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당신이 해보면 좋을 것들
제가 번아웃임을 자각하는 순간 어떤 생각을 제일 먼저 했을 것 같나요. 당신이라면 아마 알 수 있을 거예요. 당신과 저는 참 닮은 사람일 테니까요.
정신의학과를 다니고 약을 빼먹지 않고 꾸준히 챙겨 먹고,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답게 번아웃에서도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 시도해 볼 일의 목록을 길게 써내려 갔지요. 그리고 하나씩 실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여러 개씩 시도했지요.
일이 아니라 다른 곳에 집중해 보자,라는 생각으로 취미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기억 저편을 뒤져 한때 즐겁게 했던 캔들 만들기를 꺼내 왔습니다.
소이왁스를 사고 실리콘틀, 향과 심지 등을 사서 아이들을 재운 새벽녘이면 캔들을 만들었어요. 만들다 보니 그냥 만들기만 하는 데 재미가 없어 선물을 목적으로 크리스마스트리용 캔들도 만들고 복숭아 모양 캔들도 만들습니다. 캔들 수는 늘어가고 선물 받은 사람들도 기뻐했지만 제 마음은 기쁘지 않았어요. 이건 아니다 싶었지요. 버리는 시간 같았거든요.
이번에는 일주일에 3시간 정도 내 시간을 갖겠다고 남편에게 선언했습니다. 카페에 가서 책을 읽었지요. 3시간은 꿈결보다도 빠르게 지나갔고 지난 뒤엔 꿈에서 깬 것처럼 허무했어요.
대체 내가 뭘 했지, 이룬 성과가 뭐야? 3시간 동안 고작 읽은 게 고작 이거야? 소중한 3시간인데 이뤄놓은 결과물 없이 끝나버렸네. 뭘 쓰든지 만들든지 해야 하는 거 아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어요. 카페에서 3시간은 스크랩북에 채워지는 조각들 같았죠. 책을 한 장 읽다가 카페에 머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가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가 다시 책을 몇 줄 읽었다가 음료를 홀짝거리는 시간으로 채워졌어요. 어떤 날은 글을 쓰면 좀 나아질까 해서 노트북을 들고 갔습니다. 브런치에 일기라도 써야지, 이 시간을 기록이라도 해야지 하곤 노트북을 켰지만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보다 한 시간을 훌쩍 보내기도 했어요.
그렇게 날려버린 3시간을 모으면 대체 얼마나 될까요. 제 머릿속에선 계산이 돌아갔습니다. 나는 대체 뭘 했던 거야, 하는 자책이 그 계산 끝에 후식처럼 따라왔어요.
제게 가장 충격을 주었던 사실은 집중을 할 수 없다는 점이어요. 일할 때만 집중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자꾸 길을 잃었지요.
요가도 다시 시작했어요. 2년 가까이 다니던 요가원이 사라지면서 점심시간에 가던 요가를 하지 못했거든요. 좀 먼 거리였지만 새벽에 갈 수 있는 곳이 생겨 그 요가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몸을 움직이니 복잡했던 마음이 줄어들었어요. 신기하게도 몸을 움직이고 에너지를 쓰면 그 순간 머릿속은 텅 비어지고 저도 모르게 평화가 찾아왔어요. 창밖으로 해 뜨는 풍경을 바라보다 사바아사나(누워서 취하는 자세로 요가 마지막에 취하는 동작)에 들어가면 마음이 고요해졌지요.
시작 전에 들어가는 짧은 명상도 도움이 되었어요. 내 마음과 생각을 고요하게 바라보면 어떤 결과가 되었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덕분에 점심시간에 공원에서 10분 이상 멍 때려보자는 항목이 실행 목록에 새로 생겨났어요.
밥을 먹고 나서는 회사 앞 공원에 홀로 앉아 뜨겁게 내린 차를 호로록 마셨어요.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을 쳐다보다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잎사귀도 바라보고 한가로이 날아와 짹짹거리는 참새 무리도 쳐다보았어요. 하루 중 그런 시간이 생기자 일상이 조금 나아졌어요. 나를 조여오던 허리끈이 한 칸 정도 뒤로 늘어난 것 같았지요. 비로소 숨이 쉬어졌습니다.
공원에서 10분이나 15분 정도 멍 때리기만 해도 내 삶이 나아지는구나. 뭘 만들거나 생산하는 일을 하는 거보다 되려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만드는 게 필요하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 저는 휴직을 결심했습니다.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저는 당신이 그 필요한 무엇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중요한 건 뭘 하려고 하지 마시라는 거예요. 일상에 빈 여백을 두세요. 우리는 그동안 여백 없이 무엇이든 채우려 했던 사람들이니까요. 해서 번아웃은 삶이 보낸 경고등이 아닐까 해요.
다 타버린 번아웃은 태울 걸 다시 만들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은 꺼진 불을 보면서 그저 불이 식길 기다리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당신, 뭘 하려고 하지 마세요. 몸을 움직이며 머리를 비우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비우세요. 삶에 아무것도 안 하는 순간, 여백을 만들어두세요. 거기에 당신을 오랫동안 두세요. 매일 조금씩 여백을 만들어 그 속에 당신을 두는 것도 좋아요.
제발 저에게 괜찮았던 방법이 당신에게도 통하길 바라요. 마침내 당신이 적어도 저만큼은 괜찮아지길 소망해요.
저도 앞으로 더 괜찮아지길 빌어봅니다. 소망은 함께 빌어야 더 강해지겠죠? 당신도 저의 안녕을 기원해주세요. 우리 함께 걸어가요.
당신의 안녕을 기원하며 오늘 편지를 이만 마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