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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진 팔꿈치

소소한 짜증을 모아 씁니다

by 이육공

팔꿈치가 까졌습니다. 어디서 까진 건지도 모르겠어요. 동그랗게 꽤나 두껍게도 까졌어요. 인식했을 당시엔 아픈 줄도 몰랐는데, 막상 일상생활을 하니까 너무도 불편해요. 책상에 팔을 올리는 횟수가 이렇게나 많았었나 싶더라고요. 턱을 괴고, 문서를 작성하고, 글씨를 쓸 때마다 까진 곳은 쓸리고 쓸리고 또 쓸리고. 아릿한 통증이 점점 심해져요. 그래봤자 엄지손톱만큼의 상처인데 왜 이리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까요. 한 삼일인가 반창고를 붙여서 겨우 딱지가 앉았어요. 웬만한 통증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편인데, 이 작은 상처 하나에 반창고라는 사치까지 부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요즘은 이를 너무 꽉 깨물고 자요. 안 좋은 버릇이라는데 스트레스 때문인지 고치기가 쉽지 않네요. 깨어있는 지금도 턱이 아파요. 왜 이리 소소하게 아픈 곳이 많은 거죠? 차라리 티 나게 아프면 걱정이라도 받을 텐데요. 생색내기도 뭐 한 그런 자잘한 고통들이 일상의 거스러미가 되어 서서히 저를 죽여갑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짜증의 더미에서 저는 서서히 질식하고 있어요.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조차 거슬려 잠에 들기 어려운 밤이에요.


장마철이 그렇잖아요. 비를 특별히 싫어하는 건 아닌데, 아가미 없이 높은 습도 속에 던져져 숨이 턱턱 막히는 거죠. 크게 이렇다 할 사건 사고는 없어요. 눅눅한 환경에서 자잘한 짜증의 상처들이 곪는 것뿐. 비 오는 날 대중교통 타보셨어요? 으, 말 안 해도 알죠? 그 꿉꿉한 냄새. 지금은 뽀송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긴 해요.


그러고 보니 어제 그런 말을 들었는데, “유경씨는 본인이 사랑받는 사람이길 바라나요?”라는 말이요. “아뇨. 그건 아니에요.”라고 즉답했어요. 곰곰이 생각하니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듭니다. 자존심 때문에 곧장 아니라고 답해놓고, 사실 한 켠으로 스스로에게 의문을 갖고 있다니, 저도 참 멀었어요. 맞아요. 저는 세상이 제게 다정했으면 좋겠어요. 고작 까진 팔꿈치에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독여주길 바라요. 머리가 아픈 날이면 폭신한 이불에 저를 돌돌 말아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재밌는 영화를 틀어주고 맛있는 디저트를 나누어주었으면 해요. 한 없이 어린 아이가 되어 오래도록 응석을 부려도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날 품어주면 좋겠어요.


마냥 응석만 부리기엔 이미 충분히 나이 들었음을 압니다. 비록 평생 제대로 응석 부린 적이 없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매일같이 모순 속에 살아가요. 내가 누군가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 타인에게 뱉는 위로와 공감이 사실 나를 향하는 모순들, 누군가 내게 해줬으면 좋겠는 것들을 세상에 베풀지만 정작 나 자신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는 날들.


고생했어, 잘 견뎠어, 괜찮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좀 쉬어도 좋아, 그런다고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을 거야, 가치 있는 삶을 살지 않아도 돼, 온전히 너를 품을게, 변치 않고 곁에 있을게.


당신에게 말하는 듯하지만 결국엔 내가 듣고 싶은 말입니다. 타인의 입을 통해 듣기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그런 언어예요. 정말 별 거 없는 말인데 무척이나 듣기 어렵더군요. 상담받을 때나 들을 수 있는 그런 말이지만 언젠가는 내가 나에게 건네는 위안이었으면 합니다. 누구보다 나를 다독여야 할 존재가 자기 자신이잖아요. 나의 말이 저 깊은 나에게 울림을 주길, 나의 언어를 스스로도 믿을 수 있길, 그리하여 내가 나를 사랑하길 오늘도 소망해요.


당신은 어떤 말이 필요한가요? 당신이 타인에게 가장 많이 건네는 말은 무엇이죠? 스스로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제가 대신 해드릴게요. 미성숙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말을 주고받아요. 그렇게 교환된 언어가 점점 힘을 가질 때, 그때 우린 혼잣말로도 매일의 삶을 위로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의 말들이 의미를 가득 담아 세상이 다정으로 가득 찬다면 그땐 아무 말 없이도 온기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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