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세일즈맨, 세일즈맨을 만나다

by 김태상

우리는 세일즈맨이면서 동시에 가망고객이다. 어느 날, 사업을 하고 있는 대학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고향 친구가 지금 영업을 하고 있는데, 그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었으니 곧 연락이 갈 거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친구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잘 부탁한다는 말은 하나 사주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와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 친구로부터 연락이 오면 흔쾌히 만나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나는 네 얼굴에 먹칠하지 않도록 그와 잘 만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잘 만나겠다는 말은 하나 사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날 오후, 예상대로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고, 우리는 다음 날 명동에 있는 한 까페에서 보기로 했다. 나는 그 근처에서 근무하고 있는 내 고객들을 만나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장소를 그쪽으로 제안했다. 그는 고객이 오라면 달나라가 문제냐며 세일즈맨다운 너스레를 떨었다. 재미있었다. 나도 내 고객에게 그런 식으로 종종 얘기하는데, 막상 그 얘기를 들이니 약간 코믹했다.


다음 날 나는 그를 만나기 전, 한 명의 기존고객과 식사를 했고, 지난주에 다른 고객으로부터 소개받은 한 명의 가망고객을 만났다. 그런데 가망고객과의 상담이 길어졌다. 그는 상당히 꼼꼼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다른 경쟁회사의 상품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그 자료를 내 앞에 내놓아 우리 회사 상품과의 비교를 원했다.


상담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결과는 대개 좋지가 않았다. 만나자마자 상품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고객들은 어느 상품이 좋은지 짧은 시간에 판단하지 못하고, 그래서 종국에는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게 되어 가장 저렴한 상품을 선택하기가 쉬웠다. 가격 면에서는 우리 회사의 상품이 가장 저렴하지 않았다.


나는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보려고 애를 썼다. 그에게 상품이 아닌 믿을만한 회사를, 회사보다는 세일즈맨으로서 능력 있는 나를 인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검토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가입을 미뤘다. 몇 차례 더 다른 방법으로 그의 결정을 종용했지만, 그의 대답에는 변함이 없었고,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음 주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와 헤어지고 다음 약속장소인 까페로 급히 걸어갔다. 상담이 길어진 덕분에 약속시간이 아슬아슬했다. 나는 걸어가면서 전화를 걸었다. 10분 정도 늦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잘됐네요. 저도 그 정도 늦을 것 같은데, 천천히 오세요.”

내 전화를 받은 그가 대답했다. 나는 종종걸음을 늦추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자마자 그에 대해서 실망감이 조금 들었다. ‘늦을 것 같으면 자기가 먼저 전화해야지. 고객은 난데.’


내가 먼저 도착했고, 그는 나보다 5분 정도 늦게 나타났다. 뛰어왔는지 내 앞에 앉은 그가 숨을 몰아 쉬웠다. 초여름 더위가 그의 이마에 땀방울을 맺게 했다. 나름대로 시간을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을 그의 모습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린 서로를 확인하고, 처음 뵙겠다는 의미로 악수를 나눴다. 그의 손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친구, 처음 얼굴 봐서 반가운데 땀에 젖은 손은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거든.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해놓고,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옷매무새를 만지고 오라고. 그리고 돌아와서 정식으로 악수를 청하라고. 그러면 상대방이 자네를 얼마나 젠틀하게 보겠어? 명심하라고. 항상 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외모를 점검하라고. 나도 자네가 오기 전에 손을 씻고, 거울을 보고 왔다고.’


우리는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면서 명함을 주고받았고, 사람을 처음 만날 때 느끼는 서먹함이나 긴장감 같은 것을 없애기 위해 우리를 서로 소개한 친구 얘기부터 시작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봐 친구, 명함을 받으면 그렇게 대충 훑어보지 말고 자세히 보라고. 명함 안에는 많은 질문이 숨어 있거든. 서먹한 분위기를 넘기는데 매우 훌륭한 첫 질문이 바로 그 안에 있다고. 이를테면 회사에 관한 질문이나, 부서 업무에 관한 질문 같은 거 말이야. 하물며 이메일 ID가 특이하면 무슨 깊은 의미가 있는지 물어봐. 그리고 소개한 친구가 나에 대해서 별로 얘기하지 않았더라도 칭찬이 자자하다고 하는 식으로 나를 치켜세우란 말이야. 내가 이 더위에 기분이 좋아지도록. 명심하라고. 고객들은 언제나 칭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전에 뭐 하셨어요?”

