堯造圍棋 丹朱善之 요임금이 바둑을 만들었고, 단주가 그것을 잘했다 - 장화(張華, 기원후 232-300)의 박물지(博物志) 중에서
堯舜以敎愚子也 요와 순 임금이 이것으로 어리석은 아들을 가르쳤다. - 저자미상 중흥서(中興書) 중에서
禹曰兪哉…無若丹朱傲 惟慢遊是好 傲虐是作 罔晝夜頟頟 罔水行舟 朋淫于家 用殄厥世 우왈 그렇습니다… 단주처럼 오만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만 좋아하고 오만하고 포악한 짓만 하여 밤낮없이 액액하며 물이 없는 곳에다가 배를 띄우며 떼를 지어 집에서 음탕하게 놀아 그의 후손도 끊기고 말았습니다. - 서경(書經) 익직(益稷) 중에서
요(堯) 임금이 단주(丹朱)에게 배달국(背達國)에 있는 주사광산(朱砂鑛山) 위치와 차무역로(茶貿易路)의 중간기지(中間基地) 역참(驛站)인 오브(Ovoo, Oboo)와 바얀(Bayan)들의 위치를 표시해 바치라고 명령하면서 준 것은 정방형(正方形)의 격자(格子)들이 새겨진 석판(石板)이었다. 배달국 사람들이 바둑(Badug/Vadug)이라고 부르는 판(版)이었다. 가로 세로 길이가 동일한 정방형(正方形)의 판(板) 위에 한 칸에 18개의 정방형 격자가 들어있는 총 18개의 칸이 그려진, 총 324개의 격자로 이루어진 판(版)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가로와 세로 각각 19줄의 선이 등간격으로 평행하게 교차하여 361개의 교차점이 그려져 있는 판(版)이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바둑판(碁局)과는 달리 테두리의 줄에는 착점(着點)이 불가능한 즉, 바둑돌을 놓을 수 없게 되어 있는 판(版)이라는 점이었다. 전한(前漢) 경제(景帝: 재위 기원전 157-141)의 능(陵)에서 부장품(副葬品)으로 출토되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국(棋局;바둑판)으로 알려진 가로 세로 17줄 바둑판도 테두리 줄에는 바둑돌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여유 공간이 전혀 없이 만들어져 있었다. 백제 의자왕(義慈王)이 서기 645년 고구려에게 패한 당나라의 일본 찻잎 금수조치(禁輸措置)를 계속 따라야 한다는 소가노 이루카(蘇我 入鹿)를 암살하고 일본 찻잎의 수출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한 일본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 鎌足)에게 백제의 해상무역망(海上貿易網)을 과시해 일본 찻잎을 독점수입하기 위해 보낸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의 테두리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목화자단기국에는 우리 민족의 고유 바둑인 순장(循牆) 바둑처럼 17개의 화점(花點)이 표시되어 있었다. (순장바둑에서는 화점이라 하지 않고 순장(順將)이라 부르는 16개의 점과 바둑판 한가운데 천원(天元)이라 부르는 점(點)이 그려져 있다)
가로와 세로 각각 19줄의 선이 등간격으로 평행하게 교차하여 361개의 교차점이 그려져 있는 판 위에 흑과 백으로 나뉜 돌들을 서로 교차점에 번갈아가며 놓아 더 이상 돌을 놓을 교차점이 없을 때까지 둔 후 같은 색깔의 돌들로 네 개의 격자가 둘러싸인 교차점을 한집이라고 계산해 집이 많은 쪽이 이기는 이 놀이를 바둑이라고 부른 건 요(堯) 임금 때부터라고 그래서 바둑이란 놀이를 처음 세상에 알린 건 중국이라고 배워 왔지만 지금 발굴되어 현존하고 있는 고대(古代)의 바둑판을 보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한(漢) 나라와 수당(隋唐) 시대의 것으로 판정된 바둑판들에는 테두리 줄에 돌을 놓을 공간이 없었고 이로 보아 교차점에 돌을 놓아 진행하는 규칙이 처음부터 제정되어 시행된 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발견된 고대(古代) 중국의 바둑판(棊)들이 15줄과 17줄, 19줄로 제각각이란 점도 바둑이 요(堯) 임금 때 이미 어떤 분명한 규칙을 가지고 이루어진 놀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해 준다. 결국 바둑은 요(堯) 임금이 개발한 놀이가 아니며 배달국(背達國)에서도 놀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지나인(支那人)들에게 바둑이라는 것이 알려진 것은 주사(朱砂) 무역을 성공시켜 요(堯) 임금이 그토록 바라던 주사(朱砂)를 가져온 단주(丹朱)가 그들과 함께 배달국(背達國)에서 가져온 석판(石版)때문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행해지는 놀이가 아니었다. 놀이로 만들어진 역사가 요(堯) 임금 때라면 4500년이 다 되어가는 놀이임에도 한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베트남과 티베트 사람들만이 공유해 온 놀이였다. 게다가 티베트와 베트남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놀이였다. 그래서인가 역사가 이토록 오래된 바둑은 요(堯) 임금이 정했다는 진행 규칙을 지키지 않고 나라마다 제각각이었다. 결국 바둑은 요(堯) 임금이 만든 놀이가 아니었다. 놀이로 하는 바둑의 규칙은 나라마다 제각각 달랐지만 그러나 바둑에 대한 명칭은 같았다. 비록 민족마다 자신들의 언어로 부르는 이름은 달랐지만 그 뜻은 배달족(背達族)이 바둑이라고 부른 처음의 뜻을 지나인(支那人)들만 빼고 모두 그대로 따랐다. 우리가 바둑이라고 하는 것을 지나인(支那人)들은 웨이치(圍碁)라 야마토 사람들은 고(ご)라고 불렀다. 베트남인들은 코바이(co vay)라고 했고 티베트사람들은 믹망(mig mang)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을 통해 바둑을 알게 된 서양인들이 바둑을 고(go)라고 하는 건 당연했다. 이세돌 기사와 대국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이름이 알파고(Alpha Go)인 연유였다. 이들 다섯 동아시아 민족들이 바둑을 부르는 호칭을 산스크리트어로 분석해 보면 지나인(支那人)들의 웨이치라는 이름만 궤를 달리할 뿐 나머지 네 민족의 바둑에 대한 호칭은 모두 같은 뜻이었다. 바둑(VaDug)을 산스크리트어로 풀면 파낸 것(excavate)을 퍼트리다(diffuse, spread)였다. 어디에 위치한 주사광산(朱砂鑛山)에서 파낸 경면주사를 어디 어디에다 퍼트렸는지 표시하라는 요(堯) 임금의 명령(命令)을 정확히 보여주는 이름이었다. 바둑(Va Dug)의 바(Va)는 산스크리트어로 퍼뜨리다, 뿌리다는 뜻이고 둑(Dug)은 파다, 파내다, 발굴하다란 뜻이다. 또한 산스크리트어로 바(Va)는 그냥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경유지(經由地;stopover)가 아니라 일정기간을 거주할 수 있는 거주지(居住地 ;residence)라는 뜻이었다.
