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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금나비 Jul 09. 2024

내가 용서받을 수 있겠니?

엄마와의 화해

나는 엄마를 용서하기 위해 기도를 많이 들인 것 같다. 어린 시절에 엄마는 동화 속에 나오는 마귀할멈이었다. 늘 "하지 마라. 안돼!"가 내가 들을 수 있는 엄마 목소리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엄마 때문에 뭔가를 더 도전하지 않고 쉽게 포기해 버리는 삶을 살았다고 느꼈다. 나는 엄마를 원망하고 있었다. 엄마가 아프시면서도 음식을 만들어주시고, 자신보다 가족을 위해 양보한 세월의 흔적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원래 엄마가 해야 하는 일이고, 엄마의 일을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 함께하고 있어서 고마운 줄 잘 몰랐다. 엄마가 집안일을 하고 나서 아파하면 왜 하고서 후회하는지 엄마가 고집이 세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 대한 사랑을 못 느꼈다.


어느 겨울 방학 때 멕시코에 사는 동생이 친정에 와서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동생이 딸과 재밌게 이야기하며 놀고 있었는데, 엄마가 그 모습을 보고 얘기하신 걸 동생이 말해줬다.

 "넌 딸이 그렇게 예쁘니?"

엄마가 이 얘길 하셨다고 했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엄마는 자식과 행복했던 추억을 갖지 못한 사람이구나! 그걸 느끼는 순간 엄마가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 엄마는 자식의 사랑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고 엄마도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걸 느꼈다.


언니와는 연년생이었는데, 언니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더 많다. 엄마가 나에게는 하지 못한 말을 비밀로 간직하고 있는 것도 있다. 나는 언니와 비교가 됐는데, 언니는 스스로 알아서 잘했고 칭찬을 받고 자란 반면, 나는 꾸중을 많이 듣고 자랐다. 언니와 나도 40대가 넘어서 서로 어린 시절을 예전보다는 가볍게 얘기하다가 엄마 얘기가 나왔다.

"너는 엄마 말 잘 안 들어서 혼이 났잖아! 나는 너 보고 부모님한테 잘했어! 너 혼나는 거 보고."

언니가 속 얘기를 꺼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랬구나!'

나는 어릴 때 부모가 한 말씀이 옳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 아이였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지방에 살았는데, 형편이 어려운 줄 몰랐다. 아빠의 직장이 서울로 옮겨지면서 가정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서울 올라와서 살 게 된 집이 반지하도 아닌 지하였다. 아빠가 보증을 잘 못서서 지하방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연탄불로 죽을 고비도 겪었다. 하나밖에 없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환했던 밖과는 다른 어두운 세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 여러 가구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6곳은 넘게 이사를 다녀서 전학을 많이 다녔다. 어느 곳에 살았는지 잘 기억도 안 날 정도이다. 나는 학교에 적응을 잘 못했다. 이사를 다니는 사이 엄마는 병에 걸렸고 넷째 동생도 하늘나라에 갔다.


초등학교에 가고 싶어 한 동생이었는데, 일곱 살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아픈 엄마 품에서 숨을 거두지 못하고.... 나는 어릴 때 동생이 그렇게 아픈 줄 몰랐다. 병원에만 있어서 막내만 부모님이 더 챙겨주시는 줄만 알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엄마의 일기장을 보고 동생의 고통을 알았다. 너무 미안했다. 나는 동생을 생각하며 동생은 짧은 삶을 살며 고통을 받았지만, 나는 좀 더 긴 삶을 살며 고통을 받고, 그걸 극복하며 산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동생한테 덜 미안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삶의 길이는 다르지만 받는 고통의 무게는 같지 않을까? 동생이 하늘나라에 가고 네 자매에서 세 자매가 되었다.   

 

 나는 부모님의 삶을 이해 못 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 삶에서 같이 힘겹게 살았던 것 같다. 집이 아늑하지 못했고, 고향이 없는 유랑세월을 보낸 듯하다. 나는 어린 시절이 잘 기억이 안 난다. 어느 순간 기억에서 지워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기억이 별로 안 나는데, 언니는 많은 걸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단지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계시길 빌었다. 대화도 나눌 수 없고 같이 있어도 다른 곳에 사는 사람 같은 엄마지만 핏줄이 통해서 그럴까? 돌아가실까 봐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나는 엄마가 살아계셨던 2016년 여름에 친정에 갔다. 엄마를 용서하기로 먼저 마음을 먹고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마음에서 꼭 물어보라는 게 두 가지가 있었다. 나는 침대 옆에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어릴 때 이해가 안 됐던 게 있는데, 꼭 물어보고 싶었어?"

"뭔데?"

"서울 살 때, 잘 사는 큰 이모 딸 옷이라며 집에 가져왔잖아. 그 옷 중에 내가 제일 맘에 든 블라우스와 치마가 있었어. 나는 계속 그걸 입고 다녔고. 그런데 블라우스를 왜 내가 보는 앞에서 갈기갈기 찢은 거야? 새 옷을 사줄 것도 아니면서."

"너한테 너무 큰 옷이었어!"

"나는 그래도 예뻐서 꿰매서 입고 다녔다고..."

엄마는 답변을 못하고 침묵을 지키셨다. 나는 또 한 가지를 물었다.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어."

"그래."

지방에 살 때 엄마가 아파트에서 매점을 했잖아. 내가 그곳에서 빵을 하나 골라 먹으려고 하는데 왜 었어?"

"공적인 거니까."

"내가 얼마나 먹고 싶었는 줄 알아?"

엄마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공적인 건 사적으로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자식이 먹고 싶은 빵을 뺏은 거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 그게 가슴에 남아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그토록 가슴에 평생 묻어둔 상처가 내가 큰 옷을 입은 게 못 마땅한 거였고, 공적으로 파는 빵을 막 집어 먹는 게 엄마 생각에선 안 되는 거였다.  

"엄마가 사서 주면 되는 거였잖아!"

엄마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용서받을 수 있겠니? 내가 지혜롭지 못했다!

용서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용서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엄마의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모든 게 용서가 됐다. 어린 시절의 내가 엄마를 받아주는 것이었다. 용서를 해드리려고 간 것인데 나는 엄마에게 사랑을 느꼈다.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모습 같았다. 엄마가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식을 받아주고 사랑하는 모습이었다. 엄마와 나는 마음으로 하나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


엄마가 어린 자식의 마음을 몰라서 그랬지, 알았으면 자식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을 거다.

엄마와 나의 화해가 과거의 아픔을 씻어내 사랑으로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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