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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결승선 앞에서 속도를 줄이는가?

by 레마누

나는 왜 결승선 앞에서 속도를 줄이는가?


거의 다 왔다는 안도감이

이 정도면 됐다는 착각이

이제는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겠지 하는 자만이

끝까지 속도를 내서

아니 젖 먹던 힘을 다해서

결승선을 통과하지 못하고

늘 앞에서 멈칫거린다.

그러는 사이 후발 주자들이 나를 앞서간다

눈에 보이는 건 그들의 뒷모습뿐이다

안도감이 들어온다

이상한 일이다. 나를 앞서가는 사람이 있음에 마음이 놓인다.

굳이 내가 먼저 가지 않아도 되고

따라가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이 들어온다

결승선을 통과하면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세계를 넘어서고 싶다는 욕망과

이대로 머물러도 나쁠 것 없다는 안일함이 치열하게 싸운다

딱 한 발짝 내밀면 되는 것을

마지막 힘을 짜내면 끝나는 것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타이밍을 놓친다

아쉽다며 돌아서는데 마음이 놓인다.

이제 더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사실 그리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어

이거 안 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며 스스로를 토닥인다.

해야 할 때 하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될 때는 하고 싶어 안달이다.

매번 그랬다. 항상 올라가 가 멈췄다. 결승선을 끊지 못했다.

늘 아쉬웠고, 그래서 다시 도전하지만, 사실 끝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 이번에는 다른 결과가 생길까 요행을 바라며 기웃거린다.


istockphoto-1300123069-1024x1024.jpg 출처 : 픽사베이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초반부는 자신을 도와준 데미안을 피하는 주인공 싱클레어의 얘기가 나온다. 편안한고 안정된 가정에서 걱정 없이 살던 싱클레어는 동네 불량학생에게 약점이 잡히고 괴로워한다. 싱클레어 혼자만 아는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 데미안이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 준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데미안을 피했다.


싱클레어는 두려웠다. 데미안에게 끌리는 자신이. 데미안처럼 될까 봐. 사랑과 평화로 가득한 집을 떠나 불안과 혼돈의 세계로 들어갈까 두려웠다.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데미안은 자꾸 '자신 안의 알을 깨고 나오라'라고 말했다. 싱클레어는 알을 깨는 것이 두려웠다. 홀로 맞설 세상에 낯설고 무서웠다. 하지만, 결국 세상에 나가기 위해 알은 깨져야 하고, 혼돈의 시간을 지나 진리와 직면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오랜 방황 끝에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나는 데미안이 되고 싶은 싱클레어였다. 꿈과 이상은 하늘을 나는데, 눈은 늘 땅을 향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았다. 아둔하고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그래서 늘 마음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싱클레어는 오랜 방황과 고민 끝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나 또한 그럴 것이다. 깨뜨리고, 깨지고, 깨우쳐서 깨어난다. 혼돈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울타리와 안전망이 있는 곳에서 살다 밖에 나오면 춥고 배고프고 힘든 게 당연하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는데, 홀로 나만의 들판에 들어갔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 향해 팔을 벌린다. 온몸으로 비를 맞고, 내리쬐는 태양을 견딘다. 뜨겁고, 차갑고, 시리고, 아픈 감각을 일깨운다. 나를 깨운다. 고된 시간을 견딘다. 엄한 채찍질을 피하지 않는다.


나는 해낼 것이다. 해내야 한다.

더 이상 결승선에서 속도를 줄이는 짓은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임과 동시에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것을 일부러 애쓰면서 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러운 것은 쉽고 편하다. 지금 어렵고 힘든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흘러가는 대로 하면 될 것을 하지 않아서 힘든 것이다. 여기서 답이 나온다. 달릴 때는 달리고 결승선이 있으면 끊고 나간다. 나에게 주어진 길을 피하지 않고 간다. 나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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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 그렇게 바라던 소설집이 조만간 손에 들어옵니다. 떨리고 두렵습니다. 실은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냥 살 걸. 괜한 일을 벌였나?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실망하면 어쩌지? 한 걸음에 생각 하나가 따라다니는 요즘입니다. 하지만, 저는 써야만 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담아 두었던 이야기들을 꺼내지 않으면 안에서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썼습니다. 쓰고 나니 발목에 매달려있던 돌덩이가 떨어져 나간 것 같습니다. 아직 시원하진 않습니다.


여전히 제게는 많은 돌덩이들이 있으니까요. 하나씩 하나씩 치워가다 보면 언젠가 가벼워지고 훨훨 날아오르겠지요. 그날이 온다는 것을 믿고 있기에 저는 오늘도 또 다른 소설을 생각합니다. 쓰고 보니 참 좋습니다. 또 쓰고 싶습니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이 아닙니다. 써야 할 이야기를 썼는데 소설가가 된 것입니다. 쓸 이야기가 있는 한 저는 오랫동안 소설을 쓸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참 좋습니다. 작가님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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