차(茶)를 낙타(駱駝)와 말등에 실어 대륙의 서쪽을 향해 길을 떠난 카라반(Caravan;隊商)들이 무역로(貿易路) 중간에 설치된 역참(驛站)들 중 하나에 반드시 거주(居住) 해야 하는 이유는 먹을 것과 물을 확보하면서 그동안의 여정(旅程)에 소진(消盡)된 사람들과 동물들의 몸을 추스르고 아직 남아있는 여정(旅程)에 다시 나설 수 있는 힘을 비축하기 위함이었고 뱀을 막아줄 경면주사(鏡面朱砂)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여러 역참(驛站)들 중에서 어떤 역참에서 일정 기간 거주할 수 있는지 또한 주사(朱砂)를 구매할 수 있는지 미리 아는 것은 카라반(caravan; 隊商)들에겐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작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의 낙타와 말 그리고 수레가 하나의 대오(隊伍)를 이뤄 이동하는 카라반들이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여러 날을 머무른다는 것은 보통의 마을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백의 낙타(駱駝)와 말 그리고 상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그리고 카라반이 운송 중인 차(茶)를 보관할 수 있는 특수한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는 특별한 고을이어야만 했다. 이런 특별한 바(Va)가 무역로(貿易路) 상에 충분히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카라반(隊商)들이 여러 무역로(貿易路)중 어떤 무역로(貿易路)를 선택하느냐는 것에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사안(事案)이었다. 몽골 고원에 바얀(Bayan)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을이 많이 있는 연유였다.
바(Ba=Va)가 사람뿐만 아니라 낙타와 말들을 위한 거주 시설(residence)이 제공되고 주사(朱砂)가 보급(spread)되는 곳이라는 뜻이었다면 옌 또는 얀(yan)은 말과 낙타(駱駝), 수레들 같은 운송수단(vehicle)을 제공하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대륙의 서쪽으로 가는 긴 여정(旅程) 동안 차(茶)를 싣고 가는 낙타와 말 그리고 수레는 손상이 가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반드시 새로운 말과 낙타, 수레들이 보충되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와 같은 카라반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곳이 옌(Yan; 燕)이었다. 주무왕(周武王)이 너무 일찍 죽어 야기된 혼란한 정국을 주공(公) 단(旦)과 함께 안정시킨 소공(召公) 석(奭)이 그 공로로 받은 봉토가 황제헌원이 배달국으로부터 뺏은 탁록(涿鹿) 지역이었는데 이 탁록지역은 바다를 통해 배를 타고 중국 동해 연안으로 상륙한 차상인(茶商人; merchant)들이 배에서 내린 찻잎들을 낙타와 말들이 끄는 수레에 옮겨 싣고 아사달로 떠나는 출발지역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을 고대로부터 옌(Yan; 燕)이라고 부른 연유였다. 지금 중국의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와 숙천(宿迁) 사이에 있는 호수가 낙마호(駱馬湖)라 불리는 연유이기도 했다. 연(燕)이란 지역은 대륙의 서쪽을 가기 위해 중국지역을 통과해야 했던 차상인(茶商人)들에게 낙타(駱駝)와 말, 수레 같은 운송수단들을 제공하는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야마토인들이 바둑을 고(ご; Go)라고 하는 연유는 바둑의 바(Va:Ba) 자가 거주지(居住地; dwelling, residence)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륙의 동서를 가로지르며 나아가야 했던 카라반들은 거친 들판에서 수백 마리의 낙타와 말들과 함께 야영(野營)으로 숙식(宿食)을 해결해야 했고 그래서 무역로(貿易路) 중간에 설치된 특별한 역참(驛站)에서 반드시 휴식과 물자 보충을 해야만 했다. 이런 특별한 시설들이 있는 곳을 바(Va, Ba; 居住地)라고 했고 바(Va; 居住地)의 위치를 표시한 바둑을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말로 거(居)를 뜻하는 고(ご; Go; 居)라 부른 것은 당연했다.
베트남인들이 바둑을 코바이(co vay)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 민족과 야마토인들 모두와 차무역(茶貿易)으로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코바이에서 코는 일본인들이 바둑을 고(ご; Go; 居)라고 부르는 것에서 따온 것이고 바이(Vay)는 우리 민족이 바(Va)둑이라고 부른 것에서 따온 것이다. 해상무역(海上貿易)으로 우리 민족과 야마토 일본에 각각 연결되어 있던 베트남인들의 역사를 짐작케 하는 이름이다. 또한 베트남 사람들이 바둑을 부를 때 파내다란 뜻의 둑(dug)과 운송수단을 뜻하는 옌(yan)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거주를 뜻하는 코(Co)와 바이(Va)로만 조합해 부른 이유는 그들에게는 주사(朱砂) 광산이 없었기 때문이고 차무역선(茶貿易船)으로 쓰이는 원양무역선(遠洋貿易船)을 조선(造船)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무역(茶貿易)이 배로 이뤄지는 해상무역(海上貿易)의 특성상 나라 자체가 차상인(茶商人)들이 물과 먹을 것을 보급받기 위해 일정기간 거주해야 하는 거주지 역할만을 했기 때문에 베트남인들은 주사광산과 운송수단을 뜻하는 단어들 없이 거주만을 뜻하는 단어들로만 조합해 코바이(CoVay)라고 바둑을 불렀다. 티베트인들이 바둑을 가리킬 때 부르는 믹망(Mig Mang)이라는 말은 바둑이 뭘 의미하는지 가장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이름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믹(Mig)은 12개의 활동지(twelve activity fields)를 뜻하고 망(Mang)은 경로(path), 길(road, way)을 뜻했다. 믹(Mig)은 산스크리트어로 또한 요구하다(request, demand)라는 뜻을 가져 역참(驛站)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주고 있었다. 이것은 티베트인들에게 바둑은 놀이가 아니라 12개의 역참(驛站)들이 이리 저리로 서로 조합되어 연결된 무역로라는 것을 의미했다. 바둑은 무역로상(貿易路上)에서 차무역상(茶貿易商; 카라반)들을 위한 거주시설과 보관시설을 갖추고 주사(朱砂)와 낙타, 말, 수레 같은 특수 물자를 보급해 줄 수 있는 역참들을 나타낸 지도(地圖)를 말하는 고유명사였다. 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침대에 누워 우연히 천정에 붙어있던 파리(fly)를 보고 어떤 사물의 위치를 정확히 표시하는 방법으로 착안해 좌표평면(Coordinate Plane)을 방법서설(方法序說)이란 책에 소개한 것이 1637년이었다. 좌표평면(座標平面) 위의 어떤 값들의 관계를 점이나 선으로 표시한 것을 해도(graph)라고 하는데 사실 데카르트의 좌표평면은 식민지 획득을 위한 바다 위 뱃길을 표시하기 위한 해도(海圖; chart) 작성을 위한 것이었다. 진짜 영국인일리가 없는 아담 스미스처럼 진짜 프랑스인일리 없는 데카르트의 좌표평면은 명백한 바둑의 카피(copy)였다.
