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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과 부적, 경면주사(朱砂)

by 역맥파인더

圖畫署畫壽星仙女直日神將圖獻于公亦相贈遺名曰歲畫以寓頌祝之意 서화에 관한 임무를 맡고 있는 도화서에서는 수성선녀도와 직일신장도 그림을 그려 임금에게 바치고 또 서로 선물하는데 이것을 세화(歲畫)라고 하며 축하하는 뜻을 나타낸다. 閭巷壁上貼鷄虎畫 일반 백성들은 바람벽에 닭그림과 호랑이그림을 붙여 액을 물리친다. 男女年値三災者畫三鷹貼于門楣 남녀 모두 나이가 삼재에 든 자는 매 세 마리를 그려 문 상방에 붙인다. - 동국세시기 중

출처 위키미디어

오백 년을 주기(週期)로 번갈아 일어나는 온난화(溫暖化)와 한랭화(寒冷化)라는 전지구적 기후변화 속에서도 다른 지역과 달리 언제나 한결같이 그 변화에 적응하며 자라는 차(茶) 나무를 가진 우리 민족은 사실 부적(符籍)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었다. 부적(符籍)이라고 하는 것이 액(厄)을 막거나 악귀(惡鬼)를 쫓으려는 목적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기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국시(國是)를 가지고 전 세계 사람들이 목숨처럼 필요로 하는 차(茶)를 만들어 공급(供給)하는 우리 민족에게는 사실상 필요 없는 것이었다. 세상 그 어디에도 목숨 같은 차(茶)를 만들어 값싸게 공급해 주는 우리 민족에게 해를 끼치거나 저주(咀呪)를 가할 사람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으로부터 수인성 전염병을 이겨낼 수 있는 차(茶)를 값싸게 공급받아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저승에 가서 그런 우리 민족을 저주한다는 것은 어이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우리 민족에게 부적(符籍)이 필요해진 건 지나인(china;支那人)들의 야욕 때문이었다. 차(茶) 산업국이 되고 싶다는 중국인들의 수천 년간의 도광양회(韜光養晦)가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오랜 집요한 염원과 노력 끝에 황제헌원(黃帝軒轅) 대에 와서 겨우 차(茶)를 실어 나르는 수송유통(輸送流通)의 한 부분을 담당하며 간신히 차(茶) 산업에 참가할 수 있게 된 지나인(china;支那人)들은 그러나 그 정도의 참여에 만족하지 않았다. 차(茶) 무역에 참여하기 위해 산을 옮기고 황하 강줄기를 막아 돌려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광적인 노력을 보였던 그들이 오랜 세월 노력 끝에 차(茶) 나무의 인공 재배에 성공하자 유통(流通)뿐만이 아니라 제조(製造)를 포함한 차(茶) 산업(產業) 전체를 독점하겠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차(茶) 산업을 독점하려는 중국인들이 가장 먼저 가장 열심히 가장 오랫동안 견제하고 탄압한 것이 우리 민족인 것은 당연했다. 결국 우리 민족이 차(茶) 산업의 종주권(宗主權)을 뺏기고 중국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면서 전 세계는 살육과 저주가 난무하는 지옥판이 되었다. 중국인들은 인류 전체의 생명과 안정에 필수불가결한 차(茶)를 단순한 자신들의 패권 획득과 유지를 위한 전략상품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차(茶) 물량을 작위적으로 조절하면서 그를 통해 패권(霸權)을 추구한 중국인들의 농간(弄奸)에 죽어가야 했던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을 그렇게 죽인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부었고 그렇게 죽은 영혼들은 악귀가 되어 그들 주위를 떠돌았다. 그런 저주로 생긴 액(厄)과 악귀(惡鬼)들의 복수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게 부적(符籍)이었다. 부적의 본산지(本産地)가 중국인 연유다.



우리 민족이 차산업(茶產業)의 종주권(宗主權)을 중국(지나)에 뺏기기 전 사용하던 부적(符籍)은 그런 액(厄)과 저주(咀呪)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계속된 기후 변화로 인해 우리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차(茶) 나무가 사라져 가자 우리 민족은 일본에서 채엽(菜葉)되는 찻잎들까지 거두어 차(茶)로 만들어 대륙의 서쪽 끝까지 공급(供給)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매년 채엽되는 모든 찻잎들은 단오(端午) 전까지 병차(餠茶)나 전차(塼茶) 같은 긴압차(緊壓茶)로 만들어져 마차(馬車)에 실려야만 했고 또한 이들을 대륙의 서쪽 끝까지 운송하는 무역로(貿易路)도 건설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들만으로는 차(茶)를 안전하게 대륙의 서쪽 끝까지 운반할 수 없었다. 생명의 나무(Life of tree)로 불리며 죽은 뱀과 사람, 까마귀와 사자를 다시 소생(蘇生)하게 하는 기적 같은 약효(藥效)로 길가메시 서사시와 조로아스터의 아베스탄,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로 유명한 그리스 신화와 탈무드 아가다에까지 분명히 기록된 차(茶) 나무의 잎은 그래서 뱀과 새, 벌레들이 미친 듯이 꼬이는 골치 아픈 귀중품이었다. 특히나 차(茶)를 먹은 뱀(蛇 serpent)은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기록됐듯 탈피(脫皮)를 했는데 이 탈피 껍질은 시간이 지나면서 미생물이 생겨나는 온상이 되어 그로 인해 주변의 차(茶)를 오염시키는 주범이었다. 마차에 실려 운송되는 차(茶)를 향해 집요하게 달려드는 뱀과 새 그리고 벌레들을 막아내어 온전하게 차(茶)를 운송하기 위해서 우리 민족이 찾아낸 건 바로 경면주사(鏡面朱砂)였다. 황하수은(HgS)인 경면주사(鏡面朱砂)는 황(黃:sulfur)에서 나오는 그 특유의 냄새로 뱀과 벌레들의 접근을 막는 훌륭한 퇴치제(repellent)가 되었다. 특히나 차(茶)에 가장 해로운 뱀은 유황 냄새가 나는 곳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부적(符籍)을 만들 때 굳이 회화나무 꽃이나 열매의 노란 색소를 우려내어 닥종이에 물을 들인 괴황지(槐黃紙)를 사용한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주사(朱砂)의 황(sulfur) 성분이 뱀을 퇴치하는 주장(主掌)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국제보건기구 상징에 나타난 아스클레피우스의 지팡이와 뱀. 출처 위키미디어