내 질문에 그는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도 그 친구처럼 예전에 사업을 했어요. 그 친구 사업 처음 할 때 제가 많이 도와주었지요. 한때는 좀 괜찮았는데, 거래처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연쇄 부도 당했죠. 한번 말아먹으니까 재기하는데 참 힘들어요. 아직 빚도 좀 남았고. 하지만 언젠간 다시 일어서겠죠. 이 일 저 일 하다가 이 짓한 지는 얼마 안됐어요. 그 친구가 많이 도와줘요. 이렇게.”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래요, 다시 한번 일어나셔야죠.”


나는 이렇게 그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주접을 떨어요.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이냐? 네가 무슨 들국화냐? 오늘 컨셉은 성냥팔이 소녀냐? 재기하는데 한 푼 보태달라는 거냐? 왕년에 사장이었냐? 잘 나가다가 망했냐? 말하는 거 보니까 망하게 생겼네. 처음 자기를 소개할 때는 심플하고, 긍정적으로 얘기하는 거라고. 고객은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라고. 네 과거에는 아직 관심이 없다고. 예전에도 영업을 했습니다, 영업이 저한테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같이 좋으신 분들을 만나 이렇게 얘기 듣고 인생을 배우고 하는 게 참 즐겁습니다. 이렇게 말해야지. 이렇게 간단히 자기소개하고, 반대로 고객에게 질문을 던져야지. 그리고 너, 영업을 이 짓이라고 말했다. 마지못해 한다는 거라고 말했다. 너 오늘 나한테 딱 걸렸어. 네 앞에 앉아 있는 나도 영업한다고, 임마! 그럼 나도 이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말이렷다. 좋아, 본격적으로 한번 해보자고. 누가 이기나. 너 아까 영업하기 전에 3일 교육받았다고 했지? 토탈 15시간? 나는 2년간 적어도 1,200시간 교육받았거든? 고생 좀 될 거다.’

“바쁘실텐데 어디 상품 좀 보죠? 팜플렛이나 브로슈어는 가지고 오셨죠?”


자기를 잘 포장해서 한답시고 떠들어대는 그의 연설이 좀 지겨웠다. 나는 기회를 노리다가 상품 좀 보자는 말로 그의 얘기를 막았다. 그는 말을 가로막는 내가 당황스러웠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명령에 복종하듯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몸을 숙여 가방을 열었다. 몸을 숙인 채로 한참 동안 가방을 뒤졌다. 자료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나에게 보여줄 자료를 찾았는지 씩 웃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나는 생각했다. ‘야, 아직 아니지. 벌써 꺼내면 안 되지. 아직 우리는 상품 얘기 말고도 할 말이 많다고. 서로 잘 모르잖아. 영업은 고객과의 기 싸움인데, 그 싸움에서 지면 끝장이라고. 아무리 고객이 상품 좀 보여 달라고 해도 서로의 관계가 무르익기 전에는 절대 보여주지 말라고. 기 싸움을 해서 주도권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도권을 잡기 전에는 절대 상품을 내놓지 말라고. 이럴 땐 이렇게 말해야지. 죄송합니다. 제 얘기하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고향 친구 녀석과 친한 친구분이라고 하시니 저 또한 남같이 않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보다는 영업에 있어서 한참 선배이시니 답답해서 그러는데 질문 하나 드릴게요. 어제 이러이러한 고객을 만났는데, 얼마나 까다로운지 어떻게 풀어갈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이럴 경우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친구, 알겠어? 질문과 함께 당신은 영업의 고수입니다 라고 비행기를 태우란 말이야.


고객과의 기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고객이 가장 잘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고, 그런 얘기 속에서 고객을 대단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추상적인 질문은 안 된다는 거야. 디테일한 질문만이 유효하다고. 예를 들어, 영업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은 효과가 없어. 아까 내가 말한 것처럼 이런 사람을 만났는데 하고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정을 해서 물어봐야 한다고.’

그가 꺼내놓은 상품은 공기청정기, 연수기, 비데였다. 회사소개와 상품소개가 대하소설처럼 이어졌다. 그는 특히, 자신의 회사가 비록 대기업은 아니지만 정부로부터 벤처인증을 여러 차례 받았고, 특허도 셀 수 없이 많이 보유하고 있는 훌륭한 벤처기업임을 나에게 인지시키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였다. 그리고 상품에 대해서는 대기업들조차 몰래 카피해갈 정도로 우수한 기술력이 있어서 베스트 중의 베스트이고, 가격은 대기업의 그것들보다 훨씬 저렴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말을 못 믿겠으면, 이걸 한번 보라는 식으로 자사 상품을 선전한 신문광고를 꺼내놓았다.


