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年 倭人行兵 欲犯邊 聞始祖有神德 乃還. 8년,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 19년 봄 정월, 변한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 왔다.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是歲 高句麗始祖東明立. 21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고 불렀다. 이 해에 고구려 시조 동명이 왕위에 올랐다. 三十年 樂浪人將兵來侵. 30년 낙랑인 장병들이 침입해 왔다.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했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나라의 속국인데 가까운 몇 년 동안은 공물(차)을 보내오지 않았소.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어찌 이런가. 四十年 百濟始祖溫祚立. 40년 백제 시조 온조가 즉위했다.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匹 曰寡君問 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53년,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 필을 바치며 말하길 저희 (동옥저)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났다는 말을 들었기에 저를 보내 이를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震城南門. 60년 가을 9월, 두 마리의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우레와 비가 심하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蛇陵 在巖寺 {曇巖寺}北. 61년 봄 3월, 거서간이 승하했다. 담암사 북쪽의 사릉에 장사 지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거서간조
기원전 69년 전한(前漢) 선제(宣帝)의 사변적(事變的)인 차(茶) 나무 재배(栽培) 정책을 눈치챈 부여(夫餘)가 근역(槿域; 한반도)에 박혁거세 원정단을 파견해 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형산강(兄山江)과 태화강(太和江) 유역을 모두 점령한 후 왜(倭)와의 차무역(茶貿易)을 통제하자 사람들은 그 지역을 서라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漢) 나라는 정길(鄭吉)이 이끄는 군사를 투르판(Turfan) 근처 거여(渠黎)에 파견해 부여(夫餘)에게 부응(副應)할 가능성이 있는 서역 나라들을 감시토록 했는데 후일 중국 역사상 최초의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는 정길(鄭吉)은 다음 해인 기원전 68년 차사(車師)를 공격해 점령해 버렸다. 차사(車師)는 지금의 신강성 투루판(Turfan)으로 고창(高昌)으로 불리던 지역인데 기후변화로 알카나이(Alkhanai)와 아스타나(Astana)를 연결하는 초원로(草原路)가 얼어붙을 때마다 대체(代替) 무역로로 사용된 북도(北道)라고 통칭된 우루무치를 통과하는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지금의 고거(庫車 Kuqa)인 쿠차(龜玆 Kucha)를 지나는 천산남로(天山南路)의 두 개 무역로(貿易路)가 분기(分岐)되는 중요한 역참(驛站)이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도하(渡河)가 어려운 두 개의 강 사이에 위치한 교하(交河)의 높은 지역에 성곽을 건설하고 수도로 삼은 차사국을 형면제(刑免除)를 조건으로 내건 1500명의 죄인들로 구성된 하찮은 둔전병(屯田兵)들을 이끌고 결정적인 시점에 정길(鄭吉)이 점령해 버린 거였다. 성곽(城廓)을 두른 요새(要塞) 도시 투르판을 한(漢) 나라의 정길이 그 약소한 전력(戰力)으로 점령해 버리자 만천하에 빈천한 실력이 드러난 흉노(匈奴)는 그 책임 문제로 혼란에 휩싸였다. 게다가 한(漢) 나라의 고창(高昌) 교하성(交河城) 점령은 북도(北道)로 불린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천산남로(天山南路)의 동서(東西)를 잇는 두 개의 무역로(貿易路) 통제권을 한(漢) 나라가 흉노(匈奴)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상징되어 서역(西域) 여러 나라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교하성이 함락되고 같은 해에 흉노의 호연제(壺衍鞮) 선우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허려권거선우(虛閭權渠單于)가 즉위했는데 허려권거는 흉노(匈奴)의 전통인 수계혼(收繼婚)을 지키지 않고 죽은 형의 아내인 전거연지(顓渠閼氏)를 내쫓아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허려권거(虛閭權渠) 선우가 기원전 60년에 죽자 그의 아들들인 질지골도후(郅支骨都侯)와 호한야(呼韓邪)를 제치고 정통성 없는 악연구제(握衍朐鞮)를 내쫓겼던 전거(顓渠) 연지(閼氏)와 일부 궁정세력이 선우(單于)로 옹립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큰아버지인 호록고(狐鹿姑) 선우의 아들들이기에 호연제(壺衍鞮)와 허려권거(虛閭權渠)에게 선우(單于) 제위를 양보했던 호록고(狐鹿姑) 선우의 동생 아들인 일축왕(日逐王) 선현전(先賢撣)이 자기 휘하의 5만 명 기병(騎兵)을 데리고 한(漢) 나라에 투항해 귀덕정후(歸德靖侯)가 되어 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질지골도후와 호한야 형제의 오촌당숙이었던 일축왕(日逐王)이 이끌던 5만의 흉노(匈奴) 기병은 파르티아로 연결된 무역로(貿易路)에서 역참(驛站)으로 기능하는 서역의 소국들을 보호하는 국방력이었기에 그들의 투항으로 흉노의 북도(北道) 무역로(貿易路) 방어체계는 붕괴되었다. 기원전 60년에 다섯 명의 선우(單于)가 동시에 난립하는 흉노(匈奴)의 대분열(大分裂)은 여기에 기인한 것이었다. 부여의 박혁거세 서라벌 파병과 그에 따른 한(漢) 나라 정길의 고창 교하성 점령은 한(漢) 나라가 관리하던 무역로인 남도(南道)와 대칭(對稱)해 북도(北道)라 불렸던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천산남로(天山南路)에서 역참(驛站) 역할을 하던 서역(西域) 여러 나라를 혼돈의 와중으로 몰아넣어 결국 차무역량(茶貿易量)의 급격한 축소를 가져왔다.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역참(驛站)으로 차(茶) 중계(中繼) 역할만을 하던 서역 제국(諸國)은 서로 앞다퉈 자신의 나라를 경유(經由)하는 대상(隊商 caravan)들로부터 차(茶)를 헐값에 사재기했기 때문이었다. 대상(隊商)들을 보호해 주던 흉노의 5만 기병이 한(漢) 나라에 투항했기에 이제 어디서든 도적(盜賊)을 만날 수 있게 된 대상(隊商)들도 전 재산을 쏟아부은 차(茶)를 빨리 처분하기 원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대상(隊商)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한(漢) 나라에 투항한 5만 명의 흉노 기사(騎士)들이 역으로 도적(盜賊)으로 나타나는 사태였다.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차운송량(茶運送量)의 감소(減少)는 결국 근역(槿域)과 왜(倭)의 차(茶) 생산을 축소시켜 경제불안을 야기하고 있었다. 기원전 681년 중국 최초의 장성을 쌓은 제(齊) 나라의 농간으로 단군조선이 멸망의 길로 들어선 전철(前轍)이 다시 새겨지고 있었다.
전한(前漢) 선제(宣帝)가 중국땅에서 야생(野生)하는 차(茶) 나무를 찾았다는 보고를 받은 건 기원전 61년, 보위(寶位)에 오른 지 13년째 되던 해였다. 18살에 황제가 되고 증조부(曾祖父)인 선대왕(先代王) 무제(武帝)가 흉노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무리하게 시행한 여러 경제정책들과 대외정책의 폐단(弊端)을 바로잡기 위해 동분서주한 4년을 보낸 후 지시한 명령에 대한 결과보고였다. 선제(宣帝)가 황제로 재위(在位)한 모든 기간이 25년이었기에 4년마다 바꾸는 연호(年號) 제도에 따라 선제(宣帝)는 재위기간 중 총 7개의 연호(年號)를 사용했는데 마지막 연호(年號)는 죽던 해 반포한 연유로 1년을 채 사용하지 못했다. 그건 선제(宣帝)의 꿈이 이루어져 중국이 비상(飛上)하고 있다는 황룡(黃龍)이었다. 선제(宣帝)는 연호(年號)들을 자신과 자신이 다스리는 정부가 어떤 목표(目標)를 가지고 나라를 이끌려고 하는지 백성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깃발로 사용했다. 태어나던 해인 기원전 91년에 증조부(曾祖父)인 무제(武帝)와 조부(祖父)인 여태자(戾太子) 사이에 벌어진 무고(巫蠱)의 옥(獄)으로 부모형제등 모든 가족을 잃고 구중궁궐이 아닌 일반 사대부들처럼 백성들이 살아가는 거리에서 후견인의 보호를 받으며 홀로 자라 황제가 된 선제(宣帝)는 그래서 증조부(曾祖父)인 무제(武帝)가 시작하고 43년 동안이나 계속된 흉노전쟁으로 한(漢) 나라의 평범한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제(宣帝)의 첫 연호(年號)는 태평성대로 기억되는 문경지치(文景之治)를 다시 재현(再現)하겠다는 의지(意志)를 나타내는 본시(本始)였다. 선제(宣帝)는 자신의 조부(祖父)인 여태자(戾太子)가 흉노와의 전쟁과 무리한 무역로(貿易路) 경영을 비판(批判)하며 자신이 즉위하면 이를 즉시 중지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내 주전파(主戰派) 특히 국가전매파(國家專賣派)의 간계(奸計)로 결국 반역죄로 증조부(曾祖父) 무제(武帝)에게 죽임을 당하고 증조모(曾祖母) 무사황후와 아버지 유진(劉進)까지 채 한살이 안된 자신만을 제외하고 모두가 죽은 무고(巫蠱)의 화(禍)를 한(恨)으로 가슴에 안고 살았다.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한 것은 중국이 차(茶)를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선제(宣帝)였다. 차(茶)를 자체적으로 생산해 내려면 근역(槿域)과 제잠(鯷岑)처럼 차(茶) 나무가 중국땅에서 자라야만 했다. 차(茶) 나무 재배(栽培)를 결심한 그가 보혜선사(普慧禪師) 오리진(吳理眞)에게 자생 차(茶) 나무가 집단으로 자라는 곳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린 소이(所以)였다.
