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문장을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 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 薄慕속으로 불려 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나는 짧은 글을 잘 쓰지 못한다.
글이 짧으면 뭔가 허전하다.
그래서 자꾸 보태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을 잘 전달하고 싶어서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어련히 알아서 읽어줄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정제하지 않고 쏟아낸다.
꾸밈이 많고, 좋으나 분명하지 않은 단어들을 사용해서 한껏 멋을 부린다
어떤 때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면서
글을 쓴다는 행위에 도취되어 아무말대잔치를 벌인다.
누군가는 글을 잘 쓴다고 했지만,
어떤 이는 그래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물었다.
글지적을 견디지 못했다.
입바른 소리라도 귀에 감기는 말만 기억하다 보니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말했다.
-작가님의 글은 술술 읽히기는 하는데, 깊이가 없어요.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었다. 잊어버리면 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깊이 와서 아프게 박혔다. 유독 그 말이 아팠던 건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들켰기 때문이었다.
파크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깊이에의 강요>는 젊은 여류화가가 평론가의 말 한마디에 고뇌하다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이야기다. 평론가가 무심코 내뱉은 발언 "작품에 깊이가 없다."라는 말은 화가를 옭매고 죽음으로 이끈다. <깊이에의 강요>를 읽으며, 깊이를 생각했는데, 내 글에 깊이가 없다고 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했는가?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을 연달아 읽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냥 나와 가장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싶었다. 그건 조금이라도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이었다. 김훈의 소설을 읽으며 그의 문장을 되새겼다. 철저하게 형용사와 부사를 배제하고 사실 위주의 문체로 소설을 끌어가는 힘을 느꼈다.
그래서 깊이가 생겼을까?
나는 여전히 모른다. 다만, 읽고 쓰고 생각하며 나만의 글을 만들어가고 있을 뿐이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들을 가장 적절한 단어들을 조합해서 글로 만든다. 아름답고 황홀하고 멋지고 고단한 작업을 그저 좋아서 하고 있을 뿐이다. 쓰고 보니 또 수식어의 남발이다. 그런데 맛있는 것을 너무 맛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걸까? 또 실지렁이우주*가 펼쳐진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첫문장을 찾아보니 오래 전 소설을 처음 시작할 때가 떠올랐습니다. 소설은 쓰고 싶은데, 어떻게 써야 할지는 모르겠고, 그래서 유명하다는 소설을 다 찾아서 읽었지요. 그 중에 황순원과 김훈의 소설을 필사한 것이 단문쓰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혹시 필사할 소설을 찾고 계신다면 황순원의 단편소설을 추천드립니다. 이상 말많고, 정도 많은 아줌마의 오지랖이었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지렁이우주 :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양을 쫓는 모험>에 나오는 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