“이 광고 못 보셨어요? 매일 나오는데. 그리고 이것 보세요. 얘네 둘이 우리 회사 전속모델이에요. 요즘 드라마 때문에 인기가 끝내준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들이 써보고 좋아서 모델을 자청했대요.”

“아, 예.” 나는 짧게 대답했다. 길게 대답할 게 없었다. 그로부터 특별한 질문도 없었고, 나 자신도 별로 궁금한 것이 없었다. 그가 교육받은 대로 술술 설명을 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원맨쇼를 해라. 이봐, 이 시간이 가장 중요하단 말이야. 고객의 상태 변화를 계속해서 살피라고. 고객의 눈을 유심히 보란 말이야. 질문을 여러 각도로 던져서 지겨움을 피하고, 나올만한 거절들을 예상하라고. 예를 들어 물건을 구입할 경우 결정권이 고객에게 있나 혹은 배우자에게 있나, 내가 팔고자 하는 물건을 이미 가지고 있나 혹은 없나 하는 사항들을 체크 해야 한다고. 만약 결정권이 배우자에게 있을 것 같으면, 여러 고객들의 예를 들어 그런 사람들도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 물건만은 본인이 직접 구입하더라 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거절처리를 해놓는 거야. 그리고 이미 물건을 가지고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께 선물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쪽으로 상담의 방향을 바꾸라고.


거절의 이유는 너무도 다양하고, 고객마다 그 이유도 다 다르잖아. 능력 있는 세일즈맨은 거절이 나오기 전에 그것들을 예측하고 자연스럽게 거절처리를 해둠으로써 어려운 상황으로 상담을 끌고 가지 않는다고. 멋지게 회사소개를 하고, 상품소개를 했는데 가만히 듣고만 있던 고객이 아내한테 물어봐야 하는데요, 저 그거 있는데요, 다른 회사 상품이 더 낳을 것 같은데요 라고 말하면 어떻게 할 건데? 설명을 처음부터 다시 하나? 그리고 회사소개나 상품소개같이 지겹고 긴 얘기를 해야 할 상황이면, 항상 말머리에 5분 정도 걸립니다, 10분 정도 설명드릴 게요 라고 말을 하라고. 그러면 듣는 입장에 있는 고객이 금방 끝나겠군 하며 안도할 것 아니야. 그리고 당신이 얼마나 절도 있게 보이겠어. 이런 식으로 미리 얘기를 해두면 20분이 걸려도, 30분이 걸려도 고객들은 지루하게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너, 걔네들이 모델 자청했다고? 뻥까지 마! 좀 더 진지해지란 말이야. 고객과의 진지한 교감을 이끌어내 보라고.’


이어서 그는 공기청정기, 연수기, 비데는 현대인의 필수품이라고 말하며 상품의 가치나 효용성에 대해서 강변하기 시작했다. 회사의 매출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고객들이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해 자진해서 구입하기 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했다.

“저희 회사 공기청정기는 이렇게 바퀴가 달려있어서 이동이 편리합니다. 거실에서 사용하다가 주무실 때는 아이들 방이나 안방으로 옮겨서 켜 놓으실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작아 보여도 성능은 끝내줍니다. 그리고 혹시 아이들이 아토피성 피부 아닙니까? 아토피에는 약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 연수기가 특효약입니다. 물론 사모님 피부 관리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지요. 하나 구입하시면 사모님이 제일 좋아하실 겁니다. 비데는 말할 것도 없이 현대인의 필수품이죠.”


“요즘 많이들 사더라고요.”

