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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번아웃인 저는 모카번인가요

노릇하게 구워주세요

by 이육공

개학하고 한 달이 전부 지나가지도 않은 이 시점에, 몸적으로나 마음적으로나 너덜너덜해져 3년 쓴 행주마냥 살고 있다. 표정을 지을 기력조차 남지 않아 병원에서 약을 추가해 먹었더니, 이제는 마약을 주입당한 좀비가 된 기분이다. 심즈라는 게임을 해 본 사람이면 알 텐데,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는 일종의 신적인 존재로, 치트키를 함께 사용한다면 캐릭터들의 기분까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캐릭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우울하든지 분노하든지 무기력하든지, 그냥 플레이어의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기쁨' 상태로 전환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그렇다. 어쨌든 약을 추가한 한 주 동안 '왜 이렇게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에요'라는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만족한다. 병원은 사회적 명망까지 지켜주는 존재이다.


번아웃을 겪을 때마다 나의 바닥을 새롭게 마주한다. 내가 여기까지 바닥을 보이는 인간이구나, 하면서 다음을 대비해도 결국 다음번엔 더 한 바닥이 기다리고 있다. 체감 상 365일 중 365일을 번아웃으로 살아가는 기분인데, 이 정도면 인간 모카번이라고 해도 되겠다. 기왕 그럴 거라면 노릇하게 구워졌으면 하는데 모카번은 남이 구워주기라도 하지, 인간을 구제하는 건 언제나 스스로이기에 어렵다. 사실 금주를 꽤나 오래 하고 있는데 (그... 법으로는 당이 포함되더라도 일정 수준 이하면 '제로 칼로리, 당류 제로'를 표시할 수 있지 않나? 그런 의미로 나의 음주 빈도는 극히 떨어지기 때문에 금주라 할 수 있다.) 요즘은 술이 너무 마시고 싶다. 한 6년 전까지만 해도 술이 너무 좋아서 '기쁜 날에만 술 마시기'를 나만의 철칙으로 삼았었다. 힘든 날 술을 마시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술도 싫어질까 봐 그런 것이었는데, 이제는 술이 그렇게 좋지도 않고 마실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사는 게 지치니까 간사하게도 술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그러나 이미 육신은 낡아버린 허약 인간이여! 여기서 술을 마시면 돌이킬 수 없는 숙취와 컨디션 난조에 부딪히리라! 이를 아는 어린 중생은 술 대신 글을 선택했나니. 정말 글조차 쓰고 싶지 않은 나날이었는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 손이 터져서 줄줄 글자를 써 내려간다. 습이란 것이 이래서 무섭다. 그 어디도 아닌 빈 종이에 글자로만 하소연할 수 있는 소심한 나의 자아는, 다시 여백을 마주하니 하소연을 와라락 쏟아내는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술보다는 건전한 방법이다.


번아웃은 대체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걸까? 꽤나 구조주의를 신빙하는 나로서는 '체제 변혁이 일어나 노동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아 생존에 목매지 않아도 되고 높은 워라밸이 보편화되면 번아웃 청년들이 줄지 않을까'하지만 이건 너무도 요원하다. 결국 개인적 해결책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데, 그걸 알 면 내가 '세바시'라든가, '어쩌다 어른'이라든가 여하튼 명사가 되어 TV에서 강연을 하고 있겠지. 별 거 있나,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지금은 다만 몇 자 안 되는 글을 생산해 내는 게 한 걸음일 뿐이다.


제빵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보통 빵을 만들 때엔 반죽을 숙성하는 시간이 필요한 걸로 안다. 어쩌면 번아웃을 겪고 있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숙성될 시간일지도 모른다. 충분히 숙성될 시간조차 없는 세상이지만 바라건대 틈틈이 자신을 숙성시키고, 노릇하게 구워낼 수 있었으면 한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지친 좀비들이 맛있는 모카번으로 거듭나길 마음속으로나마 작게 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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