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st End Live

한국에서는 뮤지컬, 연극을 관람하러 다니기만 하다가 영국에 와서는 소원대로 공연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아쉽게도 모든 일이 그렇듯이 단점이 있었다. 보통 공연을 하는 시간에 일을 하기 때문에 다른 공연들을 보러 갈 시간이 잘 안 난다는 것. 그래서 보고 싶은 공연이 있다면 휴가를 내거나 내 근무시간과 겹치지 않는 공연들을 찾아야 했다.

그러던 중 같이 일하는 동료가 West End Live라는 글씨가 박힌 티셔츠를 입고 온 것을 보고 무엇이냐고 물었다. 1년에 한번씩 웨스트엔드에서 당시에 하고 있는 공연, 혹은 곧 올라올 공연들을 홍보하려 넘버나 장면을 시연하는 뮤지컬 페스티벌이라고 했다. 듣기만 해도 너무 좋아서 꼭 같이 가자고 약속을 했다. 그러고 얼마 후 날짜와 함께 공연팀 리스트가 SNS에 공개되었다. 2022년 6월 25, 26일 토일 주말 양일간 Trafalgar Square에서 개최된다고 하길래 둘 다 한번 가보자는 가벼운 마음을 먹었는데, 알고 보니 그건 엄청난 준비성과 부지런함을 장착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무료라고 해도 뮤지컬 페스티벌에 그렇게까지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고 과소평가한 잘못이었다.

입장 시작이 12시부터라서 대강 11시쯤 도착하면 줄 서 있다가 입장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까 줄이 너무 길어서 Trafalgar Square 근처의 여러 골목으로 꼬불꼬불하게 이어져 있었는데 한참을 따라 걸어가서야 겨우 끝을 발견했다. 같은 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어야 했지만 12시가 지나면 그래도 들어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줄이 어느 정도 줄어들다가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것이었다. Trafalgar Square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은 광장이라서 수용 인원이 많지 않고 만원이 된 다음에는 누군가 나가야만 다음 사람이 입장할 수 있는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사람이 빠질 리가 없었다. 결국 토요일은 런던의 골목에서 기차 놀이만 하다가 포기해야만 했다.

다음 날이 일요일에 다시 한번 도전을 했는데, 보통 토요일에 인기 많은 뮤지컬들이 리스트업되기 때문에 일요일은 경쟁이 덜한 편이라 다행히 12시가 조금 지나자 그 페스티벌 안에 나도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뮤지컬 페스티벌의 매력에 순식간에 푹 빠지게 되었다. 뮤지컬은 공연 특성상 콘서트와는 다르게, 관객 호응 유도보다는 극 진행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조용히 관람하는 게 예의이다. 그런데 이것은 페스티벌이다 보니까 실컷 노래를 따라부르고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어도 되는 것이었다. 따로 쉬는 시간도 없이 한 팀 끝나면 다른 팀이 금세 준비해서 올라오고 여름의 뙤약볕에 그늘도 없이 스탠딩 자리를 지켜야 했지만 지치는 줄도 모르고 거의 끝날 때까지 그 분위기를 맘껏 즐겼다. 하지만 원래부터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뮤지컬들은 당연히 현장에서 라이브로 넘버를 들으니 더 가고 싶어졌고 몰랐던 뮤지컬들은 살짝 맛보기만 하니까 감질나서 가고 싶어지는 부작용도 있었다. 대중 가요도 아닌 뮤지컬 넘버를 떼창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역시 뮤지컬의 성지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고 영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실감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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