One day, while playing with a ball or chasing a mouse Glaucus fell into a jar of honey and died. Unable to find their son, his parents went to the Oracle at Delphi who told them "A marvelous creature has been born amongst you: whoever finds the true likeness for this creature will also find the child." They interpreted this to refer to a newborn calf in Minos' herd. Three times a day, the calf changed color from white to red to black. Polyidus (or Asclepius, god of medicine) observed the similarity to the ripening of the fruit of the mulberry plant, and Minos sent him to find Glaucus. Searching for the boy, Polyidus saw an owl driving bees away from a wine-cellar in Minos' palace. Inside the wine-cellar was a cask of honey, with Glaucus dead inside. Minos demanded Glaucus be brought back to life, though Polyidus objected. Minos ordered Polyidus to be entombed with the body. When a snake appeared nearby, Polyidus killed it immediately. Another snake came for the first, and after seeing its mate dead, the second serpent left and brought back a herb which then brought the first snake back to life. Following this example, Polyidus used the same herb to resurrect Glaucus. 크레타 왕 미노스의 아들 글라우코스(Glaucus)는 어린 시절 공 또는 쥐를 쫓다가 꿀통에 빠져 죽었다. 그가 실종되자 미노스(Minos) 부부는 그를 백방으로 찾다가 어떻게 해야 그를 찾을 수 있겠는지 알아보려 델포이의 신탁을 전하는 자에게 찾아갔다. 그는 너희 중에서 경이로운 피조물이 태어났는데 이 피조물이 진실로 뭘 닮았는지 알아내는 자가 그 아이를 찾아낼 거다라고 말해 주었다. 미노스 부부는 이 피조물이 미노스의 가축떼에 새로 태어난 송아지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송아지는 하루에 세 번 색깔이 변했는데 하얀색에서 빨간색으로 그리고 검은색으로 변했다. 폴리이도스(Polyeidus) 또는 약(藥)의 신(神)인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가 그 송아지의 색깔 변화를 뽕나무 열매가 익어가며 색깔이 바뀌는 것과 닮았다고 하자 답을 맞혔다 생각한 미노스는 그에게 글라우코스를 찾도록 명했다. 아이를 찾던 중 폴리이도스는 미노스 궁전의 포도주 저장실로부터 꿀벌들에게 쫓겨 나오는 올빼미를 보았고 그로써 포도주 저장통에 포도주 대신 꿀이 담겨있음을 알아채고 결국 그 꿀통 속에 빠져 죽은 글라우코스를 찾아냈다. 그러나 미노스는 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살려서 데려와야 한다며 폴리이도스를 아이의 시신과 함께 가둬버렸다. 고민하던 중에 뱀 한 마리가 시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그는 (지팡이를 사용해) 뱀을 죽였다. 그러자 얼마 후 다른 뱀(serpent)이 나타나 처음 나타난 뱀이 죽은 것을 보고는 다시 나가서 약초(herb)를 갖고 돌아오더니 그것을 죽은 뱀 위에 얹었다. 약초를 얹자 죽었던 뱀이 되살아났고 이걸 본 폴리이도스는 뱀이 남기고 간 약초를 뱀이 했던 것처럼 글라우코스의 시신에 얹어 그를 되살려냈다. - 위키피디어(Wikipedia)의 Glaucus (son of Minos) 중에서



