀잔을 줬던 일이 생각났다.
“수건이 왜 이래? 이렇게 거칠면 닦을 때 따갑다고!”라고 하면서 화장실 서랍장에 있는 수건을 죄다 꺼내와 다시 빨라고 했었다. 나는 건조 기능을 써서 올이 살아있는 부드러운 수건이 좋지만 그렇지 않은 수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남편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세탁기 건조 기능이 없었을 때도 잘 사용했으면서…. 나는 가족들에게 폭탄 맞은 기분에 화가 쌓였고 왜 맨날 내가 이해해 줘야 하고 나는 이해를 못 받나 싶어 허전한 마음을 무엇으로 풀까, 생각하고 있었다.
“새우깡 깡….”
‘얘들이 아빠 닮아서 예민한가 보지!’
이런 푸념을 하고 있는데, 더 강한 과거가 하나 생각났다.
동생이 딸과 함께 작년 여름에 우리 집에 와서 며칠 묵고 갔는데 함께 대형마트에 가서 조카 신발을 고른 적이 있었다. 동생이 결혼식에 가야 해서 딸의 구두를 고르고 있었는데, 조카는 발이 예민해서 구두를 못 고르고 있었다. 나는 조카가 신고 있던 신발을 보고 물었다.
“멕시코에서 실내화를 신고 온 거야?”
“응, 이 신발이 편해서 신고 온 거야. 딸이 발이 예민해서 신발 고르기가 힘들어.”
동생은 멕시코에 사는데 시누이 결혼식 때문에 한국에 온 거였고 이참에 딸의 방학 동안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는 중이었다. 나는 그래도 학교 안에서나 신을 법한 실내화를 신고 온 게 이해가 안 갔다. 동생은 멕시코에서도 구두를 골랐는데 딸에게 맞는 게 없었다고 했다. 평소에 학교 다닐 때는 운동화를 신지만 주로 실내화를 신는다고 했다. 나는 조카가 편한 걸 좋아하나 보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도 동생이 신발을 골라 주면 조카는 눈으로 보고 싫다고 여러 번 그랬다. 어떤 신발은 제대로 신어보지도 않고 슬쩍 대고는 뺐다. 나는 조카 이마에 땅콩을 놓아주고 싶었다. 동생이 신데렐라 같고 조카가 새언니 같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조카는 발 볼이 넓어서 발에 맞는 신발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고 조카는 눈으로 보고도 제 발에 맞는지 알았다.
‘그랬었구나!’
동생 얘기를 더 듣고 조카를 보니 이해가 됐고 조카가 신발을 고를 때 힘들었을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동생은 다른 신발 가게에서 또 여러 번 구두를 골랐는데 다행히도 ‘겨울 왕국’의 엘사 구두를 우연히 골랐고 그 신발이 발에 딱 맞았다.
그때를 떠올려 보니, 누구나 원하는 게 있을 때 그것이 자신에게 맞아야 만족이나 기쁨이 오는데, 나도 남편과 아이들 기준보다 내 기준에 맞춰주길 바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가족에게 이런 일로 서운해하니 말이다. 그리고 나보다 가족을 맞춰주면 나에게도 가족 수만큼 기쁨이 올 것이고 남편과 아이들도 나를 생각해서 맞춰주기도 할 것이고. 이 생각이 마음에 스미는 순간, 나는 아이들과 함께 양말을 사러 가든지 아니면 물어보고 양말을 골라야겠다고 느꼈다.
“엄마, 자 새우깡!”
학원 다녀온 딸이 내 손에 과자를 쥐여줬다. 나는 양말 사건 때문에 겪었던 서운함이 사르르 다 녹는 것 같았다.
“엄마가 통장에 과잣값 넣어줄게.”
“됐어, 엄마 그냥 먹어. 내가 사주는 거야!”
나는 나보다 배포가 큰 딸의 마음을 한 아름 받았다. 봉지를 열어서 딸에게 한 움큼 과자를 주고 감사한 마음으로 탈탈 사랑의 과자를 입에도 가슴에도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