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牟·一云衆解).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추모 혹은 중해라고도 한다)이다. 先是 扶餘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이보다 앞서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涙 王怪之. 왕이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을 때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왕이 괴이하게 여겼다.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사람을 시켜 바위를 옮기게 했는데 금빛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立爲太子. 왕이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다라고 말하며 아들로 삼으니 이가 곧 금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를 삼았다…後其相阿蘭弗曰. 日者天降我曰 훗날 국상 아란불이 말했다. 어느 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이르되…阿蘭弗遂勸王移都於彼. 國號東扶餘. 아란불은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그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며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 13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제일(第一 ) 시조(始祖) 동명성왕(東明聖王) 중에서
동부여(東扶餘)를 관리했던 금와(金蛙)의 등장을 알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에는 금와(金蛙)가 개구리 모양의 금빛 나는 아이로 바위 밑에서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금와(金蛙)의 금(金) 자는 몸에 부착한 금제품 장신구에서 나오는 빛과 고깔모양의 모자를 상징한 글자여서 그가 소그디아나(Sogdiana)와 파르티아 지역 같은 지금의 이란 북동부 지역에서 온 외래인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금와(金蛙)의 와(蛙) 자는 개구리 와(蛙) 자인데 이 개구리 와(蛙) 자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금와가 페르시아인(Persian)들과 조로아스터교 신자(Zoroastrian)들의 신화에 나오는 가오케레나와 관련 있는 해상과 육상 무역에 모두 정통한 인물이란 것이었다. 가오케레나(Gaokerena)는 페르시아 전설에서 그 열매를 먹으면 어떤 병이든 치유되어 죽지 않고 영원한 삶을 계속 살 수 있고 죽은 자도 부활(復活 Resurrection)한다는 신성한 생명의 나무(Life of Tree; Cosmic Tree)였는데 조로아스터교 신화에서의 이 나무는 크고 젖 같은 즙(汁 juice)이 나오는 모든 나무들의 씨앗을 품고 있는 하얀(white) 하오마(Haoma) 나무였다. 지금의 이란 동북부지역에서 시작된 조로아스터(Zoroaster) 교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선(善)과 악(惡)의 대결로 보는 이원론적 종교인데 이 종교의 제의(祭儀)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하오마 플랜트(plant)에서 나오는 즙(汁)을 마시는 일이었다. 차(茶) 나무였다. 그런데 이 전설 속 하오마 플랜트는 부상국(扶桑國)의 차(茶) 나무처럼 물속에서 자랐다. 조로아스터(Zaratustra) 교에서 악(惡)을 대표하는 아리만(Ahriman)은 그래서 이 하오마 나무를 없애기 위해 한 생명체를 만들어 냈는데 그것이 개구리(蛙 Frog)였다. 그러자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유일신 아후라(Ahura) 마즈다(Mazda)는 개구리로부터 생명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단 한순간도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를 만들어 하오마 플랜트로 보냈다. 이 물고기가 카라 피시(Kara fish)였고 양쪽에서 감시하라고 보낸 카라 피시는 그래서 쌍어(雙魚)였다. 김수로왕릉의 납릉정문(納陵正門) 상단에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쌍어(雙魚)는 바로 이 카라(Kara) 피시(Fish)를 그린 것이다. 가오케레나는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언급되는데 그것은 길가메시가 절친 엔키두의 죽음으로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은 후 불멸(不滅)과 소생(蘇生)의 비법을 찾으러 길을 떠난 후 벌어진 이야기들에서였다. 여러 곤경들을 헤치고 현자인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의 조언(助言)으로 물속에 있는 불멸(不滅)과 소생(蘇生)의 불로초(不老草)를 찾아 가지고 나오다 뱀에게 뺏겨 빈손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에서 불멸과 소생의 불로초가 가오케레나였다. 물에서만 살 수 있는 물고기와 물에서만 살 수 없는 개구리는 해상무역파와 육상무역파를 각각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수천 년간 초원로(草原路)가 얼어붙는 기후한랭화 기간에 차(茶) 생산과 차(茶) 무역(貿易)을 관장하던 대월지(大月氏)가 중국인들의 간계로 흉노에 의해 동서로 분리된 후 동호(東胡)가 먼저 묵특선우(冒頓單于)에 의해 축출되고 한양(漢陽; 지금의 천수)에 있던 대월지마저 묵특(冒頓)의 아들 노상선우(老上單于)에 의해 처절하게 쫓겨나자 차(茶) 무역(貿易)에서의 중국의 횡포는 나날이 심해져가고 있었다. 차(茶)는 사고파는 상품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 인류 생존을 위해 반드시 나누어야 할 오늘날의 백신(Vaccine)이었다. 그런 차(茶)를 상품(商品)으로 만든 중국인들이 급기야 기원전 133년부터는 흉노와 전쟁을 하기 시작했다. 차(茶) 무역로(貿易路) 통제권을 흉노로부터 빼앗아오기 위한 전쟁이었는데 그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이 없을 정도로 그 폐해(弊害)는 전 세계적인 것이었다. 그 극악한 전쟁을 통해 타림(Tarim) 분지 남쪽의 곤륜산맥(崑崙山脈) 북쪽 사면(斜面)에 남도(南道)라 불리는 전용(專用) 무역로(貿易路)를 끝내 건설한 중국의 한(漢) 나라가 흉노(匈奴)가 관리하는 북도(北道)라 불린 타림분지 북쪽의 천산산맥(天山山脈) 사면(斜面)을 타고 건설된 전통의 무역로(貿易路)까지 점령하려고 기원전 68년 차사국(車師國)의 교하성(交河城)까지 점령하자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었던 파르티아(Parthia)였다. 파르티아로서는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럽과 메소포타미아, 이란과 페르시아 지역에서의 차(茶)의 충분한 확보는 자신들의 생존과 체제 유지가 달린 문제였다. 그런 차(茶)를 그저 운반해 주는 대상(隊商)들만 믿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들의 역사 속에서 벌어진 모든 중요한 사변(事變)들이 그 지역에 공급되는 차(茶)의 물량이 현저히 줄어들었을 때 늘 발생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왜 한반도와 주변 지역에 직접 진출했는지 이해하는 근거(根據)가 된다. 기원전 69년의 상황은 중국이 차(茶)를 중계(中繼)하고 중개(仲介) 해 주는 역할을 뛰어넘어 차(茶) 생산국으로 나서며 차(茶) 공급 통제를 통해 자신들을 지배(支配)하고 폭리를 취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하고 있는 정세였다. 기원전 133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차(茶) 무역로(貿易路) 독점 정책은 기원전 2383년부터 시작된 차무역(茶貿易) 참여를 위한 요(堯) 임금의 제방(堤防) 건설처럼 너무나 인위적이어서 전 세계에 엄청난 폐해를 끼치고 있었다. 기원전 60년경 해부루(解夫婁)의 뒤를 이어 동부여의 왕이 되었다는 금와(金蛙)는 후일 스머프 모자를 쓴 소그드(Sogd)인으로 알려진, 고깔모자로 유명한 사카(Saka)족의 소그디아나와 이란 중북부지역의 파르티아로의 차(茶) 공급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부여에 파견된 이주민(移住民)이었다.
