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어느 누구도 영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나는 친구 입에서 이 말이 나왔을 때 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세일즈맨이었다면 의례 하는 얘긴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말이었는데, 영업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서울 근교 신도시에서 삼 년째 이비인후과를 운영하고 있는 의사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진료를 끝내고 대기 환자가 없는 틈을 타 잠시 원장실에 들어온 그가 마스크를 벗으며 기다리고 있던 내게 던진 말이 다름 아닌 영업이라는 단어였다. 그는 계속해서 영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내게 영업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이 세상에는 몇 개의 직업이 있을까? 천 개, 혹은 만 개? 아마도 셀 수 없이 많겠지? 너처럼 벤처회사에서 영업이나 마케팅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의사도 있고, 내 와이프처럼 학교 선생님도 있고 말이야. 그런데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해. 직업은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하지만 직종은 단 하나, 영업뿐이다 라고 말이야. 마치 영업직이라는 이름의 블랙홀 속으로 모든 직업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요즘 난 내가 의사이기에 앞서 세일즈맨 같거든.”
“너 요즘 환자가 별로 없냐? 의사가 무슨 영업 타령이냐? 그리고 직업은 다양하나 직종은 단 하나, 영업직뿐이라는 네 말은 좀 논리적 비약 아니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괜히 그의 말에 딴지를 걸었다. 얼마 전에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 작은 도시에만 해도 이비인후과가 다섯 개나 있으며, 조만간 또 하나가 개원한다는 얘기를 나에게 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하루 평균 백명 정도의 환자를 진료하며, 주위에 병원이 늘어나도 그 정도의 환자 수는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어느 정도 그 동네에서는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젊은 병원장이었다.
“나는 내 말이 절대로 논리적 비약이라고는 생각 안 해. 너도 요즘 새롭게 생겨나는 신종 직업들을 생각해보라고. 죄다 영업에 관련된 직업들뿐이지. 그리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직업들도 모두 다 그 밑바닥에는 영업 마인드라는 직업의식을 공통으로 요구하기 시작했고. 저기 사거리에 이비인후과 하나 있지?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이거든. 이 동네가 신도시로 개발되기 훨씬 전부터 있던 병원인데 요즘 그 병원에 환자가 없데. 원장이 육십이 넘은 분인데 환자들이 와서 하는 말이 아무 말도 안 해주고 그냥 여기저기 진료만 하고 돌려보낸다는 거야. 원장이 좀 무뚝뚝한가 봐. 사실 그 원장뿐만 아니라 옛날 의사들이 다 그렇잖아. 하지만 이제 환자들은 그런 권위적인 스타일의 의사들을 답답하게 생각해. 의사가 실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그건 훨씬 나중 문제야. 특히 이비인후과를 찾는 환자들은 대부분이 어린애들이잖아. 엄마가 데리고 온다고. 너도 알지? 아줌마들 말 많은 거. 아파트에 삼삼오오 모여서 이 병원 원장은 이렇더라 저 병원 원장은 저렇더라 하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대거든. 거기에서 짤리면 그야말로 영원히 아웃이야. 짐 싸야 한다고.”
“그래서 너도 미키마우스가 그려져 있는 의사 까운을 입고, 여기 원장실에 앉아서 틈만 나면 이런 영업 관련 서적들을 읽는구나. 정말 피곤하고 부대끼는 이십일 세기다.”
나는 그의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여러 권의 영업 관련 서적들을 손으로 집어 책장을 넘기며 그의 말에 동조를 해주었다. 그가 얼마나 꼼꼼히 그것들을 읽고 있는지 많은 부분이 빨갛게 밑줄이 쳐져 있었다.
“아니, 이런 변화는 피곤하고 부대끼는 일이 아니야. 오히려 진작부터 인지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기회라고. 신나는 일이지. 독보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으니까. 즐기면 돼, 이런 변화를. 그러니 이제는 전공을 불문하고 대학에서도 영업을 교양필수과목으로 해서 학생들에게 영업 마인드를 미리미리 가르쳐야 한다니까. 의대에서도 세일즈 중심의 개원학 같은 것도 전공필수과목으로 채택해야 하고 말이야.”
그는 환자가 왔다는 간호사의 콜을 듣자 이렇게 자신의 영업관을 정리하며 마스크를 다시 썼다. 그리고 내게 잠시 기다리라며 진찰실로 다시 들어갔다. 열어 놓은 문틈 사이로 환자 엄마에게 열변을 토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려왔다. 그날 의사인 친구에게서 들은 ‘직업은 다양하나 직종은 하나다. 그것은 바로 영업직이다’라는 궤변 아닌 궤변이 우리가 저녁으로 함께 먹은 회처럼 나에겐 매우 신선하고 싱싱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