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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처한 이방인

동네 친구들

by 레마누

제주도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일주도로에 버스가 30분에 한 번씩 지나는 동네, 직행버스는 세우지 않고 지나가는 작은 마을에서 컸다. 5시가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일요일 아침이면 동네 사람들이 나와 길거리청소를 하던 때였다.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생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장황한 교장선생님 말씀을 듣고, 담임선생님은 무서웠으며, 학교는 너무 춥거나 너무 더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좋았다. 제일 먼저 교실에 들어가 자리를 잡은 후, 교실 뒤에 있는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는 시간이 좋았다. 친구들이 오기 전에 빨리 책을 읽어야 했다. 우리 반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언제나 나 혼자였다.친구들은 책벌레니, 별종이니 하며 놀려대곤 했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는 운동장에서 놀았다. 교실에 남아 책을 읽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안 그래도 나를 어려워하는 친구들이 더 싫어할 것이 뻔했다.


수업시간에 책을 읽거나 방송할 일이 있으면 선생님은 늘 내 이름을 불렀다. 대회에 나가는 것도,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교실에 남아 연습하는 것도 나 혼자였다. 평소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남자아이는 나만 보면 '문학소녀'라고 불렀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빨개졌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시골 중학교는 정글이자 전쟁터였다. 어렸을 때부터 밭일과 집안 일로 잔뼈가 굵은 학생들의 말은 험하고 인상은 거칠었다. 나를 잘 알고 있는 동네 친구들은 원래 그러려니 했지만, 다른 동네친구들은 나를 별종 취급했다. 내가 지나가면 수군거렸다.


고등학교가 갈라지면서, 같이 어울리고 싶지 않았던 하지만 의식하며 살았던 동창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래서 좋았을까? 모르겠다. 스무 살 때 시골집을 떠나면서 그들을 잊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인연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먹고살만해질 때쯤 낯선 번호가 찍힌 전화를 받았다. 중학교 동창이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하지만 동네 친구의 친구라 근황은 알고 있는 아이였다. 만난 적도 통화를 해 본 적도 없어서 당황하는 나와는 달리 친구는 거침이 없었다. 중학교 동창들끼리 골프모임을 만들었으니 가입하고 골프 치러 나오라고 했다. 잘 지내냐는 흔한 인사말도 없이 다짜고짜 용건부터 말하는 것이 중학생 때랑 똑같았다.


중학교 동창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한 마음과 이제와 연락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마음이 싸우며 대답을 망설이는데, 친구는 나오는 걸로 알겠다며 밴드초대장을 보냈고, 나는 얼떨결에 가입했으며. 매일 전화 오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골프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게 4년 전의 일이다.


이미 친한 아이들 틈에 낀다는 것은 중학생 때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다. 남편의 눈치가 보여서 뒤풀이에는 참석하지 않고, 공만 치고 오길 반복했다. 친구들은 늘 섭섭하다고 했고, 인사만 하고 돌아오는 내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 어쩌면 나도 그들과 깔깔대며 웃고 싶었는지도 모른단. 어쩌면 나도 그들과 어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KakaoTalk_20251027_094601427.jpg 날고 싶은, 그러나 날 수 없는


어제 골프모임이 끝나고, 저녁까지 먹고 간다고 하자 친구들은 반색하며 반겼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소설책이 나온다는 말을 했다. 친구들은 제 일처럼 기뻐했다. 대단하다며 추켜줬다. 책이 나오면 꼭 밴드에 올리라고, 그러면 친구들이 총동원해서 사겠다고 하는 말에 감동했다.


그러고 보니 촌에 사는 친구들은 늘 그렇게 격하게 반응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줬고, 뭘 하고 싶다고 하면 흔쾌히 따라줬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걸 나는 거부의 몸짓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했다. 다가오려는 것을 막고, 철벽을 치고,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연락하고, 반기고, 응원하고, 기뻐해줬다.


유독 까칠했던 남자아이가 있었다.

-책 냈다고?

-응.

-무슨 책?

-소설. 네가 맨날 '문학소녀'라고 놀렸잖아

-놀린 거 아니여. 좋으니까 그랬지.

-그런 거야?

-어게. 축하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그 친구가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친구가 하는 말이 늘 불편했다. 말을 걸어도 잘 대답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은 감동이었다. 굳었던 마음이 풀렸다. 괜히 기분이 좋아 실실 웃음이 났다. 책이 나오기도 전에 사인을 해 달라고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더 잘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생각해 보면, 친구들은 언제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내 안에 들어오려고 헸지만, 밀어내고, 거절했던 것은 나였다. 하지만,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이 틀렸다고 단정했다. 나만의 세계에 갇혀 살았다. 그들을 밀어낸 것도 나, 혼자만의 세상에서 외로움을 택한 것도 나였다.


21212.png 당신의 안녕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시골마을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때 그 시절이 나를 키웠다는 것을 소설을 쓰며 알았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어렸을 때 살았던 그 세상이었고, 나는 여전히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내가 싫어서 외면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친구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문제였다. 친구들은 고향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데, 나만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이 싫어서 관심 없는 척했다. 궁금하지만, 궁금하지 않은 척했다. 친구들이 '당신의 안녕'을 읽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들의 이야기를 대변해서 계속 글을 쓸 예정이다. 한 명씩만 소재로 삼아도 30권은 너끈히 나온다. 다행이다. 그리고 감사한 일이다. 책이 나오면 제일 먼저 살 거라고 말해준 친구에게 빨리 책을 보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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