나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주, 지랄을 해라. 사모님? 나 아직 결혼 안 했다. 노 와이프, 노 베이비다. 그리고 너, 내가 한 달 전에 이혼했으면 어쩔래? 친구한테 소개받고 왔다면서 나에 대해 아는 게 뭐야? 친구한테 뭘 물어봤냐고? 넌 오늘 나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끝장났어. 고객은 말이지, 상담 내내 어디서 꼬투리를 잡아 어떻게 하면 안 사나 하고 그것만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고객에게 약점을 잡히거나 조그만 실수라도 보여서는 안 된다고. 고객에게 거절해도 괜찮을 그런 명분을 줘서는 결코 안 된다고. 그리고 너, 사람을 소개받았으면 꼼꼼하게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물어봐야지. 아주 사소한 정보라도 그 사람에 관한 거라면 놓치지 말고 외워둬야지. 소개 영업이 그래도 승률이 좋은 건, 만날 사람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많이 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고객을 만나기 전에 작전을 짜는 거라고.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접근을 하자 하는 식으로 말이야.’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보였다. 준비해온 얘기를 다 한 듯 보였다. 내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는 그의 표정이 약간 불안해 보였다. 내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것 보라고, 친구. 내가 살지 안 살지 통 모르겠지? 어느 상품에 관심이 있는지도 모르겠지? 답답할 거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틈틈이 내 생각을 체크하라고 했잖아. 혼자 열심히 떠들면 뭘 해. 결정적인 거절 한방이면 당신은 나가떨어지게 돼 있다고. 나 아직 결혼 안 했는데요, 그래서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 그때는 꼭 당신에게 살게요 하면 어떻게 할래? 그럼 그제서야 위기를 느껴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선물하라고 방향을 틀래? 내 부모가 살아계신 지도 모르겠지? 친구, 명심하라고. 고객과의 상담은 뜨개질 같은 거야.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거지. 한 올이라도 어긋나면 옷이 안 된다고. 다시 실을 풀어야 하고, 실을 풀더라도 다시 시작할 시간이 없는 거라고. 그렇게 철저하게 상담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놈의 거절은 어디서 튀어나오질 모르잖아. 열 명 만나면 한 명 될까 말까 하는 게 영업이잖아. 승률을 올리라고. 승률을 올리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하라고.’


그래도 그는 나에게서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상담을 잘해서가 아니라 강력한 소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친구 얼굴에 먹칠하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하나는 사야 할 것 같았다. 그를 만나기 전에 나는 이미 그렇게 결정하고 나왔다. 하지만 기분은 별로였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세일즈맨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아토피 질환을 앓고 있는 어린 조카가 생각이 났다. 연수기가 아토피에 효과가 있다고 하니 그걸 사서 선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가격도 세 개 중에 가장 저렴했다. 소개한 친구, 나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세일즈맨 모두를 위한 타협점이 바로 연수기였다.


“마침 잘됐네요. 조카 녀석이 아토피가 심하거든요. 그걸로 하나 할게요.”

나는 내 결정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하나 사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도 친구, 좋아하지는 마. 당신은 오늘 나와의 상담에서 성공한 것이 아니니까. 난 당신이 좋아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그래서 당신은 나로부터 어떤 누구도 소개 받지는 못할 거야. 그래서 당신은 오늘 실패한 거지. 명심하라고. 고객과의 상담은 판매와 소개 확보라는 두 개의 목적을 달성해야만 비로소 성공한 것임을. 오히려 소개 확보가 판매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래야 계속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런데 그는 내 결정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보였다. 그의 불안해하던 표정이 밝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굳어지고 어두워졌다. 나는 그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설마 다 사라는 거는 아니겠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어렵게 입을 뗐다.

“공기청정기로 하시면 안 되겠어요? 소개해준 친구한테도 공기청정기를 얘기했는데, 못 들으셨어요? 그게 사실은...”

사정은 이랬다. 그가 판매하고 있는 메인 아이템이 공기청정기이고, 공기청정기 판매가 그의 실적을 카운트하는데 결정적인 몫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실적을 쌓아야지만 팀장으로 승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팀장이 되어야만 수입이 괜찮아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황당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럼 상담이 처음부터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잖아. 공기청정기만 설명하지 이것저것 다 설명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놓고. 친구한테 못 들었냐고? 친구가 세일즈맨이냐? 소개자의 영향력을 그렇게 쓰는 게 아니야. 내가 그 친구한테 전화해서 다시는 너 같은 친구 보내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그 친구도 다시는 너한테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지 않을걸. 그리고 이 정도 되면 오늘 상담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라고. 한발 물러서라고. 판매는 여기에서 마감하고, 소개 부탁 쪽으로 방향을 잡으란 말이야. 그렇게 말을 바꾸니까 영업이 아니라 구걸이 되잖아.’


