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gents Park Open Air Theatre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될 때에는 처음에 그 사람의 좋은 면들에 끌리게 된다. 하지만 관계를 더 깊고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면들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좋아하는 분야를 잘 하게 되어서 직업으로 삼는 것, 아마 많은 사람들의 로망일 것이다. 하지만 적성과 취미가 일치하게 된다는 기적같은 확률 이외에도 감당해야 할 것이 있다. 좋아하던 것이 일이 되었을 때 그것을 마냥 즐기던 수준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 일로서 무언가를 할 때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소소하지만 귀찮은 것들과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의 장벽.
처음 영국에 와서 뮤지컬 공연장의 일자리를 구할 때만 해도 이것은 잠깐의 일탈일 뿐이고 후에 다른 일자리를 구해서 다시 관객으로만 공연장을 드나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공연장의 공기를 맡으며 일하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고 잘한다고 칭찬도 받게 되니 점점 더 이 분야에 발을 깊게 담그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극장에서 일하게 될지, 뮤지컬 제작사에 지원해 볼 것인지, 관련 공부를 위해 진학을 할 것인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정하지 못했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 영국에 와서 관람한 공연들에 대해 글을 써 보기로 했다.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또 외국어로 된 공연을 관람하며 느낀 것들을 쓰기로 한 터라 평론도 아닌 그냥 일기 같은 리뷰가 되겠지만 그래도 나만 알기는 아까운 공연과 공연장에 대해 누군가에게라도 알리면 좋지 않을까.
Regents Park Open Air Theatre는 런던의 왕실 소유 공원 중의 하나인 Regents Park 내에 있는 노천 극장이다. 야외이다 보니까 여름 시즌에만 운영을 해서 보통 매년 5월-9월까지 약 두 세개 정도의 공연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올린다. 여타 실내 공연장들과는 달리 플라스틱 좌석에 무대도 그렇게 넓지 않지만 웨스트엔드의 다른 공연들에 비해서 절반 정도의 가격으로도 공연을 관람할 수 있고, 한국에는 흔하지 않은 야외에서 하는 뮤지컬을 관람할 수 있다. 그리고 공연장 자체가 공원 안에 있다 보니까 관람 전후로 산책을 즐기기에 좋다.
이 곳에서 관람했던 뮤지컬은 2020 시즌의 두 번째 공연이었던 Carousel로, 194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이 올라갔고 영화화도 되었던 공연을 리바이벌한 것이었다. 사실 내용 자체는 조금 진부한 편이다. Julie Jordan과 Billy Bigelow라는 서로 다른 두 남녀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도 생겼는데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이야기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만한 이야기이지만 한 번만 들어도 머릿 속에 남는 넘버들과 Julie 와 Billy의 딸인 Louise가 사춘기에 방황을 하며 겪는 혼란을 춤으로만 표현한 연출, 그리고 노천 극장에서의 분위기가 이 극을 잘 살렸던 것 같다.
이 공연을 두 번 관람했는데 첫번째는 낮 공연, 두 번째는 밤 공연이었는다. 낮 공연을 보러 갔을 때는 오전 내내 비가 퍼부어서 공연을 제대로 관람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고 우비까지 구입했는데 시작 직전에 갑자기 비가 그치더니 오히려 해가 나면서 쩅쨍해졌다. 날씨가 맑아진 덕에 공연 관람은 무리가 없었는데 극 중 가장 비극적인 장면에서 날씨가 무대 감독의 지시를 받은 것처럼 갑자기 구름이 해를 가리면서 바람이 불어와 나무들이 흔들리며 스산한 소리를 내었고 마침 까마귀도 울면서 지나가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일반적인 공연장에서 조명과 음향 효과로 온전히 무대를 연출하는 것에 반해 노천 극장은 야외라서 변수가 꽤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이렇게까지 날씨까지 도와준 공연을 본 건 참 행운이었다.
후에 SNS에서 다른 관객이 남긴 후기를 읽었는데 이 프로덕션의 연출에서는 Billy를 영웅처럼 묘사하지 않아서 좋았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너무 어리석다고 느낀 캐릭터였는데 그가 이전에는 좋게 표현된 적도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내게는 놀라운 점이었다. 찾아봤을 때 한국에서는 공연된 적이 없는 작품 같은데 관람한 지 1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넘버가 귓가에 맴돌 정도로 내 취향에 맞아서 라이선스 공연으로도 올라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좋아하는 넘버는 'If I loved you'라는 Julie와 Billy의 듀엣곡인데, 곡 자체는 좋아하면서도 막상 들으면서는 둘이 사랑에 빠지는 것을 뜯어 말리고 싶은 양가 감정이 드는 아이러니. 그리고 영국에서는 여름이 되면 곳곳에서 노천 극장을 열어서 영화 상영이나 공연을 하기도 하는데 한국에서도 이런 문화가 생긴다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해 본다.
<Carousel 넘버 리스트>
- 1막
Prologue - Carousel Waltz
Mister Snow
If I loved You
June Is Bustin' Out All Over
When The Children Are Asleep
Blow High, Blow Low
Soliloquy
Finale Act 1
- 2막
A Real Nice Clam Bake
Geraniums In The Winter/Stonecutters Cut It On Stone
What's The Use of Wond'rin'?
You'll Never Walk Alone
If I Loved You (reprise)
Finale
(사진 제공 : Regents Park Open Air Theat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