지나인(支那人)들이 바둑을 웨이치(圍碁)라고 하는 것은 언뜻 보면 바둑을 두는 규칙에 의거한 명칭일 뿐인 것 같으나 실상은 달랐다. 바둑이 차무역로(茶貿易路) 상의 카라반(隊商)들만을 위한 특수 시설들이 갖춰진 역참(驛站)들을 표시한 지도였기에 바둑돌(碁)이 놓인 곳은 카라반들을 위한 역참들이 설치되어 있는 곳을 뜻했다. 바둑돌을 나타내는 기(碁) 자가 실은 그 지역에서 제일 높은 지대(地帶)에 목책(木柵)을 치고 층층이 흙을 쌓아 올려 만든 방어시설(城)이 있는 기지(基地)를 뜻했고 둘러싸는 바둑의 규칙을 나타내는 듯한 위(圍) 자는 그 기지 안에 거주하고 있는 월지인(月氏人)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월지인(月氏人)들은 목지국(目支國)이라 왜곡시킨 우리나라 충남(忠南)의 직산(稷山)에 터 잡았던 월지국(月支國)을 건국했던 사람들이었다. 더 멀리는 루왜은조리산(月山)에서 마고(麻姑), 궁희(穹姬), 소희(巢姬) 삼신(三神)할매의 자손으로 살다 생명의 나무인 차(茶) 나무를 찾아 달의 산(月山)의 북쪽으로 떠난, 배달(背達)한 사람들이다. 우리나라를 달의 산(月山)에서 왔다 하여 달 월(月) 자가 들어간 조선(朝鮮)이라 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월지인(月氏人)들은 마고족(麻姑族), 궁희(穹姬) 소생의 두 부족 그리고 소희(巢姬) 소생의 두 부족하여 총 5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배달(背達)한 이후에도 동서 차무역(茶貿易)을 주관하며 대륙의 모든 곳을 선도하고 있었다.
한(漢) 나라 유방과 밀계(密契)한 흉노 묵특선우에 쫓겨 박트리아와 간다라로 들어가기 전 한양(漢陽)이라 부르던 지금의 천수(天水)를 도읍으로 동서 무역(貿易)을 주관하던 월지인(月氏人)들을 반고(班固)는 자신이 찬술(纂述)한 역사책(歷史冊) 한서(漢書)에서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는데 그에 따르면 그들은 Guìshuāng(貴霜), Xīdùn (肸頓), Shuāngmí (雙靡), Xiūmì (休密), Dūmì (都密) 등 다섯 민족(民族)이었다. 그중 미(mi)라는 이름을 마지막에 공통으로 쓰는 세 민족을 우리는 후한(後漢)의 역사가 반고(班固)와는 달리 미족(爾族)이라고 기록했다. 우리 민족이 나라의 수도를 서울이라고 말하고 한자로 쓸 때는 수미(首爾; 首尔)라고 쓰는 연유가 여기에 있고 서왕모(西王母)가 사는 산을 수미산(須彌山)이라고 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들은 후일 관개(灌漑)를 통해 밭(田)을 논(畓)으로 만들어 벼농사를 처음 시작해 묘(苗 Miao)족이라고도 불렸다. 묘족은 항상 삼묘족(三苗族)으로 통칭되는데 그 이유는 미(Mi 爾, 尔, 苗)라는 공통 이름을 함께하는 부족이 세 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한(韓)이 항상 삼한(三韓)으로 불려지는 것과 같은 연유였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로 쳐들어 갈 때 제일 먼저 공격한 성(城)이 임진강과 한강, 예성강과 염하강, 그리고 조강등 무려 5개의 강이 만나는 파주(坡州)에 있던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관미성(關彌城)이었는데 이 성(城)의 이름은 미족(爾族)의 땅에 들어가는 관문(關門)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미족(爾族)은 인류 최초로 가죽 옷을 입은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이었다. 지구라트로 유명한 수메르(Sumer)의 고대 도시 우르(Ur)는 아브라함과 그의 선조가 살았던 도시였다. 수미(首爾)와 발음이 비슷한 수메(Sume)는 산스크리트어로 달(moon)을 뜻했다. 우리 민족을 달(月)의 산에서 배달했다고 조선(朝鮮)이라 하는 것처럼 최초로 가죽(韋)을 무두질해 입었다고 삼한(三韓)이라 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황제헌원과 요(堯) 임금 때의 중국인들을 우리 민족과 달리 월지인(月氏人)이라 하지 않고 지나인(支那人)이라고 부른 이유는 박제상 선생이 부도지(符都誌)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들이 오미(五味)의 변(變)을 일으켜 달의 산에서 추방되었고 이후 다시 돌아와 큰 혼란을 일으켜 결국 모든 사람들을 달의 산에서 떠나게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소씨(支巢氏) 사람들이었다.
배달국(背達國)에 있는 주사광산(朱砂鑛山) 위치와 차무역로(茶貿易路)의 중간기지(中間基地) 역참(驛站)인 오브(Ovoo, Oboo)와 바얀(Bayan)들의 위치를 표시해 바치라는 요(堯) 임금의 명령을 단주(丹朱)는 무시했다. 판 위에 표시하라는 위치는 표시하지 않은 채 즉 바둑 하는 위치들을 표시하지 않은 채 흰돌과 검은 돌을 마련해 오늘날의 바둑을 두어버렸다. 이때가 기원전 2350년경이었다. 바둑은 즉 바둑판은 배달(背達)의 민족이 만든 것이지만 바둑 두는 것은 즉 흰돌과 검은 돌을 사용해 경기하는 것은 단주(丹朱)가 만든 것이었다. 순(舜) 임금으로부터 제위를 선양(禪讓) 받아 후일 하(夏) 왕조를 개창한 우(禹) 임금이 단주(丹朱)가 물이 없는 곳에 배(舟)를 띄우고 놀았다며 힐책했다고 서경(書經)은 기록했다. 요(堯) 임금의 언제(堰堤) 건설로 패해(悖海; 背海; 浿海; 黑海)는 더 이상 중국 쪽에서 배를 띄울 수 있는 호수(湖水)가 아니었다. 중위(中衞)에 건설된 언제(堰堤)는 배달국과 지나국(支那國)을 분리하는 국경선이 되었다. 황하(黃河)가 흘러 들어가던 패해(悖海; 背海; 浿海)는 배달국과 지나국의 사람들이 서로 배를 타고 왕래하는 소중한 바다 같은 호수(湖水)였고 몽골 고원을 동북으로 가로지르며 흐르던 강을 패해(悖海; 背海; 浿海)에서 나온 강이라고 하여 패수(浿水)라 부르며 후오린(Huolin; 霍林河)과 시라무렌(XarMoron; 潢水) 강으로 흐르게 하는 원천이었다. 그러나 중위(中衞)에 제방(堤防)이 쌓아 올려지자 황하는 더 이상 패해(浿海)로 흘러 들어가지 못했고 따라서 패수(浿水)는 후오린강과 시라무렌강으로 흘러가지 못했다. 패해(浿海)는 결국 중국 배들이 뜰 수 없는 호수(湖水)가 되었다. 그렇게 출입해선 안 되는 배달국의 호수에 배를 띄워 그물을 던진 단주(丹朱)는 반국가사범이었다. 단주(丹朱)는 언제(堰堤) 건설로 배를 띄우는 것조차 금지된 패해(浿海)에 배를 띄움으로써 둑 같은 것을 쌓아 배달국과의 호혜협력을 망쳐선 안된다는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했다. 부왕(父王)인 요(堯) 임금의 무역로(貿易路) 도둑질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거였다.