박혁거세도 말(馬)이 무릎 꿇고 울어 사람들을 인도(引導)한 곳에서 나타난 것처럼 금와(金蛙) 또한 왕의 말(馬)이 눈물 흘린 곳에서 나타났다고 기록된 것은 그들이 바다가 아닌 초원에서 기마민족의 일원으로 이주했음을 알게 해 주기 위함이었다. 금와(金蛙)가 차(茶) 나무를 보호하는 카라(Kara) 피시(Fish)가 아닌 하오마(Haoma) 플랜트(Plant)를 없애려는 개구리(蛙)로 묘사된 것은 동부여가 해상무역이 최우선일 수밖에 없는 페르시아와 나중에 대월지(大月氏)의 후신으로 역사 무대에 우뚝 나타나는 쿠샨제국에 대해 상호 원활한 협력관계가 아닌 경쟁과 대립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소그디아나와 파르티아는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는 내륙국가였기에 기원전 500년경 키루스 2세가 했던 것처럼 바다를 중심으로 해안 도시를 따라 차(茶)를 운반하는 해상무역을 위주로 무역하는 경우 치명적인 낙후를 피할 수 없는 지리적(地理的) 특성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대륙 동쪽의 차(茶)가 운송되어 왔던 초원로와 연결된 캅카스(Caucasus) 루트(Route)로 넘어오는 차(茶)를 뺏기 위해 로마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상황에서 파르티아(Parthia)가 로마의 약탈 없이 안전하게 부여(夫餘)로부터 차(茶)를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은 흉노 지역을 통과해 넘어오는 북도(北道)라 불린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천산남로(天山南路)였다. 파르티아가 로마와의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면서 더 많은 차(茶)를 확보하기 위해 흉노와 부여의 연대를 적극 지원했을 거라는 것은 당시 국제정세상 충분한 개연성(蓋然性)을 가진 일이었다. 그 어려운 일을 중간에서 담당했던 소그드(Sogd)인들이 후일 실크로드를 누비는 주인공이 되어 안녹산(安祿山, 703~757년)의 난까지 일으키며 동서무역(東西貿易)의 주역으로 성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기원전 69년부터 기원전 60년 사이 채 십 년이 안된 세월 동안 벌어졌던 북도(北道)라 불린 천산산맥(天山山脈)을 중심으로 펼쳐진 차무역로(茶貿易路)를 둘러싼 동쪽의 혼란은 그래서 그 거리만큼 증폭되어 파르티아에 전달되었고 이는 파르티아를 통해 필요한 차(茶)를 수입했던 로마에 또 그 거리만큼 더 증폭되어 전달되었다. 로마로서는 어떻게 하든지 이 파괴적인 부작용(副作用)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만강(豆滿江)을 모란강(牡丹江)과 연결하는 가야강(加耶江) 유역에 터 잡아 나진(羅津)과 두만강 모란강 수계(水系)를 모두 관리하는 동부여(東扶餘)를 별도로 세워 금와(金蛙)를 보내 서라벌(徐羅伐)에서 올라오는 차(茶)들을 관리하여 부여(夫餘)로 수송케 한 것은 흉노의 대분열이 일어난 기원전 60년이었다. 하루빨리 흉노의 분열을 수습하고 부여의 차(茶)를 확실하게 파르티아(Parthia)까지 수출할 수 있도록 북도(北道)라 불린, 대월지(大月氏)를 축출하고 흉노가 운영한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천산남로(天山南路)를 다시 안전하게 보호해 줄 친부여 흉노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질 좋은 차(茶)가 있어야 했다. 금와(金蛙)는 유능하게 일처리를 해냈고 부여(夫餘)의 이런 신속한 지원(支援)은 질지선우(郅支單于)가 한(漢) 나라의 지원을 받는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를 누르고 대분열을 짧은 시간 안에 수습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이때 큰 기여를 한 것이 나진이었는데 나진(羅津)이란 이름은 삼척(三陟), 동해(東海)의 실직국(悉直國)과 명주(강릉)의 예(濊), 원산의 동예(東濊)를 거쳐 두만강 하구로 올라온 서라벌(徐羅伐)의 차(茶)를 하역하는 선창(船艙)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어서 붙여진 것이었다. 질지(郅支) 선우가 다른 네 명의 선우(單于)를 누르고 흉노를 통일한 건 중국이 차재배 (茶栽培) 성공을 연호(年號)인 감로(甘露)에 담아 공식 선포하기 바로 전해인 기원전 54년이었다.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아안(雅安)의 몽산(蒙山)에서 성공한 인공적인 차나무 재배는 기원전 53년 인공(人工) 재배(栽培)한 차(茶) 나무에서 딴 찻잎으로 차(茶)를 만들어 한(漢) 황실에 공납(貢納)함으로써 감로(甘露)라는 연호를 만들어 주었다. 한(漢) 나라가 차(茶) 나무 재배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몽산차(蒙山茶)인 감로(甘露)의 보급과 함께 빠르게 퍼져나갔고 퍼져나간 만큼 부여와 흉노 연합의 결속력도 떨어져 갔다. 부여와 가까운 동흉노(東匈奴) 보다 멀리 있는 서흉노가 더 많이 동요(動搖)했고 동부여보다 북쪽에 있는 숙신(肅愼)이 더 흔들렸다. 결국 질지선우(郅支單于)가 서흉노의 동요(動搖)를 잠재우고자 서역으로 가야만 했고 그 후 질지 선우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剖卵降世 生而有聖德 ㅁㅁㅁㅁㅁ命駕巡車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日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삼가 생각할 때 옛적에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 기틀을 창건하셨다. 북부여에서 나시고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 따님을 어머니로 모셨다. 알을 깨뜨리고 세상에 내려와 날 때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ㅁㅁㅁㅁㅁ 명(命)으로 순행하는 마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갈 때 길이 부여의 엄리대수를 경유하게 되니 왕이 나룻가에서 말씀하시길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하셨다. 為我連葭浮龜 應聲即為連葭浮龜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의 떼를 띄워서 물을 건너게 하라 하였다. 말이 끝나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물 위로 떠올랐다. 然後造渡 於佛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그런 연후 물을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 廣開土境平安好太皇碑文(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문) 중에서
기원전 2340년경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을 떠나 메소포타미아로 떠난 사르곤(Sargon) 원정대가 결국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에서의 분규(紛糾) 진압(鎭壓)에 실패하고 돌아와 단군조선으로부터 정주(定住)를 허락받은 곳은 동쪽 최북단의 아무르(Amur) 강 유역이었다. 아카드(Akkad)라 불린 당시 군단(軍團)을 함께 구성했던 아슈르(Assur; Ashur) 병사들이 메소포타미아에 대부분 그대로 눌러앉은 것에 반해 아무르(Amur)인들은 원래 살던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으로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었다. 수메르인들부터 집도 도시도 모르는, 날고기를 먹는 짐승의 본능을 지닌 파괴자 들이라고까지 기록될 정도로 원성(怨聲)을 자아내며 분규(紛糾) 해결 임무에 실패하고 돌아온 그들은 그래서 고요하고 정숙하게 오그라들어(肅) 있어야 했고 몸가짐과 언행을 삼가고(愼) 살아야 했다. 그런 연유로 숙신(肅愼)이라 불리던 그들은 당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금와(金蛙)의 동부여(東扶餘)에 들어와 많이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한(漢) 나라가 동부여(東扶餘)를 약화시키려 접근한 거였다. 인공적인 차(茶) 나무 재배 성공과 이를 통해 흉노(匈奴)의 분열과 복속(服屬)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부왕(父王) 선제(宣帝)를 이어 기원전 48년에 한(漢) 나라 제위(帝位)에 오른 원제(元帝)는 변한(卞韓)이 서라벌의 박혁거세에게 기원전 38년 항복했다는 보고를 받자 부여와 흉노와의 연합을 완전히 붕괴(崩壞)시킬 대책을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서라벌의 박혁거세가 왜(倭)의 찻잎을 긴압차(緊壓茶)로 가공한 후 동부여(東扶餘)의 금와(金蛙)에게 보내는 육로(陸路)와 해로(海路)의 수송로(輸送路)를 그리고 동부여에서 흉노(匈奴)로 서라벌의 차(茶)가 전달되는 무역로(貿易路)를 교란(攪亂)하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58년부터 부여에서 흉노로 운송되는 차(茶)들을 약탈하고 무역로(貿易路)를 파괴(破壞)하는 작전에 참여하고 있던 추모(鄒牟)가 선발되었다.
고구려의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의 추(鄒) 자는 그가 아무르(Amur)인의 후예(後裔)라는 것을 알려주는 글자다. 추(鄒) 자의 동의어에는 추(邹) 자가 있는데 두 글자의 공통인 우부방(⻏) 자를 빼면 각각 꼴 추(芻; 刍)만 남게 된다. 꼴 추(刍) 자는 ⺈(칼도 도)와 ⺕(돼지 머리 계)로 돼지머리에 탈(칼)을 씌우고(채우고) 차(茶) 나무를 찾아다니던 우가리트(Ugarit) 아무르인(Amorite)의 후예(後裔)라는 걸 알려주는 글자였다. 추모(鄒牟) 자의 모(牟) 자는 소(牛)를 타고 앉은 고깔모자를 쓴 사람들을 상징(象徵)하는 글자였다. 결국 추모왕(鄒牟王)은 숙신(肅愼)에서 건너온 사람이었다는 말이고 또한 고깔모자(弁帽)를 자신들의 표식(標式)으로 사용하는 프리기아(Phrygia)인들과 관련(關聯)이 있다는 의미였다. 추모왕(鄒牟王)의 출생과 관련해 그 이름을 함께 드러내는 해모수(解慕漱)와 해부루(解夫婁)에 쓰인 해(解) 자는 모두 소(牛)를 죽여 뿔을 도려낸다는 뜻을 가진 글자인데 이를 도상학(圖像學; Iconology; Iconography)에서는 폭풍우(暴風雨)의 신(神) 엔릴(Enlil)을 죽이는 것을 의미했다. 엔릴(Enlil)은 메소포타미아와 레반트(Levant)에서는 불소(Bull)로 이집트에서는 숫양(Ram)으로 상징되는, 차(茶) 나무가 싹을 틔고 땅에 뿌리박고 자라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질소비료를 만들 수 있는 벼락과 비와 바람을 만들어 주는 신(神)이었다. 또한 소(牛)와 양(羊)으로 상징되는 엔릴신은 소와 양이 해양(海洋)이 아닌 초원(草原)의 동물이었기에 양과 물고기로 상징되는 엔키신(Enki 神)과 상극(相剋)처럼 대비되는 신(神)이었다. 그런 엔릴을 상징하는 소(牛)를 죽인다는 것은 초원이 아니라 해양(海洋)을 더 지향(指向)한다는 뜻이었다. 엔릴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해상 무역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카드(Akkad)인들과 아무르(Amur)인들은 엔릴(Enlil)과 마르둨(Marduk) 신(神)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다. 엔릴과 마르둨은 모두 황소로 상징되는 폭풍우의 신(神)들이었다. 가나안(Canaan)과 레반트, 시리아 지역의 사람들에게 가장 숭배되는 신(神)은 바알(Baal) 신이었고 이 또한 폭풍우의 신(神)으로 황소로 상징되어 숭배되었다. 이런 곳에서 바다를 창조한 야훼를 숭배한다는 것은 해양무역을 추구한다는 표식(標式)이었고 따라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빌론 유수(幽囚)를 일으킨 연유였다. 육상무역과 해상무역의 대립은 이토록 오래고 질긴 피의 역사로 점철된 대립의 역사였다. 추모왕(鄒牟王)은 아무르인들의 후예였으나 하백(河伯)의 손자이기도 했다. 훗날 추모왕(鄒牟王)이 박혁거세의 최후와 비슷하지만 이유(理由)는 다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육상(陸上) 무역만을 고집해야 했으나 하백(河伯)의 손자답게 옥저(沃沮)를 통해 해상무역의 유용성을 알아 해상무역도 적극 추진한 죄 때문이었다. 함께 해상무역을 추진한 소서노(召西奴)와 그녀 소생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그래서 추모왕이 시신(屍身)도 없는 죽음으로 생을 마치자 근역(槿域)으로 망명하게 된 연유였다. 한(漢) 나라 성제(成帝)가 추모왕(鄒牟王)에게 원한 건 부여와 흉노 연합을 지속시키는 서라벌의 차(茶)를 언제 어디서든 강탈해 서라벌의 차(茶)가 부여를 통해 흉노에게 전해지지 못하게 하라는 거였다.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전문(鐫文) 시작 부분에 지워져 있는 다섯 개의 글자는 추모왕(鄒牟王)에게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명령을 한 사람의 존재가 새겨져 있던 부분이었다. 漢孝成皇帝.
