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解尼師今立 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탈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토해라고도 한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이며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천 리 밖에 있다….其女不忍 以帛卵幷寶物 置於中浮於海. 그 여인이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 不取. 그 상자는 처음에 금관국 해변에 닿았다.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 在位三十九年也. 그 상자는 다시 진한 아진포 어구에 닿았다. 이때가 곧 시조 혁거세 39년이었다…及壯身, 長九尺, 風神秀朗, 知識過人. 이 아이가 어른이 되자 키가 9척이 되었으며, 기풍과 정신이 훌륭하였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脫解始以漁釣爲業 供養其母 未嘗有懈色. 탈해는 처음에는 고기잡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는 한 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望楊山下瓠公宅 以爲吉地 設詭計 以取而居之. 其地後爲月城. 그는 양산 아래에 있는 호공의 집을 보고 그곳이 좋은 집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꾀를 써서 이 터를 얻어 그곳에서 살았다. 이 땅은 뒷날 월성터가 되었다. 至南解王五年 聞其賢 以其女妻之. 至七年 登庸爲大輔 委以政事. 남해왕 5년에 이르러 그가 어질다는 소문이 나자 왕은 자기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7년에 그를 등용하여 대보로 임명하고 정사를 맡겼다. 儒理將死曰 先王顧命曰 吾死後 無論子壻 以年長且賢者 繼位. 是以寡人先立 今也宜傳其位焉. 유리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말했다. 선왕은 내가 죽은 후에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현명한 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조(條) 중에서
지금의 일본 열도(列島)가 한반도 포항(浦項) 영일만(迎日灣) 지역에 그 북단(北端)이 붙어 있던 시절, 대륙 서쪽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차(茶)를 얻기 위해 동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처음엔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자신의 땅을 기꺼이 나누었던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오는 난민(難民)들에 넌더리를 내기 시작할 즈음 무역(貿易)이 활성화되었다. 차(茶) 나무가 사라진 땅에서도 사람들이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차(茶) 나무가 여전히 자생(自生)하는 근역(槿域)과 제잠(鯷岑)에서 차(茶)를 만들어 수출하는 방법이었다. 차(茶) 나무가 사라져 이웃들이 정든 땅을 등지고 떠나가고 남은 사람들도 극심한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미탄니(Mitanni) 사람들이 제일 적극적으로 무역에 나섰다. 수레바퀴를 개량하고 말(馬)을 훈련시키고 재갈(銜)과 굴레(羈)를 정교하게 만들어 말(馬)을 조종(操縱)해 지금 기준으로 2톤의 짐을 실은 수레를 끌 수 있게 만든 사람들이 후일 미탄니(Mitanni)라 기록된 마잇탄(Maitanni) 사람들이었다. 아시리아(Assyria) 사람들은 그들을 전차병(戰車兵)이라는 뜻의 하니라바트(Hani-Rabbat)라고 부른 연유였다. 기원전 1600년경 마이탄 사람들이 말(馬)을 이용해 대륙의 동서무역(東西貿易)을 주도함으로써 대륙에는 동서(東西)를 연결하는 무역로(貿易路)라 불리는 길들이 뚜렷해졌고 그 길마다 사람들이 모여 살아갈 수 있는 고을들이 생겨났다. 그 고을들은 차(茶)가 운송(運送)되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못했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과거 실크 로드라 불리던 길 위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으나 지금은 폐허가 된 고을들은 차(茶)가 운송되는 길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잘 알게 해 준다. 차(茶)는 이윤(利潤)을 목적으로 거래되는 무역 상품이 아니라 사람들이 역경(逆境) 속에서도 자기 땅에서 살아가게 해 주는 삶의 지지대(支持臺)였다. 