약신(藥神:god of medicine)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가 죽은 글라우코스를 찾아내 부활시키는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는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인 차(茶)의 약효가 어느 정도인지 뱀이 또 얼마나 쉽게 밀폐된 공간을 드나들 수 있는지 잘 알게 해 준다. 신화 이야기 속 하루에 색깔이 세 번 변한다는 피조물은 그러나 뽕나무 열매가 아니었다. 가을에 핀 하얀 꽃이 진 후 맺게 된 녹색의 열매가 다음 해 가을 하얀 꽃이 새로 피어난 후 갈색으로 익어가는 차(茶) 열매를 말하는 거였다. 이렇게 찻잎과 뱀의 존재를 각인시킨 그리스 신화는 뱀이 조그마한 틈만 있으면 언제든 그 틈으로 드나들 수 있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차(茶)를 보관하거나 운송하는 사람들은 고온(高溫)과 다습(多濕)과 함께 뱀을 가장 경계했었다. 이런 뱀을 퇴치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주사(朱砂; cinnarbar)는 그러나 대단히 귀한 광물(鑛物)이어서 아무 데서나 쉽게 발견해 캘 수 있는 광물이 아니었다. 그런 희귀한 주사(朱砂) 광산이 러시아 알타이 서쪽 지역에 있는 악타시(Aktasy)에서 발견된 것은 필연이었다. 천산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이 유라시아 대륙의 중간에 위치해 대륙의 동서를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천산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동쪽에 있는 알타이 산맥이 일찍부터 동서 교역로(交易路)의 길목으로 사용된 건 당연했다. 알타이 산맥 지역 중에서도 특히 동서 교역로로 활발하게 이용되었던 러시아 알타이의 악타시(Aktasy) 지역의 경면주사 광산이 오고 가던 카라반들에 의해 발견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악타시(Aktasy) 주사광산(朱砂鑛山)의 발견과 주사(朱砂)의 활용은 이 지역을 더욱 동서 무역로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했을 뿐 아니라 알타이(altai)라는 지명(地名)의 유래가 되었다. 알타이(Altai)의 알(Al)은 산스크리트어로 막다, 예방하다(to prevent) 또는 꾸미다, 장식하다(to adorn)라는 뜻이고 타이(tai)는 사람과 화물이 내려지고 올려지는 기차역의 승강장(platform) 또는 장비등을 올려놓고 무엇을 하기 위한 단(壇)이나 대(臺)라는 뜻이었다. 알타이(altai)라는 지명은 그곳이 차(茶)를 무역하는 카라반(隊商)들의 중간 기착지였고 그곳에서 카라반들은 차(茶)에 꼬여드는 뱀을 막기 위해 차(茶) 운송마차에 사용할 주사(朱砂)를 마련했고 차(茶) 보관 장소를 주사(朱砂) 가루로 만든 안료로 칠하는 등 꾸미는(to adorn) 작업을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알타이 산맥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하나가 북쪽에 동서로 전개된 러시아 알타이 지역이고 또 하나가 러시아 알타이 서쪽 끝에서 남북으로 뻗은 몽골 알타이 그리고 세 번째가 몽골 알타이 남쪽에서 비스듬히 고비사막 쪽으로 기울어져 전개된 고비 알타다. 그중 차(茶) 관련 작업들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곳은 몽골 알타이 지역의 홉드 애막(Khovd Aimag)이었다. 따라서 이곳에는 당연히 차(茶)를 저장하는 창고로 쓰이는 동굴(洞窟)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동굴에는 뱀을 막기 위한 주칠(朱漆)이 되어 있어야 했다. 아시아 대륙 유일의 구석기시대 암각화(rock painting)가 그려진 호이트 쳉헤르(khoit Tsenkher) 동굴이다. 이 동굴(洞窟)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은 무역로(貿易路)를 지도에 그려보면 몽골에서 오브(Ovoo, Oboo)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된다. 흙으로 높은 언덕을 성처럼 쌓은 후 정상 부분을 평평하게 다지고 그 위에 삼층의 계단식 제단을 쌓아 올린, 우리말로 평양(平壤)인 알탄 오브(Artan Ovoo)가 있는 다링가(Dalinga)에서 호이트 쳉헤르 동굴까지 가는 무역로(貿易路)에는 그 중간에 츠그트 오브(Tsogt Ovoo)가 자리 잡고 있었다. 츠그트 오브(Ovoo)가 기착지(寄着地)와 역참(驛站)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의 전통적인 돌로 만든 제단(祭壇) 또는 신성한 장소를 뜻하는 오브(Ovoo, Oboo)는 주변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돌탑을 높이 쌓아 올리고 그 위로 오방색(五方色)의 명도 높은 물들인 천을 수없이 매달아 멀리서도 잘 보이게 한 육지에서의 등대(燈臺) 역할을 하는 시설물이었다. 고대 유럽에서의 선돌(Menhir), 고대 이집트에서의 오벨리스크(Obelisk)와 같은 길잡이 등대(燈臺) 역할을 한 오브(Ovoo)는 몽골 고원에서는 등대 역할 외에도 차무역(茶貿易)을 하는 캐러반(隊商)들의 무기고 역할도 수행했다.