황하(黃河)를 몽골 고원으로 흐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중위(中衞)에 쌓아 올려진 제방(堤防)은 그것을 주장하고 밀어붙인 왕(王)을 흙더미를 쌓았다는 의미로 요(堯)라고 부르게 했고 그렇게 해서 요(堯) 임금이 차지한 땅은 방죽(堤防)이란 뜻의 당(唐)이라고 불렸다. 지금도 그 땅은 섬서성(陝西省)이라고 부르는데 섬서성의 섬(陝) 자는 도둑질한 것을 가졌다는 뜻의 숨길 섬(㚒) 자가 부수인 글자였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지금도 섬서성(陝西省)을 산서성(山西省)과 똑같이 발음한다. 기후 한랭화로 인해 몽골고원을 적시던 강(江)들의 원천인 알타이를 포함한 시베리아의 모든 골짜기의 물줄기들이 얼어붙자 남쪽 몽골 고원으로 유입되던 수량(水量)이 대폭 줄어들었고 황하마저 요(堯) 임금의 제방(堤防) 건설로 패해(浿海)로 유입되지 않자 몽골고원을 가로질러 흐르던 패수(浿水)의 수량(水量)이 대폭 줄어들어 몽골고원은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게 되었다. 원래 매일 한 개씩 돌아가며 하늘로 떠오르게 되어있던 10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떠올라 극심한 가뭄이 들자 요(堯) 임금이 예(羿)에게 부탁해 그중 9개의 태양을 활로 쏴 떨어뜨려 간신히 가뭄을 해결했다는 중국 전설은 이때의 사정을 말하는 이야기였다. 예(羿)가 동시에 떠오른 10개의 태양중 9개의 태양을 화살을 쏘아 떨어뜨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기(史記)에 기록된 9년간의 대홍수가 벌어졌다. 9년 동안 계속되었다던 요(堯) 임금 때의 대홍수는 비가 많이 와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요(堯) 임금 때 공공(共工)이 쌓은 제방(堤防)이 무너져 패해(浿海)의 물과 황하의 물이 범람(氾濫)했기 때문이었다. 홍수(洪水)의 홍(洪) 자가 공공(共工)이 판축으로 켜켜이 쌓은(共) 방죽(堤防)에 물이 넘쳐 들어오는 것을 상형한 글자인 연유였다.
堯曰 誰可順此事 放齊曰 嗣子丹朱開明. 요왈 누가 나의 일을 이어받을 수 있을까? 방제(放齊) 왈 후사인 아들 단주(丹朱)가 사리에 밝고 총명합니다.
堯曰 吁頑凶不用 요왈 아! 완고하고 흉악하여 쓸 수가 없네.
堯又曰 誰可者 讙兜曰 共工旁聚布功 可用. 堯曰 共工善言 其用僻 似恭漫天 不可。 요가 다시 물었다. 누가 괜찮겠는가? 환두(讙兜) 왈 공공(共工)이 사람들을 널리 모아서 많은 업적을 드러냈으니 그가 쓸 만합니다. 요왈 공공은 말은 잘하지만 마음 씀이 바르지 않고 겉으론 공손한 것 같지만 하늘마저 기만했으니 불가하다.
堯又曰 嗟四嶽 湯湯洪水滔天 浩浩懷山襄陵 下民其憂 有能使治者 皆曰鯀可 요우왈 아, 사방의 제후들이여 홍수가 하늘까지 넘쳐서 물줄기가 산을 감싸고 언덕까지 물에 잠겨 백성들의 걱정이 태산인데, 이 홍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없겠소 모두들 곤(鯀)이 할 수 있다고 했다.
堯曰 鯀負命毀族 不可. 요왈 곤은 하늘의 뜻을 어기고 동족을 훼손시켰으니 불가하다.
嶽曰 異哉 試不可用而已. 堯於是聽嶽用鯀. 사방의 제후들 왈 그렇지 않습니다. 시험해 보시고 안 되면 그만두게 하소서. 요는 이에 사방의 제후들의 말을 듣고 곤(鯀)을 기용했다. 九歲 功用不成. 9년이 지나도록 공적을 이루지 못했다. - 사기(史記) 본기(本紀) 오제본기(五帝本紀) 당요(唐堯) 중에서
사기(史記)는 요(堯) 임금이 20세에 제위(帝位)에 올라 70년간 재위(在位) 한 것으로 기록했다. 요(堯) 임금이 재위 50년에 제위(帝位)를 물려주기 위해 후계자를 고르는 와중에 나의 일을 누가 이어갈 것인가 하고 걱정했다고 사기(史記)는 적고 있다. 이때 요(堯) 임금이 언급한 나의 일이란 무너진 제방(堤防)을 다시 쌓아 올려 유지(維持) 보수하고 제방 붕괴(崩壞)로 인해 야기된 대홍수 피해 지역의 복구(復舊)를 말하는 것이었다. 벌써 9년째 계속되고 있는 제방(堤防)의 붕괴와 그로 인한 홍수(洪水)로 당(唐)으로 불리던 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 지역은 초토화되고 있었다. 요(堯) 임금이 누가 이어받을 수 있을까(誰可順此事)라고 스스로 묻는 것으로 보아 요(堯) 임금 자신도 차무역로(茶貿易路)를 배달국(背達國)으로부터 뺏으려는 자신의 정책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주(丹朱)는 황하의 물줄기를 변경시키려는 공사가 가져 올 배달국과의 끝나지 않을 분쟁을 염려했다. 뺏겠다는 지나인(支那人)들의 결심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란 걸 단주(丹朱)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피물며 간(諫)했었다. 후사(後嗣)로 단주(丹朱)를 추천하는 대신(大臣) 방제(放齊)에게 자신의 아들은 고집 불통의 논쟁하는 것만을 좋아하기에 안된다는 답을 줄 만큼 요(堯) 임금은 단주에게 시달렸다. 판축(板築) 공법(工法)을 도입해 중위(中衞)에 제방(堤防)을 쌓는 데 성공하고 그 공으로 이름도 판축(板築)하는 모습을 상형한 공공(共工)이 된 공공(共工)을 추천하는 환두(讙兜)에게 요(堯) 임금은 불가하다 했다. 사람을 널리 모아서 업적을 이루었으나 하늘을 기만했다는 건 많은 백성들을 강제로 부역(負役)에 동원했고 게다가 무리한 공사 강행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자자하다는 걸 의미했다. 게다가 요(堯) 임금이 배달국(背達國)을 적(敵)으로 돌린 이 둑공사를 강행함으로써 중국인들은 그 이후 단 하루도 편하게 살 수 없었다. 만주족이 중국을 침략해 250년 이상을 지배한 것을 마지막으로 일단락된 배달국의 중국 침략은 4200년 동안 계속된 것이었다. 그것 말고도 요(堯) 임금 때 강제로 물줄기를 바꾼 황하가 그 이후 자체로 계속 물줄기를 바꾸는 바람에 중국인들은 그 피해를 복구하고 황하(黃河)의 유역(流域) 관리를 위해 엄청난 돈과 희생을 치러야 했고 노력을 들여야 했다. 황하가 물줄기를 바꾸는 짓을 일단락 한 건 1939년이었다. 곤(鯀)에게 홍수 관리를 맡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9년의 세월이 흐른 후 폐해에 지친 지나인(支那人)들이 요(堯) 임금에 대해 좋은 평가를 했을 리는 만무였다. 요(堯) 임금 당대의 지나인들은 노래를 지어 부르며 노골적인 원망과 야유를 보냈다. 두려움에 떨던 요(堯) 임금이 민심 확인을 위해 저자로 암행을 나와 들은 격양가(擊壤歌)와 강구요(康衢謠)는 치명적이었다.