朱蒙乃與鳥伊 摩離 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虎水(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이에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의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호수(개사수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압록강 동북방에 있다)에 이르렀다…朱蒙行至毛屯谷(魏書云至普述水)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默居. 而不言姓. 주몽이 모둔곡(위서에는 보술수에 이르렀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장삼을 입었고,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성과 이름이 무엇인가? 삼베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재사라고 대답했으며, 장삼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무골이라고 대답했고, 수초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묵거라고 대답하면서 성은 말하지 않았다…與之俱至卒本川. 魏書云至紇升骨城. 그들과 함께 졸본천(위서(魏書)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렀다)에 이르렀다.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그들은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공격하기가 험하고 방어하기는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려 하였다.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고를 성씨로 삼았다. 一云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별세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설도 있다. 時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世二十一年甲申歲也. 이 해에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王見沸流水中, 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答曰, 我是天帝子, 來都於某所.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可乎. 王忿其言, 因與之鬪辯, 亦相射以校藝, 松讓不能抗.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 13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제일(第一 ) 시조(始祖) 동명성왕(東明聖王) 중에서
부여(扶餘)에서 흉노로 전달되는 서라벌의 차(茶)들을 탈취(奪取)하고 불 지르는 폭동을 주도했던 추모(鄒牟)는 곧 부여군(東扶餘軍)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끝내는 부여(扶餘)를 탈출해야 했다. 부여(扶餘)를 탈출할 때 추모왕이 건넌 강을 광개토대왕릉비는 부여(夫餘)의 엄리대수(奄利大水)라고 했고 삼국사기는 개사수(盖斯水)라고도 불리는 엄호수(淹虎水)라고 기록했다. 엄리대수(奄利大水)를 엮어진 갈대와 모여든 거북이(龜) 떼 도움으로 건넌 추모왕(鄒牟王)이 바로 비류곡(佛流谷) 홀본(忽本)에 도읍을 정했다는 광개토대왕릉비와 달리 위서론(僞書論)에 시달리는 삼국사기는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과 함께 물고기(魚)와 자라(鼈)들의 도움으로 엄호수(淹虎水)를 도하한 주몽(朱蒙)이 도하 후 곧장 비류곡(佛流谷)에 도착한 게 아니라 위서(魏書)에서 보술수(普述水)라고 기록한 강이 흐르는 모둔곡(毛屯谷)에 도착했다고 기록했다. 모둔곡(毛屯谷)에서 성(姓)은 말하지 않고 이름만 밝힌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默居)라는 세 현인(賢人)을 만난 주몽(朱蒙)이 그들에게 각각 성(姓)을 하사(下賜)하고 함께, 위서(魏書)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하는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했다. 그렇다면 주몽(朱蒙)은 오이, 마리, 협보와는 엄호수(淹虎水)를 함께 건넜고 그들에다 재사, 무골, 묵거의 세명을 더해 보술수를 다시 건넜으며 마침내 위서에서 흘승골성이 있는 졸본천에 이르렀다는 주몽(朱蒙)의 부여 탈출 과정을 삼국사기는 자세히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이 기록한 논형(論衡)에서 부여(夫餘)의 개창자인 동명왕(東明王)은 탁리국(橐離國)에서 탈출해 물고기(魚)와 거북이(龜) 떼의 도움을 받아 도올강(洮儿河; Taoer river)을 무사히 건너 지금의 치치하얼을 도읍지로 하여 부여(夫餘)를 개국했다. 제제합이(齊齊哈爾; Qiqihar 치치하얼)에서 취합(聚合)된 근역(槿域)의 차(茶)들은 부여가 대흥안령 산맥(大興安嶺山脈)의 밀림 속에서 압록강(鴨綠江; Yalu; 야누; 淹虎)을 따라 개척한 무역로를 따라 호륜패이(呼倫貝爾; Hulunbeier 후룬베이얼)로 운송되어 몽골고원으로 보내졌다.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 부여(夫餘) 조에서 진수(陳壽)가 위략(魏略)에서 말하길 그 나라는 몹시 부유하니 선대부터 왔다. 한 번도 파괴된 적이 없다(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고 기록한 연유가 바로 이 대흥안령 산맥(大興安嶺山脈)에 부여(夫餘)가 개척한 Yalu Road(압록 무역로)에서 나오는 이익때문이었다. 대흥안령 산맥은 고산준령(高山峻嶺)은 아니지만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밀림으로 이루어져 있어 길을 내기도 어려웠고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려운 지역이었다. 길을 내어도 금세 관목(灌木)들로 길(road)이 다시 메워져 버리는 지역이었다. 부여 시조(始祖) 동명왕이 탁리국(橐離國)에서 도망쳐 나올 때 남쪽 도올강(逃儿江 Taoer)을 도하(渡河) 한 것도 대흥안령 산맥의 밀림을 말을 타고 도주(逃走)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기후 한랭화로 인해 그렇지 않지만 기후 온난화 시기의 대흥안령(大興安嶺山脈)은 밀림( 密林) 그 자체인 지역이었다. 주몽(朱蒙)이 부여를 탈출할 때 도하(渡河)한 압록(鴨綠)은 야루(Yalu)라고 발음되나 발음기호 [yalu]만 따로 보면 야누(Yanhu)라고 발음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압록강을 엄호수(淹虎水)라고 기록한 것은 바로 이 야누라고 하는 발음을 한자로 옮긴 데서 기인된 것이었다. 엄호수(淹虎水)의 엄(淹)은 발음이 얀[Yan]이고 호(虎)는 후[hu]인데 두 글자를 함께 이어 발음하면 연음법칙이 적용되어 얀[yan]이 야[ya]가 되고 후[hu]가 누[nhu]가 되어 발음되었다. 압록(鴨綠)이 엄호(淹虎)로 바뀌어 기록된 연유였다.