무릿매(sling) 와 무기고. 알타이시 입구에 있는 돌탑식 Ovoo 출처 위키미디어


인류가 보유한 개인 원거리 무기 중 최강은 활이 아니라 무릿매(sling)였다. 사람의 손으로 던지는 돌팔매가 아니라 투석구(投石具)를 사용해 어른 주먹만 한 돌을 시속 170km 이상의 속도로 100m 넘는 거리까지 날려 목표물을 타격하는 무릿매가 사냥과 싸움터를 좌우했다. 이런 무릿매에서 탄환(彈丸)은 돌이었고 오브(Ovoo)는 이런 무릿매(sling)의 탄환인 돌을 저장한 탄약고였다. 차(茶)를 수송하는 카라반을 대상(隊商)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상인이면서 동시에 전투 군인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데 그들의 오랜 주력 무기는 검(劍)과 무릿매였다. 사격 시 투석구(投石具)의 긴 줄을 팔과 함께 돌려 충분한 원심력을 확보해야 하기에 다소 너른 공간이 필요했던 무릿매와 달리 궁수(弓手)의 몸 앞에 궁수(弓手)의 한 팔을 한껏 뻗을 공간만 있으면 사격이 가능한 활이 사냥과 전쟁터에서 무릿매를 대체한 것은 활시위, 즉 활 줄에 옻칠을 매긴 이후였다. (옻칠이 개발된 것은 기원전 8백 년경 시작된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였다) 우리 민족이 정월대보름에 고을끼리 석전(石戰)을 벌이는 민속(民俗)을 유지해 온 연유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무역로(貿易路)를 누빈 대상(隊商;Caravan)의 원조는 다름 아닌 우리 민족이었다. 우리 민족이 약효를 잃지 않은 즉 산화되지 않은 차(茶)를 도적들에게 뺏기지 않고 대륙의 서쪽으로 온전히 보내기 위해 오브(Ovoo) 같은 역참들을 설치하며 건설한, 동서 차무역로(茶貿易路)가 자리 잡은 땅은 그래서 예맥이라 불렸다. 몽골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기들의 영토를 Aimag [[ɛmək] 애맠이라고 부른다. 애는 예(yue)로서 달(moon)을 뜻하고 맠(mag)은 산스크리트어 marga 로서 ‘길 혹은 경로(path, road, way)’라는 뜻이다. 예맥(Aimag)은 월지족(月氏族; 月支族) 중 월족(月族)이 건설한 차무역로(茶貿易路)들이 있는 땅이란 뜻이었다.


몽골 알타이의 호이트 쳉헤르 동굴은 지하 동굴과는 달리 산중턱에 형성된 동굴이다(좌) 알타미라 동굴벽화(우) 출처 위키미디어


희귀한 주사(朱砂)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우리 민족이 개발한 방법은 경면주사(HgS 황화수은)를 갈아 그 가루들을 기름에 개어 안료(顏料)로 만들어 주사(朱砂)가 필요한 곳에 칠(漆)을 하는 것이었다. 경면주사(鏡面朱砂) 가루가 들어간 안료(顏料)를 돌이나 죽편(竹片)에 칠(漆)을 해 차(茶) 수송마차 주변에 놓으면 그토록 고질(痼疾)이었던 뱀이나 벌레들이 얼씬하지 못했다. 차(茶)를 대량으로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했던 동굴은 특성상 물에 녹는 석회암(Limestone) 지대에 주로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 탄산칼슘(CaCO3)인 석회암(石灰巖)으로 이뤄진 지표면(地表面) 속으로 스며든 빗물(H2O)은 석회암을 녹여 지표면 밑에 빈 공간(cave)을 만들어 냈는데 이런 빗물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CO2)가 녹아있는 약산성 물이었다. 따라서 지표면 밑에 형성된 석회석 동굴에 있는 석회석 즉 탄산칼슘(CaCO3)은 약산성(CO2) 물(H2O)이 들어오면 그 약산성 물과 함께 반응해 탄산수소칼슘(Ca(HCO3) 2)으로 변하면서 동굴 내 수분을 흡수했다. 석회암 지대의 지하 깊은 곳에 생긴 동굴이 아니라 언덕이나 산 위에 생긴 석회암 동굴은 지하 깊숙이 생긴 동굴과 달리 저온과 저습(低濕)한 공간이었다. 이렇게 차(茶)를 대량으로 보관하는 장소에는 조그마한 틈만 있어도 침입해 오는 뱀들을 막기 위해 천장을 비롯 사방 벽면을 진흙으로 발라 틈을 메웠고 그 위에 다시 주사(朱砂) 가루로 만든 안료를 덧칠해 버리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프레스코(fresco) 기법이 만들어진 연유였다. 이런 동굴벽화를 구석기 시대인들의 예술로 또는 장식적(裝飾的)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당시 제작된 동굴벽화들이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입구 부분이 아니라 입구에서 2-30 m 안으로 들어가 빛이 거의 없는 공간에 그려져 있다는 점과 또 높이가 2m나 되는 높고 너른 공간에 그려져 있다는 점등은 이들이 그저 장식적 목적으로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는 걸 증거 한다. 모두 석회암 언덕 위에 위치한 스페인의 알타미라와 프랑스의 라스코, 몽골 알타이의 호이트 쳉헤르 동굴들에 그려진 벽화는 동굴에 저장된 차(茶)와 찻잎을 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었다. 뱀 퇴치용 벽칠(壁漆)을 그림이라는 예술로 승화시킨 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특별함일 게다.


전남 나주의 장고형 고분에 설치된 석실및 주칠된 벽(좌).출처 KBS 역사스페샬. 몽골의 행정구역인 애막(province). 발음이 예맥과 동일하다. 출처 위키미디어


