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갑자기 이런 순간을 만난 당신에게
그 일이 일어난 날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하루였어요.
아침밥을 먹고 아이들에게 인사를 한 뒤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도착했지요. 모든 건 여태까지 일상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었지요. 사무실 제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출근 버튼을 누른 뒤 메신저에 로그인했을 때 일이었어요. 갑자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비현실 속으로 몸이 쭉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눈앞은 제자리 돌기를 한 사람처럼 뱅뱅 맴돌았지요.
저는 믿을 수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제 다리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머문 끝에는 멀쩡하게 바닥에 발을 딛고 있는 얌전하고 차분한 두 다리만 있을 뿐이었어요. 대체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달리기라면 안 한 지 1년도 넘었어요. 저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다가 뱉은 것도 아니었고요. 복용 중인 약도 없었고 그러니 부작용도 아니었을 테지요. 일상을 매일 나누는 친구에게 말했더니 친구의 대답은 짧고도 간결했어요.
"정신의학과에 가 봐. 그거 공황장애야."
'공황장애라니? 그 연예인들이 자주 앓는다는 그 공황장애? 내가 왜? 무슨 이유로? 아니 무엇보다 지금 난 그저 출근만 했을 뿐인데?'
그랬어요. 일이라곤 시작도 하지 않았지요. 누구도 제게 전화하기 전인 오전 8시 35분경에 벌어진 증상이었어요. 오전 9시는 넘어야 여기저기서 저를 찾을 테고 쳇바퀴 같은 업무가 시작될 예정이었지요. 가쁜 숨은 9시경이 될 무렵 원래 저의 숨으로 돌아와 있었어요. 조금은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는 제 숨, 그대로였죠. 모든 게 다시 예전과 같아졌지요.
탕비실에서 들리는 커피 내리는 소리, 사람들이 인사말을 건네는 소리, 옆자리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새하얀 A4 종이가 프린트로 들어가는 소리, 그 종이가 인쇄되어 툭툭 하고 용지함으로 떨어지는 소리, 노트북에 연결해 둔 이어폰 속으로 울려 퍼지는 메신저 알림음, 그리고 책상을 울리는 모바일의 진동소리까지.
멀리서 지나가듯 봤을 땐 잘 몰랐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날은 웃자란 잡초 같은 날이었네요. 잘 깎아둔 잔디 사이로 비죽 솟아난 웃자란 잡초처럼, 평범하고 엇비슷한 날들 가운데 하루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앉아서 턱을 괴고 가만히 지켜보니 다른 모양과 다른 색을 지닌 날이었던 거지요.
지나고 보니 어쩌면 그날은 삶이 내게 보낸 신호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당신의 일상에도 이런 날이 있었나요? 그래서 지금 제가 보낸 긴 편지를 읽고 계신 건가요?
이 글자들 저편 너머에 계실 당신의 안부를 지금 물어봅니다. 숨이 안 쉬어지거나 심장이 쿵쾅거리며 멈추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나요? 빠른 걸음으로 일상을 걸어가다 말고 잠시 멈춰 서서 당신의 일상을 가만히 바라봤던 순간이 있나요? 저는 지금 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내가 무슨 공황장애야?"
친구의 '공황장애 의심'에 저는 대뜸 그렇게 답을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답을 반쯤은 예상하면서요.
"너 번아웃인 거 오래됐잖아. 혹시 모르니까 오늘 퇴근하고 당장 병원엘 가 봐."
친구는 의외로 단호했어요. 부드럽고 유연한 사람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강하고 단단한 돌멩이 같았어요. 사람들은 뭔가를 지켜야 할 순간이 되면 어딘가 숨겨놨던 힘이 솟아나곤 하거든요. 친구에게 저는 지켜야 하는 존재였던 거 같아요.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순간에도 그 친구에게 마음이 쓰입니다. 제가 그 순간에 네가 있어줘서 고마웠다고 말을 했었는지 가물가물하거든요. 늦었지만 고마웠다고 전하고 싶어요.
당신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길 소망해 봅니다. 당신을 걱정해 주고 당신이 지나가듯 하는 말에 같이 생각해 주는 존재요. 저는 그래도 그런 존재가 꽤 여럿 있거든요. 당신에게 그런 존재가 있다면 당장 당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으세요. 만약 없다면 제가 당신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줄게요. 언제든 제 방문을 두들기셔도 좋아요. 문을 잠그지 않은 채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게요.
친구의 단호함 덕분에 저는 그날 바로 진료를 볼 수 있는 동네 정신의학과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첫 상담과 심리검사 후 스트레스가 심했다는 걸, 내 오래된 번아웃이 나를 병들게 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침과 점심, 그리고 자기 전 총 7개의 알약이 저의 지금을 말하는 것처럼 제 손바닥에 놓였지요.
당황했던 건 아니에요. 오래된 번아웃으로 일에 대한 의욕이 사라진 지는 몇 달이 넘었고 집중이 되지 않은 날들만 해도 길거리에 차이는 돌만큼 수많았지요. 우울한 감정은 바람처럼 시도 때도 없이 불어와 저를 흔들어놓고 사라지곤 했어요. 그러니 제가 당황했던 건 아니었어요.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병원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일이 조금만 줄어들거나 나아지면, 우리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자라서 스스로 하게 되는 일들이 더 많아지면, 제가 더 나이를 먹고 현명해지면 이 상황이 저절로 나아지리라 믿고 있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저는 손바닥 위에 높인 일주일치 약봉지를 마주하고 더는 현실에서 도망갈 수 없었어요.
번아웃은 질병이구나. 나는 지쳐있고 이제 막다른 골목에 몰렸구나. 아니, 막다른 골목에 서 있은 지 꽤 되었는데 나만 그 사실을 바로 보지 않고 외면하고 있었구나.
이제 앞으로는 더 갈 데가 없었어요. 막다른 골목이라 길이 없었지요. 제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봐야 해요. 돌아온 길을 다시 걸어가야 해요. 제가 걸어온 길에 어떤 풍경을 지났는지, 어떤 골목들이 꺾어져 여기에 이르렀는지 다시 되새김질해야 했어요. 거기에 어쩌면 답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당신은 지금 막다른 길에 서 있나요? 제가 당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어요. 그게 느껴지나요? 자, 손을 잡고 같이 돌아가봐요. 당신 옆에서 함께 걸을게요. 제게 당신의 이야기도 해주시고요.당신도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이 길고 지긋지긋하지만 어쩌면 내 삶의 제대로 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흐름을 바꿀지도 모를 이야기. 그 이야기는 지금 시작될 예정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