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세상을 향한 마음이야.
당신에게.
어제는 이유없는 우울이 찾아왔어. 입꼬리 하나 올리는 것도 지쳐서 온 몸이 바닥에 눌러 붙는 기분으로 퇴근했어. 고작 체력 좀 방전되고 열이 난다고 우울하다니 참 덧없는 육신이야. 이러면 이유가 있는 우울인가? 감기약과 해열제를 먹고 일어나니까 오늘 아침은 또 기분이 괜찮더라. 오전쯤엔 학생 하나가 직접 만든 빼빼로와 편지를 주고 갔는데, 눈 앞에 있는 뭐라도 하나 부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지 뭐야? 정말 우습다. 사람 기분이라는 게 이렇게나 하찮은 거라니.
가끔은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물론 죽겠다는 건 아냐. 그냥 갑자기 죽음이 찾아와도 괜찮겠다 싶은거지. 겪을 수 있는 삶의 희노애락은 다 겪어본 것같거든. 앞으로 내가 겪을 모든 기분과 감정들은 그동안 그려온 그래프의 파동을 넘어서지 않겠지, 다 거기서 거기인 정도겠지? 아득하게 반복할 기쁨과 슬픔과 불안과 행복 따위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질리지 뭐야. 나 너무 염세적인가? 그래도 이해해줘. 사실은 학생이 접어준 학 한 마리로 심장이 떨어질 것 같다며 온갖 주책을 떠는 그런 타입의 인간이거든. 원래 낭만주의자는 회의주의자인거야. 세상이 언제나 나의 낭만과 이상에 어울려주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회의를 품는거지. 같은 원리로 염세주의자들이 긍정적인 거고. 애초에 기대하는 게 없으니까 금방 털고 일어날 수 있거든.
항상 네 생각을 해. 정확히 말하면 내 생각이긴 하다. 나를 생각하다보면 너도 떠오르거든. 나에 대한 생각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궁금한 것, 궁금하지 않은 것, 주변적인 것, 살아간다는 것,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면 그 끝에 나는 우리를 떠올리고 있더라고. 어쨌든 세상에 나 혼자만 발 붙이고 있지는 않잖아? 결국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 네가 싫어하는 것, 네가 궁금해하는 것, 네가 궁금해하지 않는 것, 너의 주변, 너의 삶'에 골몰하곤 해.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 걸까? 우리는 어째서 희노애락이 주는 혼란 속에 있어야 하는 걸까?
미안, 거창하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온갖 것을 상상한다는 말일 뿐이야. 아무리 난해한 생각으로부터 시작하더라도, 끝맺는 생각은 늘 사소하더라고. 그냥 그런거 있잖아, 같이 웃었던 농담이나 함께 먹던 음식같은 시덥잖은 기억들. 그게 너무 따뜻해서 코 끝이 찡해와. 정말 별 거 아닌데. 그게 나를 만들어주었네. 너의 한 부분에도 내가 있겠지? 분명 그럴 거야. 내가 없더라도 괜찮아. 수많은 당신들이 채워져있을테니까.
있지, 나는 너무 나약하고 작은 존재야. 살아가는 데 힘이 부치고 그러다가도 금새 웃어버리는, 그러니까 늘 일희일비하는 그런 사람이야. 옛날엔 아주 아주 간곡하게 빌었어. 부디 내 마음에 떨어진 돌이 해일을 일으키지 않기를, 내가 아주 잔잔한 호수같은 사람이라 모든 것에 담대하기를. 하지만 뭐 어쩌겠어? 난 그런 인간이 못 되더라고. 이제는 다른 생각을 해. 내가 이렇게 살아있을 때 너도 그렇겠지? 수많은 네가 나와 같이 울고 웃고 화내고 사랑하고 그러면서 생을 영위하겠지? 결국 너는 나인거야. 그래서 나는 나와 너를 모두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어. 어떻게 이렇게 작고 나약한, 그러면서도 아등바등 살아있는 우리를 미워할 수 있겠어? 가끔이지만 그래, 너무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고일 때가 있어.
참 간만에 쓰는 편지야. 분명 어떤 마음을 담아주고 싶었는데, 그게 잘 되지가 않는다. 알잖아, 나 시작만 씩씩하고 자주 삼천포로 빠지는 거. 아무래도 지금 또 길을 잃은 것 같아. 이럴 땐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야지. 그래, 잘지내? 나는 오늘 초록색 상의에 까만 외투를 입었어. 엄청 할인을 하기에 샀는데 꽤 마음에 들어. 원래 쨍한 색과 검정은 잘 어울리는 법이잖아? 너는 어떻게 지냈어?
글쎄, 모르겠다. 네가 어떤 하루를 보냈을지, 어떤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감내하고 있는 걸지 나는 모르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너를 위해 요즘은 이전과 다른 소원을 빌어. 내가 너의 안온함이고, 네가 나의 안온함이 될 수 있길. 어쩌면 세상은 모두가 서로의 온기를 나누려 켜켜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곳일지도 몰라. 늘 그렇듯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다시 사랑해. 못 견디게 네가 미울 때도, 못 견디게 내가 외로울 때도 있지만 나와 같을 너를 생각하며 늘 사랑하려 노력해. 너를 사랑하는 일은 곧 나를 사랑하는 일이니까. 물론 내가 없었던 너와 내가 없을 너 또한 사랑해.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야.
계속 시간은 흘러가겠지. 반복되는 희노애락 속에서 너를 생각하며 앞으로 남은 시간을 견뎌볼게. 나 또한 너의 버팀목이 될 수 있을거야. 항상 빛나는 낮과 포근한 밤을 보냈으면 해. 이만 줄일게.
2022.11.11.
당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