차(茶)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할 만한 동굴이 없는 지역에서는 습기를 잘 빨아들이는 화강암(花崗巖)을 사용해 동굴 같은 저온(低溫) 저습(低濕)의 석실(돌방;石室)을 만들고 뱀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석실의 천정과 벽에 주사(朱砂)로 만든 빨간 안료(顏料)로 칠(漆)을 한 투물루스(Tumulus)를 건설했다. 따라서 수분 흡수를 잘하는 화강암이나 사암(砂巖) 또는 규암(硅巖)들로 석실을 만들고 석실(石室)의 벽과 천장에 빨간 칠(朱漆)을 하는 건 일본 고분(古墳)의 전형적 특징이 아니라 보관 중인 차(茶)를 뱀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우리 민족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과학이었다. 전남 나주(羅州)에 주사 안료로 내부를 칠한 고분(古墳)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나주가 전 세계로 수출되는 차(茶)들이 집산되는 동아시아 최대의 차(茶) 수출항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비록 무덤인 고분(古墳)의 모습으로 발굴된다 하더라도 원래 그 돌로 만든 구조물들은 낮은 습도와 온도로 차(茶)를 최대한 산화(酸化) 없이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한 특수 건조 저온창고로 지어진 것들이었다. 기와의 발명 같은 신기술 개발들로 나무로 지어진 누각(樓閣)들이 지어져 더 이상 차(茶) 보관 창고로 쓰이지 않게 된 그 석조물(고인돌)들은 그래서 왕들의 무덤으로 알맞은 시설이 되었다. 전남 해남의 장고형 고분 또한 나주의 고분과 똑같이 차(茶) 저장 보관 시설로 건설된 특수 건조 저온 창고였다. 그런 특수 창고에 뱀들이 드나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값비싼 경면주사 안료로 천정과 벽면들을 칠(漆) 한 것은 당연했다. 천정과 벽에 빨간 칠(주칠)을 했다고 그것이 일본 고분의 전형적 특징이라며 차산업(茶產業) 역사 그 자체인 우리 민족에게 임나일본부 따위를 들이대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차(茶)를 제대로 관리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주사(朱砂) 안료(顏料)는 따라서 그 생산량과 사용량 그리고 보관량이 호적(戶籍)처럼 별도로 문서로 기록되어 관리되었다. 이렇게 철저히 관리되는 경면주사 안료(顏料)를 동서 무역로상(貿易路上) 중간중간에 역참(驛站)으로 설치된 오브(Ovoo)에서 제공받기 위해서는 특별한 신표(信標)가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부적(符籍)이었다. 부(符)는 관청에서 서로 주고받는 공문서나 명령서를 말하는 것이었고 적(籍)이란 호적에서 보듯 해당 공문서의 발행부터 마지막 폐기까지의 전 과정을 기록해 놓은 문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그 정의(定義)가 명확한 부적(符籍)을 악귀나 잡신을 쫓고 액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중국인들이 오용(誤用) 해 온 것은 그들의 역사 때문이었다. 차무역(茶貿易)에 반드시 필요한 경면주사(鏡面朱砂)를 교부받기 위한 신표로 만들어진 부적을 중국인들이 액과 악귀를 막기 위한 일종의 주구(呪具)로 바꿔 친 것은 그들이 시조(始祖)로 숭앙하는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가 탁록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부터였다. 중국의 동해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차(茶)들이 집산되는 탁록(涿鹿)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패권국이었던 배달국(背達國) 치우(蚩尤) 천왕과 십 년 동안 전쟁한 황제(黃帝)가 마지막에 승리하자 월지족(月氏族; 月支族) 중 지(氏)에 속하는 지나인(支那人)들은 수천 년 동안 염원해 오던 차무역(茶貿易)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탁록(지금의 涿州 일대)의 지배는 중국 동해안 차무역로(茶貿易路)의 장악을 의미했고 차(茶)를 소유하게 된 지나인(支那人)들이 상인(商人;merchant)이 되어 차무역(茶貿易)에 참여한다는 걸 뜻했다. 그때까지 우리 민족의 전 세계적 차산업(茶產業) 경영에 일절 참여하지 못했던 지나인(支那人)들이 탁록을 무력 장악함으로써 차무역(茶貿易)에 한 발을 들이밀게 된 것이었다. 중국의 동해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차(茶)들과 찻잎들은 탁록(涿鹿)과 장가구(张家口)를 거쳐 몽골고원의 아사달(阿斯達)로 보내져 전 세계로 교역되었는데 탁록 지역을 황제(黃帝)가 지휘하는 지나인(支那人)들이 지배함으로써 차산업(茶產業)에 지나인들의 지분(持分)이 처음으로 일부 생겨나게 된 것이었다.


순장 바둑의 9개 화점의 의미는 경면주사 광산과 아사달을 중심으로 연결된 차무역로 중간기지들을 표시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지나인(支那人)들의 차산업(茶產業)에의 참여가 반역과 살육을 동반한 전쟁을 통해 이루어져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지나인들은 차무역(茶貿易)에 참가하고부터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필수재(必須財), 공공재(公共財)인 찻잎과 차(茶)를 집요하게 자신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켜 갔다. 그에 대해 사람들이 저주(咀呪)를 퍼부은 것은 당연했다. 그 벌(罰)은 급성 전염병인 역병(疫病)이었다. 전염병으로 수많은 지나인들이 참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동짓날 팥죽을 끓여 먹는 목적이 역귀(疫鬼)를 쫓으려는 것인데 역귀(疫鬼)는 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이었다. 중국 역사상 이런 역병(疫病)을 일으키는 역귀(疫鬼)는 둘이 있었는데 그 하나가 황제의 손자 전욱(顓頊)과 그의 아들들이었다. 전욱은 죽은 후 요괴가 되었고 그의 자손들 중 망량귀(魍魎鬼), 학귀(瘧鬼), 소아귀(小兒鬼) 등은 전염병을 일으키는 역귀가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선양(禪讓)으로 유명한 요(堯) 임금 때 하천(河川) 관리를 맡았던 공공(共工)의 아들이었다. 황제헌원은 중국 동해 연안으로 들어오는 찻잎과 차(茶)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을 아사달(阿斯達)로 보내는 탁록(涿鹿) 지역을 십 년 전쟁 끝에 배달국(背達國)으로부터 빼앗았고 그 이후 공공재(公共財)인 차(茶)를 돈 버는 상품으로 전락시켰다. 그 죄로 그의 손자(3세) 전욱고양(顓頊高陽)과 증손자(4세)들은 전염병을 퍼뜨리는 역귀(疫鬼)가 되었다. 공공(共工)은 요(堯) 임금이 다스리던 시절 물관리를 맡은 관리였는데 몽골 고원을 지나는 동서교역로를 중국으로 뺏어오려는 요(堯) 임금의 흉계를 실현하기 위해 둑을 쌓아 황하의 물줄기를 인위적으로 바꾼 사람이었다. 그 죄로 팥을 두려워했던 그의 아들은 전염병을 퍼뜨리는 역귀(疫鬼)가 되었다. 중국인들이 뱀을 내치는데 필요한 주사(朱砂)를 교부(交付) 받는 신표(信標)로 사용되어 온 부적(符籍)을 역귀(疫鬼)를 내치는 주구(呪具)로 바꿔치기 한 연유였다,



