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과 연극은 밥 먹듯이 봤지만 오페라는 뭔가 멀게 느껴지고 어려운 장르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오페라 관련 팟캐스트를 듣게 되면서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 노래로 진행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뮤지컬과 비슷한 것 같았고, 고전 작품들이 주로 올라오는 편이지만 창작 오페라도 공연되고 있고 고전이라도 현대적인 연출을 많이 시도되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모두 진지한 정극만 있는 게 아니라 가벼운 희극도 있는데, 전자인 정극을 '오페라 세리아', 후자를 '오페라 부파'라고 부른다고 한다.
Don Pasquale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도니체티의 오페라 부파 작품인데, 구두쇠인 Don Pasquale가 조카인 Ernesto와 그의 연인인 Norina의 결혼을 여자 쪽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자 그를 속여서 골려주겠다는 계획으로 펼쳐지는 코미디이다. 원작처럼 이탈리아어로 공연되어서 가사를 직접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대 위에 영어로 자막을 띄워주었다. 한국의 아침 드라마에도 나올 듯한 막장 스토리라는 것을 오페라 관련 팟캐스트를 들으며 예습하고 갔기 때문에 내용 파악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보다 무대 연출이 신기하고 인상적이었는데, 무대를 커다란 원판으로 회전할 수 있게 해 놓고 그 위에 각각 칸막이로 다른 장소를 배치해 놓아 무대를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전환하는 방식인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연출이라 정말 신기했는데 글로는 이것을 제대로 묘사할 능력이 안 되는 것이 무척 아쉽다. 특히나 첫 장면에서 오케스트라에 의해 Overture가 연주되면서 Don Pasquale를 속이는 주동자인 주치의 Malatesta가 등장해서 각 등장인물들의 칸막이를 넘으며 성큼성큼 돌아다니는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제자리 걸음을 하지만 무대가 회전하면서 공간을 초월해서 다니는 모습이 마치 이 사람들은 내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연출 같았다.
자리가 조금 멀었던 편인데다가 시력이 좋지 않아서 관람할 때에는 잘 몰랐는데 인터미션 때 프로그램북을 사와서 펼쳐 보니, Don Pasquale의 조카인 Ernesto역할이 'Konu Kim'이라고 써 있었다. 검색해 보니 한국인 테너 김건우씨였다. 물론 그 전부터 알던 분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한국인이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걸 확인하니 괜히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Don Pasquale를 관람한 Glyndebourne 오페라 하우스는 잉글랜드 남부의 작은 마을 Lewes에 있는데, 오래된 오페라 하우스 건물을 1994년에 아름답게 재건축되어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이라는 책에 실리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건물 사진을 보고 기대를 하고 갔지만, 해가 일찍 지기 시작하는 10월의 저녁에 방문을 했더니 너무 어두워서 아쉽게도 건물과 정원을 사진에서 본 것처럼 조망해 보기는 어려웠다. 공연 시작 전까지 약간 시간이 남아서 전시실 같이 조성된 공간들이라도 둘러봤는데 시간 여행을 간 것처럼 고전적인 매력이 남아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 자체는 제대로 구경을 하지 못했지만 일찍 Lewes역에 도착해 마을을 구경했다. 시내를 걸어서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작은 곳이었지만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었고 그 작은 동네 안에 비건 음식점과 공방, 헌책방, 제로 웨이스트샵 등 없는 게 없어서 반나절 잠깐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Glyndebourne 오페라 하우스는 Lewes 시내에서도 조금 떨어진 외곽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대중 교통을 이용하기는 마땅치 않아서 홈페이지에서 미리 왕복 셔틀 버스를 예약해서 이용했다. 나는 비수기에 갔었지만 여름 오페라 페스티벌 시즌에는 런던에서 출발하는 고속버스도 운영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성수기에는 드레스 코드도 적용을 한다고 하는데 그 때의 분위기는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Lewes도 다시 방문해 보고 싶고 지난번에 못 봤던 그 아름답다는 건물도 구경해 보고 싶은데 내년에 과연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