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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추구미는?

by 레마누

초등학교 6학년 때 호되게 사춘기를 앓았다. 호르몬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혼자만의 동굴 속에 갇혀 살았다. 장래희망난에 "노벨문학상"이라 적어놓고, 다 이룬 것처럼 흐뭇해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며, 소설을 썼다.


불은 생각을 불러왔다.

샛별들을 보며 세상을 만들었다.

하늘과 별은 나만의 원고지였다.


시련이 찾아왔다. 아무리 글을 써도 글이 글 같지 않은 것이다.

소설가가 되어야 하는데, 노벨문학상을 타야 하는데, 책만 읽으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고심 끝에 목표를 수정했다. 출판사사장과 결혼하기로. 멋진 소설을 쓰는 것보다 어떤 글을 써도 출판해 줄 사람을 만나는 게 더 쉬워 보였다.


온라인에서 함께 소설공부를 하는 작가님과 얘기하던 도중 그때 생각이 나서 들려줬는데, 뜻밖의 반응이 나왔다.


-그 얘기 재미있는데요?

-뭐가 재밌어요? 어디가?

-웃기잖아요. 어린애의 생각이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요. 작가님은 자가출판을 해서 북토크까지 열지만, 저는 글을 쓰기만 했지 그런 생각은 못 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

-에이, 그냥 하면 되죠.

-저 그런 거 못해요?

-그럼, 지금이라도 출판사 사장 만나요.

-남편은요?

-아....

-어쨌든 만나서 반가워요. 작가님.


분위기 있는 북카페에서


멀리서 글벗이 찾아왔다. 바다 건너온 그가 반가워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실실 웃음이 나오고, 말이 빨라졌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세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공항까지 가야 한다. 말이 쏟아졌다.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소설과 문학,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뭐야, 작가님 왜 그렇게 멋져요. 너무 멋있잖아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제가 멋있게 살기로 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코로나를 겪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뭔가 이렇게 살다 가기는 싫어서. 그때부터 멋진 내가 되자 다짐하고 새벽독서를 시작했죠. 제가 좋아하고, 하고 싶었던 게 뭔지 적어봤어요. 그리고 그걸 하나씩 하는 거예요. 각자 멋지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건 모습을 생각하고 만들어보는 거예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멋진 일은 뭐예요?


-멋진 일이요? 글쎄요.

-잘 생각해 봐요. 막연하게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되고 싶은 거 말이에요.

-저는 순례길은 꼭 걸은 거예요. 딸이란 같이.. 음.. 그리고, 베토벤이랑 헤르만 헤세 생가를 꼭 방문하고 싶어요. 이건 버킷리스트에 있는 건데. 음.. 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신년음악회에 개량한복으로 만든 예쁜 드레스 입고 갈 거예요. 제가 한복이 잘 어울리거든요.

-좋네요.


-그리고, 음... 번지점프를 하고 싶어요. "번지점프를 하다"영화 봤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거든요.

-저도 좋아해요.

-근데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케이블카도 못 타요. 아이들 때문에 탔다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갔어요

-그래도 하고 싶어요?

-녜. 하고 싶어요.

-그럼 하세요.


그가 하는 말은 짧고 명쾌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아무 말이나 나왔다.

튀어나온 말들이 귀에 닿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정말?


그가 숙제를 주고 갔다. 나는 그것을 추구미라고 이름 붙였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봤던 대로 나의 추구미를 생각했다. 나는 어떤 것을 멋지게 생각하는가. 10년 후, 5년 후, 1년 후, 올해의 겨울, 그리고 내일의 내가 그려졌다. 뭘 해야 멋질지 그림이 그려졌다. 생각만으로도 이리 좋은데, 하고 나면 얼마나 더 좋을까?


머릿속에 뜬구름만 가득했던 나

잡히지 않는 것들을 잡으려고 애썼던 나

허상, 망상, 공상 속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날고뛰고 걷는 것을 잃어버린 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하기 시작한 너

하는 도중에 만나는 어려움을 당연한 게 받아들인 너

고되고 힘들어도 좋아서 죽겠다는 너

자신이 하는 일에 목적이 있고, 따라서할 때는 확실하게 하는 너


처음 만났지만, 멋있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정말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멋진 사람이 자꾸 나보고 멋지다고 한다. 뭐지? 나는 하나도 안 멋진데, 예의상 하는 말일까? 하면서도 듣기가 좋았다.


그녀를 공항에 내려주고 돌아오는데 욕심이 생겼다.

나도 내가 생각하는 멋진 일을 하고 싶다.

진짜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


그런데 잠깐만.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은

책 읽고 글 쓰는 건데 그건 지금도 충분히 하고 있잖아.

그럼 나도 멋진 거네. 작가님은 그걸 말하고 있었구나.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오래전 남편과 시어머니와 함께 태국여행을 갔다 온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은 다 잊었는데, 공연장에서의 한 장면은 깊게 박혀 잊히지 않는다. 공연이 끝나갈 무렵, 배우와 관객이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관객 중에 무대에 올라올 사람을 찾는데, 사람들이 모두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손을 들었고, 관객들은 크게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미국에서 여행 왔다는 그 할머니는 70대라는 말이 무색하게 젊은 감각을 보여줬다. 짧게 자른 머리와 깊이 파인 티셔츠에 카디건, 무릎까지 내려온 H라인 스커트는 그녀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시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였지만, 옷 입는 것과 머리모양 때문인지 훨씬 젊어 보였다. 무엇보다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때 결심했다. 저 할머니처럼 나이 들어야지. 그때부터 내 추구미는 미국할머니가 됐다.

나이가 들어도 눈동자가 반짝이는 사람,

호기심이 많고, 도전을 즐기며, 임기응변이 뛰어난 사람,

여행할 때는 여행을 즐기고, 돌아와서는 현실에 충실하는 사람,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을 줄 알고, 유쾌하면서도 무례하지 않은 사람.

작가님을 만나 멋지다는 단어를 갖고 말을 하던 중에 미국할머니가 떠올랐다. 잊고 살았는데, 나에게도 추구미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내 꿈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세련되고 우아하고 유쾌한 사람이 되었다. 혼자 히죽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일을 하나둘씩 마무리지으며 나도 제법 멋진데.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나니 하루가 지나갔다.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정신을 쏟아부으면 얻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바라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어김없이 그것을 얻게 된다. 당신의 생각습관은 당신의 마음이 생각하는 것을 먹고 자란다. -두려움을 이기는 습관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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