삼국사기에 엄호수(淹虎水)로 기록된 압록강(鴨綠江 Yalu river)의 서쪽에는 차(茶) 아이(儿)를 뜻하는 차올강(茶儿江 Chaoer river)이 압록(Yanhu) 강과 똑같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데 이 차올강(茶儿江)의 다른 이름은 주올강(朱儿江 Chuoer river)이다. 주몽(朱蒙)이 도하한 강이라 해서 주(朱) 자를 차(茶) 대신 쓴 강이름이다. 주올강(朱儿江)을 구글 지도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시산공리구(ShiSanGongLiGou 十三公里沟)라는 지명(地名)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곳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와 함께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을 얻어 압록강(엄호수)을 도하한 주몽이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默居)라는 세명의 현인(賢人)을 만났다는 보술수(普述水)라는 강이 흐르는 모둔곡(毛屯谷)이다. 지금은 주몽(朱蒙)이 세명의 현인(賢人)을 만난 곳이라는 사실은 기억조차 못하기에 아무 의미 없는 열 십(十) 자를 썼지만 그러나 원래는 주몽(朱蒙)이 세명의 현인(賢人)을 만났다는 의미의 시(視) 또는 능력을 확인했다는 의미의 시(試) 자였다. 삼국사기에서도 주몽(朱蒙)이 그들에게 성(姓)과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들인지 물었다고(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기록해 놓고 있다. 이렇게 세 현인(賢人) 즉 삼공(三公)을 지금의 주올강(朱儿江 Chuoer river)인 보술수(普述水) 강변에 있는 지금의 십삼공리구(十三公里沟)인 모둔곡(毛屯谷)에서 만난 이후 주몽(朱蒙)은 그들과 함께 더 서쪽으로 나아가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기록한 졸본천(卒本川)에 이르게 되었다. 위서(魏書)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다다랐다고 되어있다고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전했다.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의 전문(鐫文)을 해석한 것을 보면 주몽은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의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고 되어 있으나 然後造渡 於佛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라고 새겨져 있는 비문(碑文)과 삼국사기의 해당 내용을 보면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에 추모왕(鄒牟王)이 쌓은 산성(山城)은 없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도 도읍을 세웠다는 건도(建都)가 새겨져 있지 건성(建城)이라고 새겨져 있지 않다. 추모왕은 단지 비류곡 홀본 서성산(西城山) 위(上)에 도읍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비류곡홀본서성산이건도언(佛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이라는 구절은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아 도읍을 건설했다는 뜻이 아니라 홀본의 서성산(西城山)이라고 불리는 산 위(上)에 도읍했다는 뜻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삼국사기를 보면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廬)을 짓고 살았다(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고 되어 있다. 농막(廬)을 짓고(結) 사는 형편에 큰 돌들을 쌓아 올려 완성하는 성곽(城廓) 공사를 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기록에 나타난 서성산(西城山)은 서성(西城)이 원래 있던 산(山)을 말하는 것인데 이때 서성(西城)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쪽과 서쪽을 가르는 기준은 아얼산(阿爾(尔)山 Aershan)이었다.
부여(夫餘)의 여(余)가 나 여(余) 자를 쓰고 호륜패이(呼倫貝爾)와 제제합이(齊齊哈爾) 같은 지역의 이(爾)는 너 이(爾) 자를 쓰는 건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었다는 함께 먹고살게 되었다(哈)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었다. 아이산(阿爾山) 은 나인 아(阿)가 같이 배달(背達)한 너인 이(爾)와 다시 만나 함께 뭉친(合) 우리가 제삼자인 이것(斯)들과 같이 사는 아사달(阿斯達)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이 도읍지(都邑地)를 부를 때 쓰는 서울을 수이(首爾)라고 한자로 옮기는 연유다. 주몽(朱蒙)이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와 함께 건넌 강이 엄호수(淹虎水)인데 이를 일명(一名) 개사수(盖斯水)라고도 한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를 말한 것이었다. 너(爾)와 내(余)가 합친 우리가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默居) 같은 제삼자들인 이것(斯)들과도 뭉쳐 모두 함께(盖)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이름에서 보여주는 강이 개사수(盖斯水)다. 덮다, 하늘, 모두라는 뜻을 가진 개(蓋) 자는 합치다, 모두라는 뜻을 가진 합(合) 자와 중국어 발음이 [ge]로 동일하다. 기록에 나온 6명의 신하들과 함께 주몽이 도착한 곳은 졸본천(卒本川)이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곳은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공격하기에는 험하고 방어하기에는 견고했다고 한다. 지금 몽골 공화국의 가장 동쪽 지역과 중국 내몽고 자치주가 국경을 이루는 지역에 있는 할힌골(Khalkhingol)을 살펴보면 돌로 이루어진 서성산(西城山)의 서쪽으로 그 지역에서는 유일한 푸르른 농경(農耕) 지역이 지금도 펼쳐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추모왕(皺牟王)은 드디어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위서(魏書)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렀다.(與之俱至卒本川.(魏書云至紇升骨城.). 그들은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험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자 했다(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라는 기록이 나온 연유였다. 그 후 국호를 고구려라 했고 이에 따라 고(高)를 성씨(姓氏)로 삼았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홀본(忽本)과 졸본(卒本) 그리고 흘승골성(紇升骨城)은 추모왕(鄒牟王)이 자리 잡은 할힌골(Khalkhingol) 서성산 지역이 수메르(Sumber)라는 산스크리트어 지명을 가진 지역과 후수(Hushuu)라는 몽골어 지명 그리고 수메(Sume)라는 산스크리트어 지명을 가진 지역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기에 생긴 혼란이었다. 수메르(Sumber; Sumer)와 수메(Sume)라는 고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나온 전문용어(Terminology)를 알 길 없었던 김부식 시대의 고려인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혼란이었다. 다행히도 자신들의 선입견에 맞지 않으면 사서(史書) 원본(原本)도 없애 버리는 일부 중국인들과는 달리 선조(先祖)들이 부르는 명칭을 함부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지켜 온 몽골인들에 의해 또한 자기들이 지어낸 말이 아닌 것은 대체로 원음 그대로 전승(傳承)될 수 있도록 음차(音借)와 이름의 뜻으로 기록한다는 원칙을 지켜 온 많은 중국인들에 의해 홀본과 졸본, 흘승골성(紇升骨城)은 몽고의 최동부 지역인 눔룩(Numrug)에 그대로 남아 있는 현재 지명들로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몽고 공화국의 눔룩 지역을 할힌골(Khalkhingol) 지역과 함께 남북으로 살펴보면 할힌골 지역에 숨베르(Sumber)라는 지명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숨베르는 수메르(Sumer)를 뜻하는 지명이다. 수메르(Sumer)는 수메(Sume)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때의 수메(Sume)는 문명을 발전시키는데 반드시 있어야 할 과학, 기술, 건축, 예술과 같은 분야의 발전에 필요한, 신(神)들만이 가지는 특별한 능력을 신(神)들이 인간들에게 내려줄 때 그 능력을 받아낼 수 있는 장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장치가 바로 정수리였고 그래서 우리 민족은 항상 정수리 부분의 머리카락을 깨끗이 밀고 주변 머리카락을 정수리로 모은 후 묶어 상투를 틀어 안테나처럼 신(神)들의 능력을 수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흘승골성(紇升骨城)이 뜻하는 것이 바로 이 수메(Sume)가 이루어지는 곳이란 즉 수메르라는 뜻이었다. 위서(魏書)에 기록된 흘승골성(紇升骨城)의 흘(紇) 자가 묶다, 동이다라는 뜻이고 승(升) 자가 오르다, 이루다의 뜻이며 골(骨) 자가 중심, 골수(骨髓)를 뜻하는 연유다. 성(城)은 물론 수메(Sume)가 이루어지는 즉 머리를 묶어 올리고 골수(骨髓)를 열어 신(神)들의 특별한 능력(能力)을 받는 흘승골(紇升骨)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뜻하고 있다. 삼국사기가 기록한 졸본천에 이르렀음을 위서(魏書)가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다다랐다고 기록한 연유다.
흘승골성(紇升骨城) 즉 수메르(Sumber)라는 지역에는 아얼산(Arxan 阿爾山)에서 흘러내리는 하라河(Halaha river)가 배달강(背達江)이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할힌골(Khalkhingol)이라는 이름으로 흐르다가 눔룩(Numrug)에서 흘러나오는 졸본천(卒本川)이라는 비류수(沸流水)와 합쳐져 패수(浿水)라는 이름으로 패이호(貝爾湖 Buir)로 흘러가는데 이 졸본천은 비류수(沸流水)의 중류 지역에 있는 후수 수메(Hushuu Sume)라는 곳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지금도 그 지명(地名)을 지도에 선명히 남기고 있는 후수(HuShuu) 수메(Sume)를 한자로 옮기면 홀졸(忽卒) 본(本) 이 된다. 중국어로 후[hu]라고 발음되는 한자가 홀(忽) 자이다. 중국어로 수[shuu]로 발음되는 한자는 졸(卒) 자다. 졸(卒) 자의 발음기호는 [cu]인데 발음은 쿠가 아니라 수라고 발음된다. 수메(Sume)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神)들이 사람들에게 특별한 자신들의 능력을 수여(授與)하는 것을 사람들이 접수(接受)하는 것이기에 근원(根源), 원천(源泉), 시초(始初)라는 뜻의 본(本) 자를 쓴 것이었다. 졸본(卒本)이라고 했다가 홀본(忽本)이라고도 하는 연유(緣由)가 여기에 있었다. 처음 주몽(朱蒙) 일행이 도착한 수메르(Sumber)라는 곳과는 달리 후수 수메(Hushuu Sume)에는 아들이 없던 왕이 다스리던 졸본부여(卒本扶餘)라는 나라가 있었다. 삼국사기는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을 때 그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별세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설도 있다(一云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고 자세히 그 경위를 기록해 놓았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분명히 다른 곳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흘승골성(Sumber)에서 비류수(沸流水)가 흘러 내려오는 눔룩(Numrug) 지역으로 올라가다 보면 발견하는 곳이 홀졸본(忽卒 本 Hushuu Sume)이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홀졸본(忽卒 本) 즉 졸본부여를 추모왕(鄒牟王)이 합병했을 때가 기원전 37년이라고 밝혀 놓았다. 이 해에 주몽의 나이는 22세였으며 한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時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世二十一年甲申歲也)고 기록해 고구려가 언제 어디에서 건국했는지 삼국사기는 정확히 했다. 그러면서 이 해에 추모왕이 홀졸본(忽卒 本)으로 흘러내리는 비류수(沸流水)의 상류 지역을 즉 눔룩(Numrug) 지역을 탐사하고 정복활동을 벌였음을 연이어 기록해 놓았다. 삼국사기는 왕은 비류수에 찻잎(菜葉)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王見沸流水中 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고 기록해 그 탐사의 계기가 된 것이 비류수에 떠내려 온 찻잎(菜葉) 때문이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탐사 결과 그곳은 송양(松讓)이라는 왕이 다스리는 비류국(沸流國)이었다. 눔룩(Numrug) 지역을 통제하는 이 비류국(沸流國)을 추모왕(鄒牟王)이 반드시 합병(合倂) 해야 하는 이유는 눔룩(Numrug) 남쪽지역 때문이었다.