탁록(涿鹿) 지역을 점령해 차무역로(茶貿易路)를 운영하는 경험을 갖게 된 지나인(支那人)들은 차무역로(茶貿易路)를 관장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이익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지 체험하게 되었다. 십 년 전쟁의 모진 고생 끝에 얻어낸 동해안 차무역로(茶貿易路)가 가져다준 일확천금의 달콤한 경험은 지나인(支那人)들에게 전쟁을 통해 번영을 누리는 병영국가(兵營國家)로 나아가게 했고 결국 병영국가를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하게 해주는 제국(帝國)의 길로 달려가게 했다. 제국(帝國)의 제(帝) 자가 차(茶)를 피륙(巾:아직 끊지 아니한 베, 무명, 비단 따위의 천)과 바꾸는 곳이라는 뜻의 시(市)를 내리누르고 올라 선(立) 모습으로 상형 된 연유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 요(堯) 임금을 황제헌원의 5 세손으로 기록했다. 황제헌원(黃帝軒轅)은 누에고치에서 실이 나온다는 걸 발견한 누죠(嫘祖)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의 제위(帝位)는 그 두 아들인 현효(玄囂; 소호少昊)와 창의(昌意)가 낳은 아들들에게 번갈아 이어졌다. 요(堯) 임금은 황제의 큰아들 현효(玄囂; 소호少昊)의 4세(世)로 제위를 이었다. 황제헌원의 4대손(代孫)으로 제위에 오른 방훈(放勳)은 요(堯) 임금이라 불렸는데 그 이유는 그가 엄청난 규모의 언제 공사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황하의 물줄기를 바꾸기 위해 황하의 본래 물줄기를 막는 언제(堰堤) 공사를 했기에 그는 제요(帝堯)라 불렸다. 요(堯)라는 글자를 파자하면 흙을 높이 쌓아 우뚝하다는 뜻(垚(흙 높을 요) + 兀(우뚝할 올)이었고 이는 요(堯) 임금이 중국지역과는 전혀 상관없이 몽골 고원 지역에서만 설치되어 운영되는 대륙의 동서 차무역로(茶貿易路)를 중국 역내(域內)로 가져오기 위한 거대한 음모를 실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배달국(背達國)으로부터 탁록(涿鹿)의 차무역로(茶貿易路)를 전쟁을 통해 빼앗은 황제헌원의 고손자(高孫子)인 방훈(放勳)은 차무역로(茶貿易路)가 가져다주는 엄청난 이윤에 주목했다. 늘 가난에 찌들어 사는 중국이 몽골고원처럼 살 수 있는 길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 했던 것 같은 차무역로(茶貿易路)의 확보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모든 국력을 기울여 차무역로를 몽골고원으로부터 중국으로 옮겨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나갔다.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상대로 벌였던 전쟁을 택하기에는 배달국(背達國)은 너무 멀리 북쪽에 있었다. 게다가 탁록(涿鹿) 같은 작은 영역을 뺏는데도 십 년이나 걸린 전쟁을 치러야 했는데 몽골고원 전체를 빼앗는 전쟁은 도대체 몇 년이 소요될지 가늠조차 불가능했다. 그래서 요(堯) 임금이 선택한 건 황하(黃河)의 물줄기를 바꾸는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점점 추워지는 기후변화로 몽골고원의 유일한 젖줄이 되어가는 황하(黃河)를 틀어막아 얼어가는 시베리아와 아블로노비, 샤안, 알타이 산맥 등으로부터 더는 충분한 물을 공급받을 수 없는 몽골고원을 확실하게 물 없는 곳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물 없는 곳에 사람들은 살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는 무역로(貿易路)를 유지할 수 없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사람이 없는 곳에 시장(市場)이 생겨날 수는 없는 법, 시장(市場)이 없으면 무역로(貿易路) 또한 없어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황하(黃河)를 막아 물줄기를 바꾸는 중국 역사(歷史) 이래로 최대의 역사(役事)가 시작되었다. 이 역사(役事)를 요임금은 후일 이 공사(工事)를 성공시켰다 해서 공공(共工)으로 이름 지어진 자에게 맡겼다. 황하(黃河)의 물줄기를 막고 다른 곳으로 돌려 몽골고원으로는 단 한 방울의 황하 물을 보내지 않게 할 장소로 선정된 곳은 지금의 중위(中衞)였다. 중국을 보위(保衞)하고 도모(圖謀)하는 곳이라는 뜻의 중위(中衞)가 이 지역의 이름이 된 것은 바로 이 지역에 쌓아 올린 거대한 언제(堰堤)때문이었다. 요임금이 즉위하던 기원전 2380년대는 불새 신화가 말해주듯 5백 년마다 추워지고 더워지는 기후 변화 순환을 이어 온 지구(地球)가 추워지는 주기로 접어든 때였다. 매머드(mammoth)가 살던 시절 지금 시베리아의 영구 동토(凍土)는 풀이 자라는 스텝지역이었고 따라서 지금은 꽁꽁 얼어있는 알타이와 항가이(Khangai), 사얀산맥들의 물줄기는 강이 되어 몽골고원으로 흘러갔다. 이렇게 시베리아로부터 흘러내린 물은 지금의 감숙성 하서회랑 북쪽에 있는 고비사막에 모두 모여들어 패해(悖海; 背海; 浿海; 발해; 渤海)를 만들었다. 기후온난화가 정점에 다다를 때면 패해(悖海; 背海; 浿海; 발해; 渤海)는 돈황(燉煌)까지 찰랑거리는 물결로 덮었을 정도로 큰 호수(湖水)였다. 하서주랑((河西走廊)의 한가운데에 있는 장액(張掖) 북쪽의 고비사막 북변에 지금은 조그맣게 남아있는 거연해(居延海)의 존재는 패해(悖海; 背海; 浿海; 발해; 渤海)가 우쩍 일어선(勃) 바다 같은 호수(湖水)였다는 걸 알게 해 준다.