나는 그에게 화가 났고, 그 화가 오기를 발동시켰다. 그렇게 순순히 하기가 싫었다. 내 의견을 굽히고 싶지 않았다. 연수기에서 공기청정기로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가 실적을 쌓든 말든, 팀장으로 승진을 하든 말든, 수입이 좋아지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아예 트집을 잡아서 연수기도 사고 싶지 않았다. 사지 않아도 소개해준 친구에게 거뜬히 할 말이 생겼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테이블 위에 있는 브로슈어만 만지작거렸다. 우리 둘 사이에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런 분위기를 만든 그가 싫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어요?”

결심한 듯 그가 우리 사이에 흐르던 침묵을 깨고 나섰다.

“공기청정기를 사시면, 대신 연수기를 제 돈으로 사드릴게요. 제가 좀 적자를 보더라도 오늘 고마워서 그래요.”


바로 이거였다.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그것이 바로 문제였다. 우리 세일즈맨들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심심치 않게 사용하는 제살 깎아먹기가 이 상황을 돌파하는 묘책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컴플라이언스 위반 사항 중 첫 번째 항목에 해당하는 ‘고객과의 비정상적인 거래’를 그는 원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친구야, 언제나 이러니? 그리고 후배들 잔뜩 모아놓고 영업이란 원래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라며 마치 영업의 달인인 양 떠버리니? 물론 친구가 처한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야. 나도 영업을 하는 놈이라고. 우리는 물불 안 가리고 실적을 쌓아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라고. 나도 매일 그런 달콤한 유혹에 빠진단 말이야. 고객이 요구하지? 하나 살 테니 뭐 해주고 뭐 해달라고, 그렇지? 그래도 우리는 그런 유혹을 건네서도 허락해서도 절대 안 돼. 그게 진정 우리가 사는 길이야.’

“그러면 안 되죠. 공은 공이고, 사는 산데. 제가 둘 다 살게요.”

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아, 이럴 때 이 말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얼마 전 지점 세션에서 특강을 한 어느 선배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라고요? 하지만 그건 웃긴 얘기예요.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원래부터 공이라는 것은 없어요. 공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사가 공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을 본 것뿐이지요. 그래서 누군가 우리에게 공사를 분명히 하라고 충고한다면, 그건 그가 우리를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다시는 우리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한 거지요.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 모든 일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야 비로소 이루어지는데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없으면 일이 제대로 되겠어요? 우리 세일즈맨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까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상품이 끝내주는데 고객들은 바보같이 자꾸 필요없다는 말만 되풀이하지요? 아무리 우리가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다고 설득을 해도 안 넘어오지요? 원래 그렇대요. 사람은 남으로부터 설득당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못 파나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팔아야 합니다. 상품은 그저 덤일 뿐이지요. 그럼 우리 자신을 어떻게 파냐고요? 간단해요. 그들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우리를 좋아하게 만드는 거지요. 그들이 생각하기에 저 사람이 잘됐으면 좋겠어, 저 사람이랑 친분을 쌓았으면 좋겠어 하는 좋은 감정 말이에요. 한번 그런 감정이 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런 걸 왜 사지? 하는데도 그들은 바보같이 막 사요. 하물며 경쟁회사의 사람들도 사려 하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도 소개시켜 주려고 안간힘을 쓰지요. 상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좋아서, 우리가 잘됐으면 하고 바라서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란 쉽지가 않아요.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현명하다고요. 이런 감정은 속일 수가 없는 거잖아요. 일방적인 의사소통으로는 형성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우리도 상품을 팔려고 애를 쓰기보다 먼저 우리 고객들이 잘됐으면 하고 바라야 합니다. 그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도록 진지해져야 합니다. 그들에게 영향력 있는 의미들로 충전된 신선한 삶의 유형, 그런 존재로 다가가야 합니다. 마치 친구처럼.”

나는 그날 친구의 친구로부터 공기청정기와 연수기를 구입했다. 공기청정기는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연수기는 조카에게 선물했다. 나는 그날 그러고 싶었다. 어리둥절하면서 내 신용카드를 받아 긁고 있는 모습이 꼭 나 같았다. 나 같은 그가 내 결정을 찜찜하게 생각했다. 나는 그가 오해를 할까봐 그동안 그를 만나 했던 생각을 잘 정리해서 조심스레 꺼냈다. 그날은 내 일생 중 사심 없이 보낸 유일한 하루였다. 원래 나라는 놈은 그렇게 멋진 녀석이 아닌데, 살다보면 가끔은 홱 돌기도 했다. 그날이 그날이었다. 나는 그날 그저 괜찮은 고객으로 남고 싶었다. 그 친구의 작은 성공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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