부여(扶餘)가 서라벌의 차(茶)를 흉노에게 전달하는 가장 주된 무역로였기 때문이었다. 산세가 험하지는 않으나 울창한 밀림(密林)이 꾸려진 대흥안령 산맥은 차(茶)를 실은 낙타와 말이 안전하게 다니는 길을 여간해서는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은 지역(地域)이었다. 길을 새로 만들라치면 다음 해에는 어김없이 관목(灌木)들이 자라나 낙타(駱駝)들이 다닐 수 없는 길이 되어버리곤 했다. 따라서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이 아얼산(阿爾山)을 끝으로 더 이상 밀림을 만들어내지 않는 눔룩 남쪽 지역은 대흥안령 산맥에서 차(茶)를 가득 실은 낙타들이 안전하게 교통 할 수 있는 최적의 지형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 퍼져있는 나지막한 산들을 카라반들에게 관세(關稅)를 받는 관인산맥(關印山脈)이라 불렀다. 그래서 기원전 210년경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시라무렌(Xar Moron) 강이 흐르는 석림곽륵(錫林郭勒 Xilingol)) 이남지역에서 축출된 얼굴이 토색(土色)인 동호(東胡)가 북쪽으로 도망가 자리 잡은 지역이 이곳이었고 흉노가 차기(次期) 선우(單于)가 될 태자(太子)에게 좌현왕(左賢王)이라 불린 좌도기왕(左屠耆王) 자리를 주어 다스리게 한 지역이었다. 그런 눔룩(Numrug) 지역을 장악(掌握)한 때가 주몽(朱蒙)의 나이 22세 때였으며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기원전 37년)이었다. 패수(浿水)와 발음이 똑같은 비류수(沸流水)가 흐르는 이 지역은 밀림(密林)이 우거진 눔룩(Numrug)이었고 그 남쪽은 카라반들의 낙타들이 오가는 동서 무역로였다.
눔룩(Numrug)은 몽골 북동부 헨티(Henti) 산맥에 있다고 잘못 알려진 몽골족의 성산(聖山)인 보르항 할등(Burkhan Khaldun)이다. 산(山)이라고 하지만 그냥 바위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하는 걸 보면 산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눔룩(Numrug)이 고산준령(高山峻嶺)의 헨티(Henti)보다 보르항 할등(부르칸 할둔Burkhan khaldun) 일 근거는 결정적이다. 칭기즈 칸이 젊은 시절 아버지 예수게이를 타타르에게 잃고 이 산 근처에서 어머니 호엘룬 와 함께 지냈고 메르키트(Mergid) 족에게 습격을 받아 아내 보르테까지 빼앗긴 후에도 보르항 할등(Burkhan Khaldun)의 밀림 속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고 해서 몽골족의 성지(聖地)가 된 곳이기에 더욱 그렇다. 헨티 산맥에 있다고 정설로 되어 있는 보르항 할등(Burkhan Khaldun)을 눔룩(Numrug)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곳이 징기즈 칸의 어머니 호엘룬과 아내 보르테가 태어난 콩기라트(Qonggirad, 弘吉剌) 족의 땅이기 때문이다. 아들 테무진을 자신처럼 콩기라트(Qonggirad, 弘吉剌) 족의 사위로 만들어 주기 위해 콩기라트족의 땅까지 찾아간 예수게이는 혼담을 성사시킨 뒤 그러나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했다. 타타르(Tatar)족은 자신들의 영지 서북쪽에 있었던 예수게이의 보르지긴(Borjigin)족과 동쪽의 콩기라트(Khongirad)족이 연합하면 눔룩 남부를 지나는 무역로의 노른자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들의 영토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지키려 했던 무역로(貿易路)가 지나는 눔룩(Numrug) 남부의 그 땅은 결국 예수게이의 아들 테무진에게 뺏겼고 그들은 오직 살기 위해 쫓아오는 몽골군으로부터 도망쳐 아나톨리아(Anatolia)까지 가야 했다. 우리 민족을 형제라고 말하는 셀주크(Seljuk)와 오스만(Ottoman) 튀르키예가 그곳에 있는 연유였다.
몽골 고원의 많은 부족들이 사돈 맺기를 간절히 원하는 몽골고원의 명문 부족이 콩기라트족(Qonggirad, 弘吉剌)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대흥안령 산맥 동편(東便)에서 몽골고원으로 낙타(駱駝)에 차(茶)를 싣고 나올 때 특별한 자연적 위험 없이 대흥안령 산맥을 횡단(橫斷)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무역로(貿易路)가 콩기라트가 지배하고 있는 지금의 흥안맹(興安盟)과 곽림곽륵(霍林郭勒 Holingol) 사이에 있는 밀림이 없는 고개였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60년 동부여의 금와(金蛙)도 흉노의 좌도기왕(左屠耆王)인 질지선우에게 서라벌의 차(茶)를 이 지역을 통해 대부분 전달했었다. 흉노에게 전달되는 부여의 차(茶)를 약탈(掠奪)하는 것이 임무였던 주몽이 이곳을 노린 것은 당연했다. 주몽(朱蒙)이 졸본부여(卒本扶餘)와 비류국(沸流國)을 차례로 점령하고 추모왕(鄒牟王)이 된 다음 해인 기원전 36년, 흉노의 질지선우(郅支單于)는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탈라스(Talas)에서 한(漢) 나라군과 교전 중 전사(戰死) 했다. 추모왕(鄒牟王)이 얼마나 많이 부여의 차(茶)를 약탈했는지가 증명되는 역사였다.
추모왕(鄒牟王)이 눔룩(Numrug) 남쪽 지역에서 부여(扶餘)가 흉노에게 차(茶)들을 전달하는 루트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능력을 보여주자 한(漢) 나라는 추모왕(鄒牟王)이 부여의 남단부(南端部)를 점령해 남쪽 서라벌에서 북쪽 부여로 올라오는 육로(陸路)까지 봉쇄(封鎖)하도록 했다. 기원전 108년 한(漢) 무제(武帝)가 현토군(玄菟郡)을 설치(設置)해 유지해 오던 지역을 추모왕의 고구려에게 맡긴 것이었다. 추모왕은 육로를 봉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함흥(咸興)과 길주(吉州)를 주축으로 하는 동옥저(東沃沮)를 설치해 예(濊; 원산)와 동예(東濊; 강릉)에서 나진(羅津)으로 올라가는 뱃길도 가로막았다. 거기에 더해 가야강(嘎呀河) 중류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清县)에 북옥저(北沃沮)까지 설치해 나진(羅津)에서 발해(渤海) 시절 동경성(東京城)이 있던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시(寧安市) 동경성진(東京城鎭)으로 전해지는 물류(物流)까지 제한(設置)했다. 함흥과 경성군(鏡城郡)이 중심지였기에 지금은 함경도(咸鏡道)라 불리는 그 지역을 오랫동안 함흥(咸興)과 길주(吉州)가 중심이었다고 함길도(咸吉道)라 불렀던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해상무역에서의 성공은 추모왕의 경력을 파괴했다. 동옥저(東沃沮)와 북옥저(北沃沮)를 통한 해상무역의 참여를 통해 한(漢) 나라의 지원(支援) 중지에 따른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추모왕은 그것 때문에 시신(屍身)도 없이 죽어야 했다. 동부여에서 한(漢) 나라의 원조(援助)로 차무역(茶貿易) 파괴 활동을 해 온 유리(瑠璃) 일파가 해상무역을 통해 서라벌의 차(茶)를 서역으로 공급하는 추모왕을 제거하기 위해 한(漢) 나라의 지원을 받아 졸본부여(卒本扶餘)를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고씨(高氏)가 왕이었던 나라에 해 씨(解氏)가 왕이 된 연유였다. 기마(騎馬) 세력이었던 추모왕이 해상무역에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부여에서 도망쳐 올 때 엄호수(淹虎水)를 건넌 후 만난 삼현(三賢) 중 수조(水藻) 옷을 입고 있었다는 묵거(默居) 때문이었다. 묵거(默居)는 초원로로 유통되는 서라벌의 차(茶)를 구하기 위해 페르시아에서 파견한 인물이었다.