帝堯之世 天下太和 百姓無事 有八九十老人 擊壤而歌 歌曰 요임금 치세 때 천하가 태평하니 백성들이 무사했다. 팔구십 세 노인이 땅을 치며 노래하는데 가사 왈
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于我何有哉 해 뜨면 일하고 해 가지면 쉰다.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먹으니 제왕의 힘인들 어찌 내게 미치리오. - 동한(東漢) 황보밀(皇甫謐)의 제왕세기(帝王世紀) 중에서
격양가(擊壤歌)는 단순히 땅을 치며 부른 노래가 아니다. 흙으로 쌓아 올린 언덕(壤), 즉 제방(堤防)을 때리며(擊) 부른 노래다. 패해(浿海)와 황하(黃河)를 분리한 제방(堤防)을 치며(擊) 부른 노래다. 격양가(擊壤歌)는 그냥 노인(老人)이 부른 노래가 아니다. 배달국(背達國)과 평생을 교류하며 살아온 8-90세 된 지나인 노인(老人)이 그 교류를 강제로 단절시킨 제방(堤防)을 주먹으로 때리며 부른 노래다. 격양가(擊壤歌)는 요(堯) 임금의 치세가 태평성대라 부른 노래가 아니라 요(堯) 임금이 벌인 제방(堤防) 건설이 평범한 사람들의 생계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 벌인 일임을 고발(告發)하는 노래다. 황하(黃河)의 강물이 패해(浿海)를 통해 몽골 고원으로 빠져나가는 걸 막으면 황하(黃河)를 통해 더 많은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손쉽게 확보해 우물을 파지 않아도 마실 물을 확보할 수 있고 밭에 물을 충분히 관개(灌漑)해 논농사까지 지을 수 있다고 선전했었다. 그런 감언이설로 패해(浿海)와 황하(黃河)를 분리하는 제방(堤防)을 쌓는 그 엄청난 부역(負役)을 하게 해 놓고 막상 그 제방(堤防)이 쌓아 올려져 황하(黃河)가 패해(浿海)로 흘러 들어가는 걸 막았음에도 여전히 우물을 파야 마실 물을 얻을 수 있었고 여전히 논농사가 아닌 밭농사를 지어먹을 걸 해결하는 현실을 야유(揶揄)하는 노래가 격양가였다. 제방(堤防)을 쌓으면 미족(논농사를 지을 수 있어 사람들 생활이 획기적으로 개선된다던 요(堯) 임금의 약속은 허황(虛荒)된 것이었으니 나에게 도움 될 무엇이 더 있겠느냐는 조롱(嘲弄)이었다. 중위(中衞) 지역에 쌓아 올린 제방(堤防)은 황하(黃河)만 막아선 게 아니라 패해(浿海)의 엄청난 물 또한 막은 제방이었다. 아무리 판축(板築) 기법으로 튼튼하게 쌓았다 하더라도 큰 비가 오면 불어난 패해(浿海) 때문에 무너졌고 불어난 황하(黃河) 때문에 넘쳤다. 결국 여기저기서 물난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일찍이 단주(丹朱)가 경고했던 일들이었다.
立我烝民 莫匪爾極 不識不知 順帝之則 우리 백성들을 살게 하는 것은 그대의 지극함 아닌 것이 없다. 느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임금의 법에 따르고 있다.- 강구요(康衢謠) 열자(列子) 중니 편(仲尼編) 중에서
括地誌云 竹書云 昔堯德衰 為舜所囚也 괄지지가 전하기를 옛날 요임금의 덕이 쇠해지자 순임금이 그를 가두었다고 죽서에 쓰여있다고 한다.
