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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by 레마누

새벽에 일어나 고양이세수를 하고, 마스크팩을 들고 줌 앞에 앉았다. 어젯밤 자기 전에 떠오른 생각들을 서둘러 받아적었다. 브런치북을 만들었다. 그리고 발행을 누르자, '오늘은 연재일이 아닙니다' 어? 뭐지? 오늘 수요일 아니었나?


아뿔싸!!!

오늘은 화요일이었고, '변화의 기록'을 연재하는 날이었다. 자는 내내, 일어나서도 수요일 발행만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오늘이 수요일인 줄 알았다. 요즘 내 정신이 이 모양이다.


그런데 또 쓰고 보니 괜찮아졌다.

이미 내일 것은 써 놨으니 오늘것만 쓰면 되는 거잖아.

뭔가 하루를 번 것처럼 든든했다. 감정의 기복이 빠르고, 매사가 분명하지 못해서 늘상 겪는 일이라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다만, 오늘의 발행이 조금 늦어질 뿐이다.


istockphoto-2178726179-612x612.jpg 출처 : 픽사베이


출간을 하고, 5일이 지났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매일 새벽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백팔배를 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카카오톡 메인사진에 슬며시 책을 올려놓았다.

소설책 발간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와, 드디어 네가 해냈구나. 고생했다.

에? 네가 소설을 썼다고? 대단한데.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은 내가 소설을 썼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책만 읽더니 결국 썼구나. 하는 반응이다. 쓸 사람이 쓴 거라 감흥도 감동도 없다는 듯이 쿨하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나 역시 입바른 소리 못하는 그 친구들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고맙다는 짧은 말로 답했다.


반면, 지금은 친하게 지내지만,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소설은 놀라운 이슈였다. 아이들이나 집안 사정은 뻔히 알지만, 정작 나에게 관심이 없는 그들은 따라서 내가 글을 썼다는 게 신기하고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감탄하며 말한다. 대단하다고. 그러면 나는 손사래를 치며 받아친다. 아무것도 아니고, 누구나 하는 거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알아주기를 바랐다. 너희들이 보는 나는 애 셋을 키우는 전업주부지만, 비록 배추값이 오르락내리락 할 때마다 발을 동동 구르며 김장날짜를 계산하며 살고 있지만, 나에게도 '소설가'라는 꿈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묻지 않았고, 따라서 나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지 않았다.

다만, 평소보다 더 크게 웃었을 뿐이다.

누군가 물었다.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됐냐고.


소설을 쓴지는 오래됐다. 자칭타칭 문학소녀였기에 글을 쓰는 건 어렵거나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것을 끌고 나갈 끈기와 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소설가'는 그야말로 꿈이었다. 나는 소설을 쓰지 않으면서 '소설가'가 꿈인 사람이었다. 가끔 글을 쓰긴 했다. 기가막힌 이야깃거리를 떠올리고 혼자 좋아하다가 막상 쓰고 나면 별볼일없어 실망하길 반복했다.


그것은 끝이 없는 길이었다.

아무리 해도 표가 나지 않는 일이었고, 누구와도 같이 할 수 없는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단지 '소설가'라는 꿈 하나가 옆에 있었을 뿐이다.


꿈은 날 일으켜세우기도 했지만,

실망하고 돌아서기도 했다.

헤어진 후의 질척거리는 옛애인이었고,

수백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 하나 없는 첫사랑이었다.

매일 꿈을 꾸며 살았다.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꿈이 아니라면 꿈같은 일이 벌어지기만을 바라며 살았다.


어느 날, 바라기만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글로 먹고 살고 싶다고 마음먹었는데 글을 쓰지 않고, 북토크에 입고 나갈 옷을 고르고, 예쁜 옷을 입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건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본질보다는 현상에 행위보다는 이상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살고 있었다.


누군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소설을 썼냐고.

나는 대답한다. 종일 소설만 생각하고, 틈틈히 소설을 썼다고.

하지만 혼자만 써서는 도저히 안 되겠기에 같이 쓸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그러다 <엄마의 유산>을 만났고,

체계적인 독서와 칼같은 글쓰기(주)를 통해

비로소 머릿속에만 있던 소설이 실체가 되었다고.

소설가가 꿈이었지만, 소설을 쓰지 않았던 내가

어느 날, 이렇게 살다 죽기싫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일 죽을지도 모르니 오늘 소설이나 쓰자는 생각에

매일 글을 끄적이던 도중

<엄마의 유산>을 만나, 작가님들에게 기대서 글을 쓴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님들은 나의 소설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매일 줌에서 만나는 그들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꿈을 엮어내는 사람들이다. 작고 희미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불씨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 틈에 있으면 안전하고 편안하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내 꿈도 지킬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아가 내가 꿈을 꾸고, 꿈을 이뤘듯이 누군가 나를 보며 꿈을 현실로 만들 수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정말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공들여서 쓴 소설들을 엮어 단편소설집을 출간했고, 소설의 소재가 여기저기서 서로 써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가장 나쁜 감정은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닐까? 앞으로도 잘못 살면 어쩌지? 였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현재의 불만족, 미래에 대한 불안이 불러온 더럽고, 농도가 짙고, 끈적이는 나쁜 감정들이었다. 그들의 힘은 나보다 셌고, 늘 나를 끌어내렸다. 끌려가지 않으려면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야 했다. 삶은 늘 고단했고, 잠자리는 사나웠으며, 말은 험하게 나오고, 눈은 지쳐있었다. 만일 소설이 없었다면 나는 무너졌을 것이다.


나에게 소설쓰기란 그런 것이다.

나를 살게 하는 힘이었고, 버틸 수 있는 기둥이었다.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하는 말들을 그대로 쏟아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낼 자신이 없었다.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훌륭한 방패막이자 보호막이었다.

나는 소설을 쓸때만 살아 있음을 느꼈다.



KakaoTalk_20251111_111009621.jpg 초등학교 동창이 보내온 문자


며칠 전에 온 문자를 오늘에야 봤다. 모르는 번호라 확인하지 않았든데, 이제 보니 초등학교 친구였다. 축하문자를 읽는데 눈물이 났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어쩌면 고생했다. 그 한마디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말만 들으면 눈물이 난다.


헛살지 않았다.

지금도 잘하고 있다.

앞으로도 잘할 것이다.


글을 쓸 때가 가장 좋다. 좋은 걸 할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따라서 나는 계속 써야 한다.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잠깐만이라도 멍.. 해졌으면 좋겠다.


(주1)칼같은 글쓰기, 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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