판축으로 올린 성벽. 출처 KBS 다큐


시베리아가 매머드(mammoth)가 살던 스텝지역일 때부터 존재했던 패해(悖海; 背海; 浿海; 발해; 渤海)는 시베리아에서 흘러나와 몽골고원을 적시는 모든 물줄기들의 종착지였다. 황하 역시 이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강이었는데 그 흘러 들어가는 입구가 중위(中衞) 지역이었다. 또다시 시작된 기후 한랭화 시대에 시베리아는 얼어붙기 시작했고 몽골 고원으로 내려가는 물줄기들은 줄어들고 가늘어졌다. 몽골고원 곳곳에서 물부족 사태로 혼란이 야기되고 있었다. 이때 몽골고원의 유일한 물줄기가 되어가고 있던 황하(黃河)를 몽골고원의 저수지인 패해(悖海; 背海; 浿海; 발해; 渤海)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엄청난 제방(堤防)공사가 중위(中衞) 서남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흙을 쌓아 올리는 기존의 공법(工法)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패해(悖海;발해)와 황하(黃河)를 분리시키는 언제(堰堤) 공사에 새로운 공법이 개발되어 적용되었다. 판축(版築, Rammed earth) 공법이었다. 둑을 쌓아야 하는 구간에 미리 나무로 만든 벽(木壁)을 양쪽으로 세운 뒤 그 나무벽(木壁) 사이로 흙을 넣고 다진 후 그 위에 다시 흙을 넣고 또다시 다져나가(共工) 둑을 쌓아 올리는 공법이었다. 나무벽(木壁) 안에 일정 높이로 흙을 넣은 후 다짐판(工)으로 다지고 압축시켜 단단하게 만든 후 그 위에 다시 일정 높이의 흙을 부은 후 또다시 다짐판(工)으로 다지고 압축시키는 과정(共)을 반복해 목표 높이까지 둑을 쌓아나가는 방법이었다. 지금은 판축(版築)이라 부르는 이 공법(工法)을 당시에는 일하는 방법이자 모습을 그대로 문자로 상형해 공공(共工)이라 불렀고 이 방법으로 둑을 쌓아 물관리하는 관직(官職)도 공공(共工)이라 불렀다. 모래, 자갈, 점토들을 흙과 함께 섞어 긴압(緊壓)하면 흙벽도 돌처럼 단단해진다는 사실도 알아냈는데 이로부터 벽돌이란 말이 생겨났다. 흙에 모래, 점토(粘土)들을 섞어 다지면 돌처럼 단단해진다는 사실의 발견은 점토(粘土)로 만들어 질그릇이지만 잘 깨지지 않는 도기(陶器)의 제작으로 발전했다. 이렇게 돌처럼 단단한 흙그릇 도기(陶器)를 만들어냈다고 하여 또한 흙을 층층이 다지고 긴압(緊壓)하여 제방(堤防)을 쌓았다고 하여 요임금은 제요(帝堯) 도당(陶唐)이라 불렸다, 질그릇 도(陶) 자는 그 금문을 보게 되면 다짐판으로 흙을 긴압(緊壓)하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나라 국호로 널리 알려진 당(唐) 자도 원래 둑, 제방(堤防)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였다.