括地誌云 竹書云 舜囚堯 復偃塞 丹朱使不與父相見也 -괄지지가 전하기를 순임금이 요임금을 가두고 다시 방죽을 쌓아 막았다. 단주가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없도록 서로 보지도 못하게 하였다. -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정의(正義) 중에서
汲冢竹書云 舜囚堯於平陽 取之帝位. 급총죽서에서 말하기를 순임금이 평양에서 요임금을 가두고 임금의 자리를 차지했다. - 광홍명집(廣弘明集) 권 11 법림(法琳)의 대부혁폐불승사(對傅奕廢佛僧事)
汲冢書云 舜放堯於平陽 급총서에서 말하기를 순임금이 평양에서 요임금을 풀어주었다. - 유지기(劉知幾)의 사통(史通) 의고(疑古) 중에서
汲冢紀年云 后稷放帝子丹朱 급총기년에서 말하기를 후직이 요임금의 아들 단주를 풀어주었다. -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정의(正義) 중에서
括地誌云 汲冢紀年云 后稷放帝子丹朱於丹水 괄지지가 전하기를 후직(后稷)이 단주를 단수 땅에 풀어주었다 고 급총기년에 쓰여있다고 한다. -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정의(正義) 중에서
竹書亦曰 后稷放帝朱於丹水 죽서에서 또 이르기를 후직이 帝朱(단주)를 단수 땅에 풀어주었다. - 산해경(山海經) 해내남경(海內南經) 중에서
기원전 4세기경 우공이산(愚公移山)과 조삼모사(朝三暮四)등의 우화(寓話)로 유명한 정(鄭) 나라의 열자(列子)가 편찬한 책, 열자(列子)에는 요(堯) 임금이 재위 50년을 맞아 민정시찰을 나갔을 때 저자에서 울려 퍼지던 노래라며 일명 강구요(康衢謠)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태평성대의 평화로운 풍경을 묘사하는 강구연월(康衢煙月)이라는 고사성어가 강구요(康衢謠)에서 나온 것이라며 요(堯) 임금 때가 태평성대(太平聖代)였다고 한 공자(孔子)의 평가를 확인해 주는 기록이었다. 4통(康) 5달(衢)의 번화가(繁華街)에서 피어오르는 저녁 짓는 연기(煙)가 달빛(月)에 은은하게 비치는 모습에서 태평성세(太平聖世)를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는 공자(孔子)와 열자(列子)의 거듭된 확인은 요(堯) 임금 시대를 우러르는 춘추전국시대 중국인들의 정서를 확고히 했다. 결국 아무런 검증 없이 진리처럼 숭앙된 요(堯) 임금 치세(治世)의 탁월함은 그러나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 나라 4대 국군(國君)이었던 양왕(襄王)의 무덤이 급군(汲郡;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 일대)에서 발굴되면서 도전(挑戰) 받게 되었다. 서기 281년 서진(西晉) 시절 부준(不准)이라는 농부가 우연히 발견한 무덤을 도굴(盜掘)했는데 그 무덤에서는 수 십 수레에 해당되는 죽편(竹片)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보물이 가득한 무덤에 겁이 난 부준이 관아(官衙)에 신고했고 서진(西晉)의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은 속석(束皙)을 파견해 출토된 대량의 죽편(竹片)들을 관리토록 했다. 무제는 죽편(竹片)들에 기재된 내용을 자신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라고 속석(束皙)에게 명했고 속석은 그에 따라 수많은 죽편(竹片)들을 기재(記載)된 내용과 연대(年代)에 따라 정리한 후 기재된 내용들을 모두 종이에 옮겨 적어 기록화(記錄化)했다. 그중에는 주(周) 나라 목왕(穆王)이 솔로몬이 다스리던 이스라엘 왕국까지 여행하고 돌아온 것 같은 이야기를 담은 목천자전(穆天子傳)뿐 아니라 전설적인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시대부터 전국시대(戰國時代) 삼진(三晉) 분립 후의 위나라(魏) 양왕(襄王) 때까지의 연대기(年代記)가 기록된 죽편(竹片)들도 있었다. 조작하기 쉬운 기전체(紀傳體)가 아닌 연대기로 쓴 편년체(編年體)로 된 역사(歷史) 기록이었다. 죽편(竹片)에 쓴 편년체(編年體) 역사서(歷史書)라 하여 죽서기년(竹書紀年)으로 불린 이 역사서는 급군(汲郡) 지역의 무덤(冢)에서 나온 편년체 역사서였기에 급총기년(汲冢紀年)이라고도 불렸는데 이 죽편(竹片) 역사서에는 사기(史記)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선진시대(先秦時代)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이 죽서기년(竹書紀年)에 기록된 요(堯) 임금의 치세(治世)는 실정(失政)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요(堯) 임금이 순(舜) 임금에 의해서 연금(軟禁)되었다가 끝내 아들인 단주(丹朱)도 보지 못한 채 죽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순(舜) 임금이 요(堯) 임금을 가두고(舜囚堯) 무너진 제방(偃)을 다시 복구(復)해 범람을 막았다(塞)고 기록했다. 요(堯) 임금이 제방(堤防) 때문에 제위(帝位)를 뺏긴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후일 순(舜) 임금에게 시집간 요(堯) 임금의 두 딸, 아황(娥黃)과 여영(女英)이 순수(巡狩) 중이던 순(舜) 임금이 급작스레 죽자 상강(湘水)에 투신해 두 자매가 모두 자살한 연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요(堯) 임금이 주장해 쌓은 제방이 무너져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온 국토가 황폐(荒廢)해지자 요(堯) 임금은 그 책임을 져야 했다. 요(堯) 임금과 함께 제방(堤防)을 쌓는데 깊숙이 가담한 공공(共工)과 환두(讙兜), 곤(鯀)도 순(舜) 임금에 의해 문책(問責)되었다. 곤(鯀)은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요(堯) 임금의 가문(家門)은 폐주(廢主)의 가문이었고 멸문(滅門)이 답(答)이었으나 순(舜) 임금은 요(堯) 임금의 두 딸을 자신의 비(妃)로 모두 거두어 살렸다. 자신들의 생명을 홀로 지켜주었던 순(舜) 임금이 급작스레 죽자 자신들에게 닥쳐올 사람들의 보복이 두려워 상강(湘江)에 투신한 거였다. 투신(投身) 하기 전 자매가 흘린 눈물이 상강변(湘江邊)의 대나무에 튀어 반점(斑點)이 되었다는 소상반죽(瀟湘飯竹)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눈물로 생겨난 전설이었다. 따라서 강구요(康衢謠)에 나타난 요(堯) 임금의 민정(民政) 시찰은 사기(史記)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무리한 제방 건설과 범람(氾濫)에 따른 제방 붕괴(崩壞)로 전대미문의 파괴적 재해(災害)에 어찌할 바를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던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요(堯) 임금 스스로도 ’ 홍수가 하늘까지 넘쳐서 물줄기가 산을 감싸고 언덕까지 물에 잠겨 백성들의 걱정이 태산‘이라던 시기의 민정시찰이었다. 그때 저잣거리에서 불리던 노래라는 뜻의 강구요(康衢謠)는 열자(列子)가 해석한 뜻일 수는 결코 없었다. 각각 네거리(康)와 오거리(衢)란 뜻을 가진 강구(康衢)에 퍼진 노래는 요(堯) 임금의 하야(下野)를 요구하는 역성혁명가(易姓革命歌)였다. 강구요의 가사를 이에 따라 다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立我烝民 외고집(我) 피워(立) 백성(民)을 들들 볶고(烝) 莫匪爾極 나누지(匪) 않아(莫) 하늘(근본; 極)을 타인(爾; 원쑤)으로 만들었다.
不識不知 분간(識)도 안되고(不) 아는 것(知)도 없으니(不) 順帝之則 임금(帝)에서 물러나는(順) 것이 이치(則)다.