추모왕(鄒牟王)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흘승골성으로 올 때 엄호수(淹虎水; Yalu강)를 건너고 보술수(普述水; Chuoer강)를 건너기 전 모둔곡(毛屯谷)에서 만난 세 사람은 단순한 지역민(地域民)들이 아니었다. 초원로에 차(茶)를 공급하는 부여가 할당해 주는 서라벌의 차(茶)를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파르티아와 쿠샨과 페르시아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 삼국사기는 그들의 옷으로 그들의 출신을 가늠할 수 있도록 기록했는데 삼베옷(麻衣)을 입고 있던 재사(再思)가 파르티아를 위해 온 인물이었고 장삼(衲衣)을 입고 있었다던 무골(武骨)이 대승불교(大乘佛敎; 교종)를 만들어 낸 간다라(Gandara)의 쿠샨(Kushan)을 위해 그리고 수조옷(水藻衣)을 입고 있던 묵거(默居)가 페르시아를 위해 주몽(朱蒙)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흉노의 질지선우(郅支單于)가 추모왕이 고구려를 개국한 지 일 년이 안돼 전사해 버리고 질지선우의 죽음으로 흉노를 통일한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는 한(漢) 나라의 신하가 되어버리자 그동안 알뜰하게 고구려를 지원해 주던 한(漢) 나라는 이내 태도를 바꾸어 버렸다. 차무역로(茶貿易路)의 패권(霸權)을 다투던 흉노는 속국(屬國)처럼 되어버렸고 흉노를 통해 차무역로(茶貿易路)를 확보해 기염(氣焰)을 토하던 부여는 이제 차(茶)를 유통시킬 통로가 없어진 채 끈 떨어진 연(鳶)처럼 동쪽에 처박혀 있었으니 한(漢) 나라 황제에게 걱정이 있을 리가 없었고 고구려는 이제 토끼 죽은 사냥개 신세로 전락할 일만 남았었다. 살아남기 위해 옥저(沃沮)를 통해 묵거(默居)를 내세워 페르시아와의 해상무역을 진흥시켰건만 한(漢) 나라는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왕실이 고씨(高氏)에서 해 씨(解氏)로 바뀐 것은 추모왕의 부여에 대한 업보(業報) 때문이었다.
기원전 37년 추모왕(鄒牟王)이 부여의 남쪽에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고 서라벌에서 부여로 연결된 주요 육상 무역로(貿易路)에 약탈을 감행하자 서라벌에서는 동해 해상무역로(海上貿易路)의 물동량(物動量)을 대폭 증가시켜 부여로 보냈다. 고구려(高句麗)가 이에 한(漢) 나라의 지원을 받아 동옥저(東沃沮)를 세워 함흥(咸興)과 길주(吉州)에서 서라벌에서 보낸 차(茶)를 싣고 원산(元山; 東濊)을 떠난 무역선들을 차례로 해적(海賊)하자 결국 흉노에게 전달되는 차(茶)는 형편없이 줄어들고 말았고 질지선우(郅支單于)는 버티지 못했다. 차(茶)를 마시지 못하면 흉노는 말을 탈 수 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벽돌 모양으로 긴압(緊壓)되어 몽골(蒙古) 고원과 서장(西藏) 고원에 공급되는 전차(塼茶)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생명줄이나 다를 바 없는 약품이었다. 양(羊)의 젖과 고기로만 살아가는 유목민인 그들에게 절대 부족한 신선(新鮮)한 야채(野菜)가 줄 수 있는 비타민을 그들에게 제공해 주는 유일한 원천인 차(茶)는 그곳 사람들의 기본적인 건강과 활력을 유지하게 해주는 마법의 약이었다. 기원전 36년 질지선우(郅支單于)는 후일 고구려(高句麗) 유민(遺民)이었던 당나라 고선지(高仙芝)가 사라센(Saracen; 大食國)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던 탈라스(Talas)에서 한(漢) 나라 군사와 맞붙어 전사(戰死)했다. 탈라스(Talas)는 천산북로(天山北路)의 중요한 역참(驛站)인 타라즈(Taraz)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곳이어서였다. 이 소식은 서라벌의 박혁거세(朴赫居世)에게도 전해졌고 위험을 느낀 박혁거세는 그 해 서라벌에 성곽(城廓)을 축조(築造)해 혹 있을지 모를 침략에 대비했다. 그 성(城)이 금성(金城)이었다. 흉노의 질지선우(郅支單于)가 전사하고 이후 흉노를 통일한 호한야선우가 한나라에 복속해 버리자 부여의 활발했던 국제적 움직임은 단절되었고 따라서 한(漢) 나라로부터 고구려(高句麗)에게 의뢰(依賴)되었던 흉노로 가는 차(茶)를 약탈하는 일감도 끊어져 버렸다. 기원전 69년 부여의 과감한 서라벌 경략(經略)에 의해 촉발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은 고구려의 건국(建國)과 질지선우의 죽음으로 잦아들게 되었다.
기원전 36년 흉노가 한(漢) 나라에 복속하자 서해무역망(西海貿易網)에서 월지국(月支國)을 대신한 마한(馬韓)과 함께 핵심을 이루었던 낙랑(樂浪)이 서라벌에서 독점하고 있는 왜(倭)의 찻잎을 다시 낙랑으로 수출(輸出)할 것을 사로국(斯盧國)에 요구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박혁거세가 여전히 동부여(東扶餘)로의 수출만을 고집하는 서라벌의 기존 세력들의 눈치를 보는 사이 낙랑(樂浪)은 군사들을 출병(出兵)시켰다. 기원전 27년의 일이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서라벌은 낙랑(樂浪)으로의 차(茶) 수출에 동의했고 낙랑군은 철군(撤軍)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한(馬韓)에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대월지(大月氏)가 흉노의 노상선우에 의해 기원전 169년, 한양(漢陽; 지금의 天水)에서 축출된 후 대월지(大月氏)의 근역(槿域) 무역기지였던 월지국(月支國)은 그 영향력을 잃어 소리 없이 철수했는데 그때부터 대신 그 자리를 이어받은 마한(馬韓)이 낙랑과 함께 서해무역망(西海貿易網)의 중추(中樞)로 역할해 왔었다. 그러나 한(漢) 나라의 차(茶) 나무 인공재배(人工栽培)에 맞서 부여가 박혁거세를 파견해 서라벌을 세운 후 왜(倭)의 찻잎을 독점(獨占)했을 때는 짐짓 못 본 척하며 자세를 낮추고 있던 마한(馬韓)이었었다. 그런 마한이 고구려의 추모왕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신의 존재를 확연히 드러낸 거였다. 기원전 19년 호공(瓠公)이 어쩔 수 없이 신라의 사절(使節)로 방문하자 마한왕은 왜(倭)의 찻잎을 조공(朝貢) 하지 않는 서라벌의 처사에 격앙하며 사신(使臣) 자격의 호공을 처형하려 하기까지 했었다. 기원전 69년, 부여가 서라벌을 경략(經略)함으로써 촉발(觸發)된 전 세계적 격변이 흉노의 몰락으로 인해 또 다른 소용돌이로 번지고 있었다.
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세상의 왕위를 즐기지 않을 무렵에 하늘에서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黃龍負昇天 顧命世子儒留王 황룡이 왕을 업고 하늘로 올라갈 때 세자인 유류왕을 돌아다보고 명령하여 당부하기를 以道與治 도로써 나라를 다스려라 - 廣開土境平安好太皇碑文(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문) 중에서
토끼사냥이 끝나면 토끼는 죽고 사냥개는 삶힌다. 추모왕(鄒牟王)이 삶힌 건 기원전 19년이었다. 그건 동옥저(茶)를 이용해 해상무역(海上貿易)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추모왕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이 많았다. 그동안 서라벌의 차(茶)가 흉노에 전달되지 못하도록 고구려에 많은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던 한(漢) 나라가 기원전 36년 흉노의 몰락 이후에는 지원(支援)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고구려는 그 후 심각한 경제 위기를 계속 겪어야만 했었다. 이런 경제난(經濟難)을 타개(打開)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어 고구려가 택한 것은 옥저(沃沮)를 통한 해상무역으로 서라벌의 차(茶)를 무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漢) 나라는 인공재배를 통해 한(漢) 나라에서 생산된 차(茶)로만 전 세계 차(茶) 시장을 독점할 계획이었다. 따라서 서라벌에서 만든 차(茶)가 한(漢) 나라의 통제 없이 어떤 경로로든 파르티아로 무역되는 것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동안의 공로를 참작한 계속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거래되어서는 안 될 서라벌의 차(茶)가 무역로에 계속 올라오자 기원전 19년, 동부여에서 암약하고 있던 친한(親漢) 세력을 파견해 일거에 고구려를 무력으로 접수해 버렸다. 해상무역(海上貿易)에 앞장섰던 소서노(召西奴)가 기원전 18년에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데리고 남쪽으로 도망쳐야 했던 연유였다.
