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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너 봄꽃게가 맛있단다

사는 게 별 건가

by 이육공

단톡방에 사는 건 좀 어떻냐는 질문이 올라왔다. 어떻긴 죽지 못해 살지, 사는 재미가 없다 따위의 대답이 올라오자 주현이가 득달같이 나타나 "야 이 나약한 것들아, 5월이면 봄꽃게 철인데 뭔 소리야"라고 일갈한다. 그러더니 6월에는 앵두를, 한여름엔 망고빙수를 먹어야 하고, 8~10월엔 서해로 가을 대하를, 동해로는 도루묵과 전어를 먹으러 가야 한단다. 11~12월엔 방어를, 1~2월엔 킹크랩을 먹어야 하는데, 인생이 지루할 틈이 어딨냐 이 말이다. 정말로 낙樂은 없고 낙落만 있는 일상이었는데, 저 말을 듣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누구도 저런 실용적인 위로를 건네준 적이 없다. 나는 바로 산지직송 맛조개를 주문했다. 칫솔로 맛조개를 빡빡 문지르고, 커다란 찜기에 15분 동안 쪄서 오동통면을 곁들여 먹었다. 엄마가 갖다 준 잘 익은 김치가 제법 어우러진다. 동생과 주원이에게 2주 뒤 봄꽃게를 쪄먹자고 말해두었다. 된장을 살짝 푼 물에 꽃게를 쪄 먹으면 '이거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어릴 적부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된장 푼 물에 삶은 다슬기와 꽃게찜이었다. 당장 일주일 뒤에는 한 박스 가득 꽃게를 주문해야 하고, 달마다 기다려야 할 게 너무너무 많다.


하루를 살아갈 원동력이 고작 제철 음식이다. 그런 작은 것들에 설레서 뭐든 해낼 수 있다는 기분이 든다. 위로가 좀처럼 먹히지 않는 친구조차 연간 먹부림 계획을 보더니 최고의 위로라고 찬사했다. 두 달간의 번아웃 동안 앞으로 일 년을 버틸 원동력이 오로지 책임감뿐이라 여겼다. 눈에 밟히는 수많은 것들이 책임감으로 묶여 절대 때려칠 수 없는 나날들, 아이들에 대한 책임, 학교에 대한 책임, 생계에 대한 책임, 고양이에 대한 책임, 그리고 그냥 형용할 수 없는 추상적인 책임감들.

이제 나를 위해 돈을 벌 이유가 생겼다. '기왕 맛있는 제철음식을 먹을 거면 동생이랑 먹어야지, 그러는 김에 겹치는 친구들을 초대할까?' 하는 생각은 사은품으로 달려온다. 행복한 바쁨이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다. 꽃게도 주문해야 하고, 7월엔 주원이가 신라호텔에서 망고빙수를 사주기로 했고, 하나로마트에서 앵두도 사야 한다. 8월까지는 도다리랑 오징어 회가 제철이었지 아마? 보리숭어랑 전갱이도 맛있다고 들었다. 당장 세 달 동안에도 먹부림 스케줄러가 가득 차 있으니 세상에 나는 야근도 두렵지 않다.(이건 뻥이다.)


새삼 별 거 아닌 일들로 우울해지는 날들이 있나 하면, 너무나 사소한 것들로 신이 나는 게 평범함인가 보다. 다들 그렇게 충분히 평범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걸까? 제철음식을 같이 먹고 싶은 사람들이 금방 금방 머리에 떠오르고, 내가 음식 손질을 하면 다른 이가 설거지를 하는 삶이 썩 마음에 든다. 친구의 애정 담긴 일갈로 금방 떨쳐낸 무력함이 또 언제 찾아올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때가 오면 다시 제철 음식을 검색하려 한다. 그것도 안 된다면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이가 나 대신 제철음식을 찾아, 나를 끌고 떠먹여 주길 기원해 본다. 나도 기꺼이 누군가한테 그렇게 해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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