판축으로 둑을 쌓게 되면 지어진 모습이 공(共)자 모양처럼 단마다 돗자리같은 풀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다. 출처 KBS 다큐


몽골고원에 건설된 동서(東西) 차무역로(茶貿易路)를 중국 지역 내로 옮겨놓겠다는 요(堯) 임금 결단의 중요한 토대(土臺)는 도기(陶器) 제작 기술과 경면주사(鏡面朱砂;황화수은; HgS)의 확보였다. 몽골고원보다 남쪽에 위치한 중국은 습(濕)했고 더웠다. 운송도중 차(茶)들은 중국의 높은 습도와 온도로 산화(酸化)가 진행되었고 이렇게 항산화효소인 폴리페놀(polyphenol)이 산화(酸化)된 채 대륙의 서쪽에 도착한 차(茶)들은 염증을 예방하는 약효를 내지 못했다. 몽골고원이 차무역(茶貿易)을 하는 카라반(대상)들로 붐비는 모습을 중국이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연유였고 BC 2598년 황제헌원이 배달국(背達國)으로부터 중국 동해안으로 들어오는 차(茶)들의 무역권(貿易權)을 빼앗아 온 뒤에도 그 차(茶) 들을 이용해 중국을 통과하는 자체적인 차무역로(茶貿易路)를 만들어내지 못한 연유였다. 점토(粘土)와 불을 사용한 도기(陶器)의 제작은 몽골고원보다 덥고 습한 중국 지역에서 차(茶)의 산화(酸化)를 지연시켜 주는 역할을 했고 경면주사(鏡面朱砂)는 운송과 보관 중인 차(茶)에 극심한 피해를 주는 뱀의 침입을 퇴치해 주었다. 지나인(支那人)들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꾼 중국 내 차무역로(茶貿易路)의 건설을 가능케 한 도기(陶器) 제작 기술은 흙을 쌓아 올려 황하와 패해(悖海; 背海; 浿海; 발해; 渤海)의 물을 동시에 막아야 했던 고난도의 물막이 공사를 성공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탄생했지만 또 다른 성공 요인인 경면주사(鏡面朱砂)의 확보는 그 경로가 완전히 달랐다. 몽골고원 북쪽 알타이 산맥에서만 나는 경면주사(鏡面朱砂)를 확보해 중국으로 가져오고 이를 차무역로(茶貿易路) 건설에 사용한 이는 요(堯) 임금의 장자로 첫 번째 제위계승권(繼承權)을 갖고 있던 단주(丹朱)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경면주사(鏡面朱砂)를 알타이 산맥으로부터 중국으로 가져와 이를 안료(顏料)로 만들어 차(茶) 운송마차와 차(茶) 저장창고에 뱀퇴치용으로 사용한 최초의 지나인(支那人)이었다. 당시 청금석(靑金石;Lapis lazuli)과 더불어 최고의 전략물자로 대외유출이 철저히 금지되었던 알타이 산맥에 있는 악타쉬(Aktash) 적관(赤關; Red Gate) 광산에서 채굴(採掘)된 주사(朱砂)를 중국으로 가져왔다는 것은 단주(丹朱)가 황제(黃帝) 이후 적대국이 된 배달국(背達國)과의 관계개선에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거다.


차무역로(茶貿易路)의 중국 내 건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차(茶)를 운반하는 상인(merchant)들인 카라반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한 요(堯) 임금은 그들이 가장 먼저 요구하고 있는 주사(朱砂)를 확보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역로(貿易路) 곳곳의 중간기착지에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주사(朱砂)를 줄 수 있느냐가 차무역로(茶貿易路) 건설의 성패를 쥐고 있었다. 요(堯) 임금의 장자였던 단주(丹朱)가 그 일을 맡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주사 확보를 위해 배달국(背達國)으로 들어간 단주(丹朱)는 황제헌원의 탁록전쟁 이후 적대관계에 놓여있던 배달국(背達國)과 지나국(支那國)의 관계를 서로의 이익을 해치는 지혜롭지 못한 관계라며 관계정상화를 요청했다. 황제헌원의 전쟁도발은 잘못된 일이나 그 원인은 지나인(支那人)들에게 차무역(茶貿易)에서 나오는 이익을 나눠주지 않았던 배달국의 욕심 때문이라는 점을 함께 지적한 단주(丹朱)의 주장에 배달국(背達國) 거불단(居弗檀) 환웅(桓雄)은 동의했다. 거불단 환웅은 추워지는 기후 변화가 향후 최소 오 백 년 동안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 역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점점 그 지리적(地理的) 중요도가 높아질 남방을 차지하고 있는 지나인(支那人)들과 호혜(互惠)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배달국(背達國) 장래에 중요하다는 걸 내부의 사람들에게 설득하면서 거불단 환웅은 단주(丹朱)가 요구한 주사 (朱砂) 무역을 허락했다. 양국의 호혜(互惠) 관계 유지를 단주(丹朱)가 지나 국(支那國)의 왕위 제일계승권자 자격으로 배달국(背達國) 조야(朝野)에 맹세하면서 요(堯) 임금이 그토록 바라던 주사(朱砂)는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흙에 모래와 진흙을 넣어 다져 돌처럼 단단하게 쌓아 올리는 판축법(板築法)이 개발되어 중위(中衞)의 둑공사가 성공적으로 완결되고 진흙(粘土;점토)을 이용한 도기(陶器)까지 개발되면서 그러나 단주(丹朱)가 맹세한 배달국과의 호혜관계는 위협받게 되었다. 처음부터 배달국(背達國)의 차무역로(茶貿易路)를 뺏으려 주사(朱砂)가 필요했던 요(堯) 임금이 본색을 드러내자 줄곧 배달국과의 호혜협력을 주장하던 단주는 큰 위험에 봉착하게 되었다. 요(堯) 임금은 장자인 단주(丹朱)에게 제위(帝位)를 이어받기 위해서는 배달국의 국가기밀인 배달국내 주사광산(朱砂鑛山) 위치와 차무역로의 역참(驛站) 역할을 하는 중간 기지들인 오브(Ovoo, Oboo)의 위치를 밝히라고 명령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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