케를렌(Kerlen) 강 중류지역에 있던 탁리국(橐離國)이 계속된 기후 변화와 그로 인한 건조화(乾燥化)로 차무역로(茶貿易路) 관리권(管理權)및 가축(家畜)등 기반(基盤)을 모두 잃고 남하(南下)해 세운 고리국(高離國)은 지금의 코르고린(Khorgoljin)에 있었는데 그 지역은 동호(東胡)의 오환(烏丸)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코르고린이란 지명 자체가 절름발이(Khor)가 된 고리인(goljin)이란 뜻이었다. 코르(Khor)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절름발이가 되다, 활력을 잃다란 뜻이고 고린(goljin)이란 고리인(高離人)이라는 뜻이었다. 중국 고대음으로 ljie는 지금의 북경음으로 li(리)였다. 그런 코르고린의 서쪽에는 사인(Sain) 추울간(Chuulgan) 우울(uul)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은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건너온 유리(瑠璃) 일당과 전투하다 자결(自決)한 곳이었다. 산스크리트어로 사인(Sain)은 성인(聖人 Holy one)을, 추(Chu)는 추모왕을, 울(ul)은 불태우다 그리고 간(gan)은 왕위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뜻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있는 우울(uul)은 잘리다(cut off)란 뜻이었다. 사인 추울간 우울(Sain Chuulgan Uul)이라고 몽고인들이 아직도 그곳을 부르는 것을 보면 졸본성에서 암살을 피해 가까스로 도망친 추모왕이 자신을 추적해 온 유리(瑠璃)가 이끄는 군사들과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스스로 불에 뛰어든 곳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한(漢) 나라에게 추모왕(鄒牟王)을 확실히 죽였다는 증거를 보여줘야 하는 유리(瑠璃) 일당이 불타는 추모왕의 몸에서 불을 끈 뒤 목을 잘랐다는 것은 지명(地名)의 마지막 부분(uul)에서 유추할 수 있다. 추모왕이 시신(屍身)도 없는 장례(葬禮)를, 자신이 사용하던 옥채찍만 들어간 능(陵)을 갖게 된 연유였다. 황룡(黃龍)을 황실(皇室)의 표식(標式)으로 삼은 것은 한(漢) 나라가 처음이었다.
기원전 4년엔 동옥저(東沃沮)가 20 필(匹)의 말까지 보내며 차(茶) 무역의 확대를 정중히 요구하고 있었다. 부여와 흉노라는 후견(後見) 세력이 사라진 서라벌엔 각기 자신들이 가진 힘과 배경을 내보이며 서라벌의 차(茶)를 더 많이 가져가려는 노골적인 경쟁(競爭)이 전쟁 일보 직전의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동옥저의 살림은 서라벌의 차(茶)를 얼마나 많이 중계(中繼)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한(漢) 나라 감시(監視)의 대상이 된 해로(海路)가 아닌 육로(陸路)로 차(茶)를 운송하기 위해 서라벌로 동옥저(東沃沮)는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우수한 말들을 보낸 것이었다. 20 필(匹)이었다고 하니 동옥저(東沃沮)가 한 해 서라벌과 거래하기를 원하는 차(茶)의 양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지금 기준으로 한 마리의 말이 수레로 실어 나를 수 있는 화물의 양이 2톤이라고 하니 단순 계산으로는 한 해 40톤의 차(茶) 거래를 원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한(漢) 나라의 지원이 끊긴 고구려와 동옥저는 한나라의 감시까지 받게 된 상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었다. 추모왕을 암살하고 왕이 된 유리(瑠璃)도 국가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옥저를 동원해 서라벌의 차(茶)를 들여오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카라반들이 부여에서 몽골고원으로 나가는 눔룩(Numrug) 남부 지방을 여전히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부여의 협조가 절실했던 고구려의 유리왕(瑠璃王)은 배신하지 않겠다는 거래 안전을 위한 담보를 요구하는 동부여의 대소왕(帶素王)에게 자신의 태자(太子) 도절(都切)을 볼모로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겁이 난 태자 도절은 이 일로 병을 얻어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동부여와 고구려의 연대(連帶)를 파괴하려는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서라벌의 차(茶)를 더 많이 차지하려는 간계 때문이었다.
유리왕(瑠璃王)의 국가 존립을 위한 고육지책은 서기 3년 서라벌의 박혁거세에 대한 한(漢) 나라 내에 조직되어 있던 오래된 페르시아 상방(商幫)이 보낸 탈해(脫解) 일당과 한(漢) 나라에서 직접 보낸 자객(刺客)들의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더욱 위험한 단계로까지 치달았다. 서라벌까지 장악하여 전 세계 차(茶) 생산과 유통을 독점해 전 세계 차(茶) 시장을 홀로 차지하겠다는 한(漢) 나라의 야욕에 분노한 유리왕(瑠璃王)이 서기 3년 눔룩 남쪽 지방 즉 관인 지역의 차무역로(茶貿易路) 관리권(管理權)은 물론 요하 지역의 차무역로(茶貿易路) 관리권까지 넘볼 수 있는 지금의 호링골(Holingol)인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遷都)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국내성을 참을 수 없다는 뜻의 불내성(不耐城)으로 부르는 연유였다. 그러나 한나라와의 전쟁만큼은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고 싶었던 유리왕은 한나라에 대해 호전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았던 태자 해명(解明)을 그래서 자결케 해야만 했다. 황수(潢水)를 지나가는 카라반들을 감제(瞰制) 하기 위해 국내성(Holingol)으로 진출한 유리왕 대신 관인(關印) 무역로를 지키는 졸본성을 책임졌던 용맹한 해명은 부왕인 유리왕의 명령으로 서기 9년에 자결해야 했다. 서라벌의 박혁거세는 서기 4년에 결국 몸이 다섯 개로 찢겨 죽었다. 그렇게 그들은 죽음을 불사(不辭)하며 국익(國益)을 지키려 노력했다.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의 희생은 언제나 거룩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瑠璃明王) 조에는 태자 해명의 죽음에 대한 전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약소국이나 긍지와 자존을 지키며 나라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피눈물이 오늘 일인 듯 생생하다.
二十七年 春正月 王太子解明在古都 有力而好勇 黃龍國王聞之 遣使以强弓爲贈 解明對其使者 挽而折之曰 “非予有力 弓自不勁耳” 黃龍王慙 王聞之怒 告黃龍曰 “解明爲子不孝 請爲寡人誅之” 三月 黃龍王遣使 請太子相見 太子欲行 人有諫者曰 “今國無故請見 其意不可測也” 太子曰 “天之不欲殺我 黃龍王其如我何” 遂行 黃龍王始謀殺之 及見不敢加害 禮送之. 27년(서기 8) 봄 정월에 왕태자 해명은 옛 도읍에 있었는데, 힘이 세고 무용(武勇)을 좋아하였으므로, 황룡국(黃龍國)의 왕이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선물로 주었다. 해명은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부러뜨리며 내가 힘 세기 때문이 아니라 활이 강하지 못한 탓이다고 말하였다. 황룡국왕이 이 말을 듣고 부끄럽게 여겼다. 왕은 이것을 듣고 성을 내며 황룡국왕에게 해명이 자식으로서 불효하니 과인을 위해서 그를 죽여줄 것을 청합니다고 말하였다. 3월에 황룡국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청하였으므로 태자가 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지금 이웃나라가 이유 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고 간하였다. 태자는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황룡국왕인들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는 마침내 갔다. 황룡국왕이 처음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를 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를 갖추어 보냈다.
二十八年 春三月 王遣人謂解明曰 “吾遷都 欲安民以固邦業 汝不我隨 而恃剛力 結怨於國 爲子之道 其若是乎” 乃賜劒使自裁 太子卽欲自殺 或止之曰 “大王長子已卒 太子正當爲後 今使者一至而自殺 安知其非詐乎” 太子曰 “嚮黃龍王以强弓遺之 我恐其輕我國家 故挽折而報之 不意見責於父王 今父王以我爲不孝 賜劒自裁 父之命其可逃乎” 乃往礪津東原 以槍揷地 走馬觸之而死 時年二十一歲 以太子禮葬於東原 立廟 號其地爲槍原. 28년(서기 9) 봄 3월에 왕은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도한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센 것을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 된 도리가 이럴 수 있느냐 그리고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태자가 곧 자살하려고 하자 어느 사람이 말리며 말하였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어 태자께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는데 이제 왕의 사자가 한번 온 것으로 자살한다면 그것이 속임수가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태자는 말하였다. 지난번 황룡국왕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를 가볍게 본 것이 아닌가 하여 활을 당겨 부러뜨려서 보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하다고 하여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타고 달려 찔려 죽었다.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 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곳을 불러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瑠璃明王) 중에서
중국 최초로 동서 무역로(貿易路)를 관리한 서역도호(西域都護)의 탄생과 파르티아(Parthia)가 파견한 소그드인(Sogdian) 금와(金蛙)가 관리하는 동부여 설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왕소군(王昭君)으로 유명한 흉노 호한야(呼韓邪) 선우의 기원전 53년의 한(漢) 나라 종속은 모두 한(漢) 나라 차재배(茶栽培)에 맞선 기원전 69년의 부여의 서라벌 경략(經略)이 불러온 거대한 변혁(變革)이었다. 이 중에서도 금와(金蛙)가 관리하는 동부여(東扶餘)의 등장은 후일 이란 내륙 북부를 대표하는 파르티아와 별개의 세력인 이란 남부 해안 지역의 페르시아(Persia)를 위한 중국 내 무역기지인 다파니국(多婆那國)의 탈해(脫解)와 쿠샨(Kushan) 제국의 후한(後漢)을 상징하는 구지가(龜旨歌)와 가락(駕洛)의 김수로왕(金首露王),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차(茶) 씨앗을 가지고 왔다는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 불교 전래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주는 칠불사(七佛寺)와 김해 명월사(明月寺)의 장유화상(長遊和尙)의 등장과 함께 어우러져 우리 한반도 역사에 다시 한번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민족들이 깊숙이 도래(到來)했었음을 알려주는 역사였다. 다음 편엔 탈해와 김수로왕, 로마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