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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란 내 안의 폭력

새 순을 기다리며

by 사과꽃


10여 년은 훨씬 더 자란 나무다. 조그마한 가지를 사서 큰 화분에 옮겨 키웠으니 어쩌면 20여 년이 다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 키다리 식물은 이사를 올 때도 그 키로 왔는데 어떤 마음에선지 키를 3분 1 정도로 낮추고 말았다. 가지가 굵어 가위로도 자를 수 없고 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나무에 대고 이르고 달래기도 하며 고민했다.


한 때 푸르를 때는 거실 천장을 뚫을 기세라 매년 가지를 쳐내기도 했다. 두 갈래로 올라간 나무의 이름은 산소를 발생한다는 깔끔이 실내 정원수 '파키라'다. 7월 이삿짐을 옮겨주던 분의 이야기가 영향을 줬다. 그 나무는 키를 키우면 안 되고 가지를 쳐서 옆으로 퍼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키를 낮추는 데 두어 달이 더 소요된 셈이다.


두 갈래 중에 아래쪽 가지에 새 순이 나풀나풀 자라고 있었기에 위로 자란 키다리 나뭇가지는 맹숭맹숭 한 면도 있었다. 지금 잘라주면 새 순이 잘 돋을 철이라 하여 드디어 어느 날 '다시 새 눈 내고 옆으로 자라자'라는 읊조림으로 달려들었다. 두 손으로 나뭇가지를 분질렀다. 그래놓고도 사실 놀랍고 미안했다. 분지른 가지의 윗부분은 가위로 잘라 물에 꽂았는데 아직도 생생하다.


문제는 그 분지른 곳에서 새 순이 나오게 하려고 비닐로 동여맨 일이다. 쉬 보던 영상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그러면 새순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주말에 묶어 둔 비닐을 풀어봤더니 세상에! 가지 끝이 말라서 흉한 모습이었다. 묶지 말고 자연 그대로 두었더라면 잘린 부분에서 양쪽으로 싹 눈이 더 빨리 나왔을지도 모른다.


오래 되새기며 더 잘 키워보려고 가지를 쳐준 것인데 되려 말라죽고 있으니 얼마나 큰 실수인가. 풀도 미물도 해하지 않았는데 엄청나게 큰 상처를 냈다. 욕심이 과했고 방법도 틀렸고, 새 눈이 더 잘 나올 철이라는 섣부른 믿음도 잘못됐다. 말 못 하는 식물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지 분질러진 데를 보면 섬찟해진다.


그런 괴상한 폭력이 나올 줄이야. 그래놓고 비닐로 동여매면 새 눈이 나올 거라 믿었으니 얼마나 무지한가 말이다. 오랜 기간 옆에서 푸른 이파리를 싱그럽게 흔들어 주던 식물을 그렇게나 상처 줬으니 나에게 무슨 좋은 일이 생기겠나. 무지막지한 행동이었다.


분무기를 들고 마른 가지에 물을 뿌리며 속으로 사과했다. 다시 싹 눈이 나오기를 기도한다. 옆가지에 나풀거리는 잎사귀가 잘 자라고 있지만 이쪽 가지에도 새 닢이 피어나기를. 이제 그런 무모한 일은 하지 말고 자라는 대로 키울테다. 날 밝으면 거름흙이라도 보충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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