두려움에 떨던 요(堯) 임금은 당시 고사(高士)로 이름 높은 허유(許由)에게 찾아가 제위(帝位)를 제안했다. 허유는 거절하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자신의 귀를 영수(穎水)의 흐르는 물에 씻는다. 허유(許由)가 영수(穎水) 물에 귀를 씻는(洗耳) 모습을 보고 그 연유를 묻던 소부(巢父)는 자초지종을 들은 뒤 몰고 온 소(牛)를 영수(穎水)의 상류로 몰고 간다. 연유를 묻는 허유에게 차마 들을 수 없는 더러운 이야기를 듣고 귀를 씻은 물을 어찌 자기 소에게 알고 난 뒤에 먹을 수 있게 하겠느냐고 소부는 답했다. 허유소부(許由巢父)란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연유다. 허유(許由)와 소부를 자신의 저서 고사전(高士傳)에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은일(隱逸)하며 뜻을 잃지 않는 유일(遺逸)이라고도 불리는 고사(高士)로 내세운 황보밀(皇甫謐, 215년 ~ 282)은 그러나 요(堯) 임금이 허유(許由)에게 제안했다는 양위(讓位)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몽골 고원에 살던 북방 유목 민족들의 계속된 중국 침략으로 후한(後漢) 말부터 시작해 위촉오 삼국 쟁패기를 거쳐 조 씨(曹氏)와 사마씨(司馬氏)의 암투까지 겪는 극도의 혼란기를 살아내야 했던 비운의 세대였지만 왜 북방 유목 민족이 그토록 집요하게 중국을 침략했는지에 대해서는 진실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은 요(堯) 임금의 차무역로(茶貿易路) 강탈을 위한 중위(中衞) 제방(堤防) 건설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요(堯) 임금이 영수(穎水) 가에 살고 있는 허유를 찾아간 건 중위에 건설한 제방이 무너져 패해(悖海; 背海; 浿海; 黑海)와 황하의 물이 온통 나라를 뒤덮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요(堯) 임금은 그 와중에도 자신의 제위를 넘겨주는 행위를 양위(讓位)라고 분명히 밝혔다. 즉 제방(襄)을 반드시 유지하겠다는 약속(言)을 해야 제위(帝位)를 넘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토록 요(堯) 임금은 중위 제방에 진심이었다. 후일 공자 같은 중국인들이 그 제방이 건설된 땅을 중국을 보위(保衞)하는 곳이라는 뜻의 중위(中衞)로 이름 짓고 그 제방을 건설한 요(堯) 임금과 요(堯) 임금을 정변을 통해 퇴위시켰음에도 제방을 끝까지 보수유지한 순(舜) 임금을 둘 다 성군(聖君)으로 추앙하고 그 시대를 태평성대로 둔갑(遁甲)시킨 연유는 사공(司空) 우(禹)가 버텨 준 덕으로 배달국(背達國)에게서 끝내 차무역로(茶貿易路)를 강탈(強奪)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배달국(背達國)이 군사(軍士) 대부분을 기원전 2350년경 사르곤 대왕이 이끄는 메소포타미아 원정대로 파견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군사(軍士)들만 있었다면 요(堯) 임금의 제방 건설 따위는 허물어버리면 그만인 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배달국(背達國)엔 더 이상 파견할만한 군대가 없었다. 게다가 기후한냉화(氣候寒冷化)로 몽골 고원의 강(江)들이 말라가고 있었다. 제대로 약효(藥效)를 가진 차(茶)들을 메소포타미아로 수송하지 못하는 사태가 몇 년이고 계속되고 있었다. 요(堯) 임금이 장악하고 있는 탁록(涿鹿) 지역에서의 찻잎 수송이 점점 절대적으로 중요해져 가고 있었다. 요(堯) 임금이 쌓은 제방이 자꾸 무너져 그 보수 작업에 투입되는 엄청난 인력과 물자가 탁록(涿鹿) 지역에서 징발(徵發)되고 있었다. 이 징발 때문에 탁록지역의 인력(人力)과 말, 수레 같은 수송시설이 턱없이 부족해져 찻잎 수송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차질(蹉跌)을 빚고 있었다. 마침내 어느 한쪽은 포기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메소포타미아 원정군을 살리는 것이 결정되었다. 기원전 2267년의 도산회의(塗山會議)가 개최된 연유였다. 요(堯) 임금의 제방(堤防) 건설로 촉발된 차무역로(茶貿易路) 강탈(強奪)은 인정되었고 황하를 패해(悖海; 背海; 浿海; 黑海)와 분리한 중위 제방(堤防)도 인정되었다. 대신 탁록(涿鹿)지역에서 아사달로의 찻잎 수송은 그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수입된 전량을 요구된 시한까지 완수한다는 약속이 수많은 증인들 앞에서 맹세(盟誓)되었다. 전한(前漢) 때 유방(劉邦)의 손자인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편찬(編纂)한 회남자(淮南子)라는 책에는 도산회의(塗山會議)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철광석에서 분리한 용선(溶銑)을 무쇠(銑鐵)가 아닌 강철(鋼鐵 steel)로 만들기 위해 풀무질과 단조(鍛造)를 통해 용선(溶銑)의 탄소 함유량을 줄이는 초강법(焦鋼法)이 소개되어 있던 회남자(淮南子)에는 이 역사적인 도산회의(塗山會議)에 참석키 위해 옥(玉)과 비단(緋緞)을 지참해 자신의 신분을 확인받은 제후(諸侯)의 수가 만 명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있었다. 지나인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회의에서 제방 붕괴(崩壞)의 책임을 물어 제방을 건설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배달국의 정의(正義)는 정리(整理)되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을 진행한 건 배달국이 아니었다. 배달국(背達國)은 메소포타미아의 혼란과 지나인의 반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기원전 2333년에 조선국으로 교체되었다. 천왕(天王)이라 불리던 배달국(背達國) 군주(君主)의 칭호는 메소포타미아와 지나(支那)의 이탈로 단군(檀君)으로 격하되었다. 조선국이 자신의 군주(君主)를 단군(檀君)으로 부르자 후일 흉노족은 자신들의 군주(君主)가 조선의 단군(檀君)을 닮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자신들의 군주를 단우(單于:선우)라 불렀다.
