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눈이 왁왁허다.
뭐샌 고람시니.
외할머니는 집에 있을 때면 늘 텔레비젼을 켜 놓는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는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 텔레비젼을 켤 때 나온 채널 그것만 본다.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건 막장드라마다. 할머니는 시집살이하는 며느리와 당찬 여자가 나오는 드라마를 특히 좋아한다. 국민학교에 들어가자마자 4.3사건이 일어나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할머니는 한 달동안 다녔던 국민학교얘기를 잊지 못한다. 일년만 더 다녔으면, 글이라도 떼었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거라고 푸념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외숙모가 할머니에게 글을 가르쳐준다며 노트와 연필을 사다줬다고 한다. 이모는 할머니가 다닐만한 노인학교를 알아보고, 다 늙어서 뭘 한다고 하냐는 할머니를 설득해서 데려갔다. 할머니의 집에는 한글교본책과 깨끗한 노트와 연필이 있었다. 오랜 만에 놀라갔더니 할머니가 서랍에서 꺼내 보여줬다.
이거 너 가져가라
왜? 할머니 공부하는 거 아니예요?
공부는 무신 공부게. 다 늙어그네 배웡 뭐 할거니.
글 알면 다른 방송도 막 돌려보고 그러지. 버스탈때도 편하고
에에. 나 원. 경안해도 머리아픈디
할머니, 글 배워서 하고 싶은 말 다 써요.
말다게. 써그네 뭐할거고.
글로 쓰면 좋지. 쓰고 나면 속도 시원하고.
뭐랜 고람시니. 이정도민 됐주. 뭘 더 바래그네. 초마가라. 좋다 싫다 다 따져가멍 살아지느냐. 그냥 사는거주
그럼, 내가 할머니 얘기 글로 써 줄까? 드라마로 만들면 진짜 재미있을텐데
경은 허주게. 아고. 나 살아온 거 말하민 말도 못헌다.
할머니는 드라마를 보며 훈수두는 것을 좋아한다. 못된 시어머니에게는 그렇게 살면 벌 받는다고 하고, 고생하는 주인공에게는 그래도 좀 참아서 살아보라고 말한다. '점점'과 '쯧쯧'을 적절히 사용해가며, 할머니는 드라마에 빠져 들어간다.
할머니는 또 뉴스를 좋아한다. 채널을 돌리지 않는 할머니에게 뉴스는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시작되는 또 하나의 드라마인 셈이다. 다리가 불편한 후부터 경로당에 가는 것도 힘이 부친 할머니는 뉴스를 보며 세상돌아가는 것을 파악한다. 할머니가 제일 궁금해하는 건,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왜 저렇게 싸우고 있느냐는 것이다. 배울만큼 배웠으니 테레비에도 나오는 건데 저 정도면 꽤 좋은 건데도 인상만 쓰는 거 보면 많이 배운 사람도 별볼일 없다고 한다.
말이 좋은 사람은 정작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고
그럴 듯하게 보이는 글은 핵심이 없어서 읽을수록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진심으로 하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지만
목적을 갖고 다가오는 말은 비릿한 웃음을 동반한다.
내가 쓰는 글은 어떤가?
어제 글을 쓰다 말고, 키보드를 밀어버렸다.
원고지에 쓰고 있었다면, 종이를 박박 찢어서 잔뜩 구기고 던져버렸을 것이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숨긴 채 글을 꾸미는 데 공을 들인다.
할머니는 텔레비젼에 몰입해서 보다가 종종
귀눈이 왁왁하다. 라는 말을 했다.
처음에는 눈과 귀가 답답하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그런데 자꾸 듣다보니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그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터무니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사건사고가 할머니의 상식선을 벗어났을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때
할머니는 귀눈이 왁왁하다고 했다.
왁왁을 시끄럽다. 정신없다. 혼란스럽다는 말로 풀어보면
~~때문에 귀와 눈이 어지럽다.
보고 싶지 않지만 봐야 하고, 듣고 싶지 않지만 들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가 될 것이다.
내가 아무리 풀어내려고 해도 풀어내지 못하는 순간을
할머니는 단, 7글자로 끝냈다.
글을 모르면 어떤가.
자신이 뭘 말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
말을 잘 못하면 어떤가.
하고 싶은 말을 딱 맞게 하는데
할머니는 어떻게 그런 말을 사용하는 걸까?
글을 모르니 책을 읽을 수 없고
따라서 책에서 배우는 것도 없었을텐데
오로지 몸으로 겪은 것만으로 할머니는 세상을 알았다.
할머니의 말이 짧고도 강렬한 것은 오로지 핵심을 담았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글이 길다. 할 말이 많은 줄 알았는데, 실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몰라서 아무 말이나 늘어놓는다. 다 끌어모으다 보면 뭐라도 하나 건지겠지하며 쓰는 글은 술술 읽히며, 제법 잘 쓴 것처럼 보여도 허상이다. 글이 붕 떠있는 것 같다.
추석에 외할머니 만나서 촌철살인의 말을 듣고 와야겠다.
할머니,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요? 물어봐야지.
우리 할머니는 그럼 허허 웃으며 밸소릴 다 한다고 하겠지.
근데요. 할머니,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글을 쓰면 쓸수록 귀눈이 왁왁해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글은 긍정적으로 끝나는 게 좋다는데,
이렇게 축축 처지는 글도 글이라고 올린다.
왜냐하면 이건 정말이지 솔직한 내 심정이기 때문이다.
부사를 이리 많이 쓰는 거 보니, 정말 할 말이 없는가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