도산회의(塗山會議)가 끝난 후 순(舜) 임금이 집권했고 제방(堤防) 복구(復舊)와 관리는 사공(司空) 우(大禹)가 맡았다. 우(大禹)에게 지금의 탑햇(Top Hat) 같은 모양의 물길을 내어 황하(黃河)를 유도해 진령산맥(秦嶺山脈)의 화산(華山)에서 동쪽으로 물줄기를 틀게 만드는 공사안(工事案)이 지도(指導)되었다. 동시에 중위(中衞) 제방 보수 건설에 석회석을 사용하는 배달국 비밀기술이 전수되었다. 금간옥첩(金簡玉牒)의 신서(神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시방서(示方書)였다. 차(茶)를 더욱 오래 보존하기 위한 방안(方案)을 찾는 연구의 하나로 차(茶)를 보관하던 동굴을 조사하다가 알아낸 사실이었다. 탄산칼슘(CaCO3)인 석회석(石灰石)을 일정온도 (900도) 이상으로 가열해 가루로 변하면 이 가루를 진흙과 섞어 벽에 바르면 벽이 엄청나게 견고해진다는 사실이었다. 탄산칼슘(CaCO3)인 석회석을 900도 이상의 불로 가열하면 산화칼슘(CaO)인 생석회(生石灰)로 변하는데 이 생석회(生石灰)는 물과 반응하면 소석회(消石灰)인 수산화칼슘(Ca(HO)2)이 되면서 이때 주변의 열을 흡수해 일정 공간의 온도를 인공적으로 낮추는 효과가 있었다. 저습(低濕)과 저온(低溫)이 반드시 필요한 차(茶) 보관 창고에서 꼭 필요한 물질이었다. 그런데 이런 인위적인 저습 저온 효과 말고도 물과 반응한 생석회가 엄청 단단해진다는 사실도 발견해 냈다. 자주 붕괴되는 중위(中衞) 제방(堤防)에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었다. 곧 순(舜) 임금의 반정(反正)이 일어났고 요(堯) 임금은 유폐되었다. 공공(共工)은 유주로 유배당했고 환두(驩兜)는 삭탈관직되었으며 곤(鯀)은 목이 잘렸다. 순(舜) 임금에 의해 기용된 우(禹)는 총 13년간을 집에도 못 들어가고 금간옥첩(金簡玉牒)의 신서(神書)에 따라 무너진 제방(堤防)은 생석회(生石灰) 가루를 흙에 섞어 제방을 다시 쌓았고 무너지지 않은 제방엔 생회석 가루를 물에 반죽해 제방에 칠(漆)했다. 칠 도(塗)자를 써서 도산회의(塗山會議)라 기록한 연유였다. 또한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 황하를 흐르게 했다. 이렇게 홍수를 막아낸 우(禹)는 묘족(苗族)을 쫓아 한수(漢水) 너머 장강(長江)까지 주사(朱砂)를 찾아 내려갔던 순(舜) 임금이 그 때문에 암살되자 제위(帝位)에 오른다. 요(堯)와 순(舜) 그리고 우(禹)에게 차례로 제위(帝位)가 넘어갈 때 사람들은 선양(禪讓)이라고, 양위(讓位)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도 권력을 넘겨주는 것을 이양(移讓)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에는 요(堯) 임금이 쌓아 올린 제방(흙더미 壤)을 포기하지 않고 인수해 유지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중위(中衞) 제방(堤防)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지나(支那) 제위(帝位)에 부여된 제일 책무(責務)였다.
양위(讓位)와 선양(禪讓), 이양(移讓)등 평화적인 정상적 권력의 전달을 뜻하는 단어에 높이 쌓은 모습을 상형한 양(襄) 자가 들어간 연유다. 요(堯) 임금이 중위(中衞) 제방(堤防)을 쌓아 올려 만든 당(唐)이란 지역은 후일 진(晉)이 되었고 이 지역에서 그렇게 지악스럽게 완고히 성장한 세력은 진상방(晉商幫)이란 이름으로 중국의 역사를 수천 년이나 재단(裁斷) 해 왔다. 기후한랭화로 대륙이 추워지면 해상무역을 중심으로 동서 교역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절강(浙江)과 복건성(福建省) 지역을 중심으로 한 루상방(鹿商幫)의 요구를 진상방(晉商幫)이 순순히 들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불새 신화에서 알 수 있듯 오백 년을 주기(週期)로 추워졌다 뜨거워졌다를 되풀이하는 전지구적 기후변화에 육상무역과 함께 해상무역을 진흥시켜 능동적으로 대처하자는 루상방(鹿商幫)의 요구를 요(堯) 임금 때부터 석회석을 통해 배워 그들이 만들어 낸 도기(질그릇 陶器)처럼 똘똘 뭉치기 시작한 당(唐) 지역에 터 잡은 진상방(晉商幫)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요(堯) 임금 이후부터의 중국의 역사는 진상방(晉商幫)의 역사였다. 요순(堯舜) 때 22년간이나 제방(堤防)이 계속 무너져 대홍수에 시달리면서도 차무역로(茶貿易路)를 몽골고원에서 당(唐) 지역으로 옮겨오게 하지 않으면 지나인(支那人)들의 미래는 없다며 버틴 사람들이었다. 요(堯) 임금은 기꺼이 자신의 아들과 두 딸 그리고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면서도 배달국(背達國)으로부터 차무역로(茶貿易路)를 빼앗아 와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요(堯) 임금과 함께 그 주장을 굽히지 않아 목까지 잘린 곤(鯀)의 아들이 순(舜) 임금에 이어 제위(帝位)에 오른 건 공정한 일이었다. 순(舜) 임금 때 석회석을 가열해 가루(생석회)로 만들어 제방을 쌓는 데 사용한 이후 중위 제방은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고 물줄기를 새로 내어 황하(黃河)를 동남 방향으로 유도한 후 관중 지역에서의 범람 또한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자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차무역로를 가져와야 한다는 요임금 주장의 정당성(正當性)과 역사성은 지나인들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결국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불초(不肖)는 단주(丹朱) 이후 모든 아들들의 두려움을 일으키는 단어가 되었고 윤리적 금기가 되었다. 요순(堯舜) 시대는 결단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은 절대로 우리가 아는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룬 게 아니었다. 그렇게 추악한 진실을 뚫고 지나인은 배달국으로부터 차무역로를 빼앗아 왔다. 배달국(背達國)은 그래서 그 책임을 지고 스러졌다. 기원전 2333년의 단군조선으로의 지배(支配) 권력 교체(交替)는 그런 연유였다. 피땀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지내면서도 사람이 편안하게 누릴 수 있는 건 오직 죽음뿐이다. 나라도… 민족도… 마찬가지다.
바둑은 놀이가 아니었다. 오늘 우리의 허리 잘린 불구의 꼴은 바둑의 역사를 지나인(支那人)에게 왜곡당하고 일본인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어이없는 결과인지도 모른다. 경남 함양의 풍천(豐川) 노 씨(盧氏) 대종손(大宗孫) 사초(史楚) 노석영(盧碩泳)이 대대로 내려온 집안의 대종가(大宗家) 가옥(家屋)을 담보 잡아 내기 바둑까지 두어서라도 조선의 초대 국수(國手)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 한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는 일본 바둑의 본인방(本因坊)도 명인(名人)도 아니다. 그는 중국 바둑의 기성(碁聖)이 아니다. 노사초(盧史楚)는 순장(巡將) 바둑의 국수(國手)다. 동서 교역로를 개척하고 그 찬란한 위업을 지도로 표시한 바로 배달(倍達) 민족 바둑의 국수(國手)였다. 우리 민족이 바둑을 순장(巡將) 바둑이라 한 연유다. 순장(巡將) 바둑의 국수(國手) 노사초가 일본 바둑 규칙으로 이루어지는 일제강점기의 바둑에 굳이 그의 기보(棋譜)를 남겨놓은 이유는 조선 국수(國手)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이었을 게다. 경상남도 함양군(咸陽郡)이 지금 순장(巡將) 바둑의 맥을 잇는 노력을 하는 것은 배달(倍達)의 역사를 이어가는 자랑찬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