마잇탄(Maitanni) 사람들이 수레바퀴(輪)와 재갈(銜)을 발명해 내고 야생마들을 잡아 길들이는 어려운 일들까지 해내며 그토록 말(馬)과 수레를 이용한 차무역(茶貿易)에 사활(死活)을 건 것은 세계의 차무역(茶貿易)을 독점하며 일부 해상지역(海上地域)만 잘 사는 해상무역체제(海上貿易體制)가 테라섬에서의 화산 폭발로 붕괴(崩壞)되기 전까지 겪어야 했던 죽음과도 같았던 차부족(茶不足) 때문이었다. 기원전 1650년경 에게(Aegean)해 테라(Thera) 섬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은 지금까지도 인류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육상무역파(陸上貿易派)와 해상무역파(海上貿易派) 간의 죽고 죽이는 대립을 첨예하게 폭발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오백 년을 주기(週期)로 바뀌는, 기후가 추워지는 한랭화(寒冷化)와 더워지는 온난화(溫暖化)를 말없이 버티며 살아온 사람들이 달라진 건 기원전 2334년의 아카드(Akkad) 사르곤(Sargon) 원정 때부터였다. 신시배달국(神市背達國)에서 출발한 사르곤 원정대가 초원로(草原路)를 달려 수메르인들을 토벌(討伐)하면서부터 생겨난 대립과 원한(怨恨)이었다. 기원전 24세기에 신시배달국(神市背達國)이 파병한 사르곤 원정대가 토벌한 것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 건설된, 기원전 12세기에 바다 민족이 파괴한 것과 똑같은 해상무역(海上貿易) 기지(基地)들이었다. 수메르가 기후 한랭화(寒冷化) 시기에 벌어지는 차부족(茶不足) 사태를 해결하고자 기원전 26세기에 완성시킨 해상무역망(海上貿易網)의 성공이 자초한 사르곤(Sargon) 원정대였다. 기후가 추워지면 대륙의 동서무역로(東西貿易路)로 이용되어 온 초원로에는 얼음이 늦게 녹아 늦은 봄에도 말이 지나다닐 수 없는 지역이 많았다. 그래서 차수송(茶輸送)이 늦어지는 일이 자주 발생했고 근역(槿域)에서 수출한 차(茶)들이 기한(期限) 내(內)에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운송 중에 변질된 차(茶)들이 많이 발생해 수메르에 도착한 차(茶)들 중 반(半) 이상은 버려야 할 정도였다. 무역로(貿易路)의 끝이 수메르여서 생겨난 일이었다. 이렇게 차부족(茶不足)에 고통당해왔던 수메르가 그 대책으로 추진한 것이 기원전 2600년경부터 시작한 해상무역망(海上貿易網) 구축이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도전(挑戰) 받은 적 없던 육상무역세력(陸上貿易勢力)의 차무역(茶貿易) 패권이었다. 수메르에 의해 구축된 해상무역세력의 도전으로 순식간에 허물어진 차무역 패권(霸權)은 그들을 당혹(當惑)과 분노(憤怒)에 휩싸이게 했다. 그러나 수메르에게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정당(正當)한 근거(根據)가 있었다. 기후 온난화 시기에도 무역로의 마지막(終末)에 위치한 수메르에게는 많은 양의 차(茶)가 변질되어 도착했었다. 수메르로서는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차부족(茶不足) 문제였다.
수메르가 엄청난 물자(物資)와 노동력(勞動力)이 소요되는 이 사업을 완성해 내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은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참여시켜 함께 사업하는 오늘날의 컨소시엄(Consortium) 구성이었다. 이 사업을 위해 수메르인들을 페니키아 지역과 키프로스섬으로 이주(移住)시키는 사업이 대규모로 이루어졌고 이집트에서는 찻물 제조 공장 및 찻물 보관고인 피라미드(pyramid)가 수메르인들의 참여로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아카바(Aqaba)에서 시나이 반도를 횡단해 나일강 델타 지역의 멤피스(Memphis)로 들어가는 길도 만들어졌다. 페르시스(Persis) 지역의 페르시아 사람들을 인더스강 유역으로 이주(移住) 시키는 사업 또한 가속화되었다. 해양 무역로(海洋貿易路)라고 하지만 사실상 제잠(鯷岑)에서 채엽되고 근역(槿域)에서 만들어진 차(茶)를 인더스강과 페르시아해와 오만만(灣), 페르시아만(灣) 그리고 아덴만(灣)과 홍해, 아카바(Aqaba)만(灣)을 경유하는 바닷길로 수입(輸入)하는 수입로(輸入路)였다. 그와 같은 일을 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費用)이 들어갔지만 그러나 그 비용은 수입품(輸入品) 중 최고가(最高價)로 사 오는 차(茶)를 매년 절반 이상 변질(變質) 사유로 폐기(廢棄) 해야 할 때 그 손해 보는 부분과 비교해 보면 큰 비용이 아니었다. 손해(損害) 보는 부분의 일부를 카라반(caravan)들에게 주어 후한 가격으로 차(茶)를 구입(購入)하자 너도나도 차(茶)를 싣고 카불(kabul)로 모여들었다. 차(cha)를 실은 낙타(駱駝)들이 성난 황소(bull)처럼 질주(疾走)해 모여드는 곳이라 하여 카불(Kabul)이란 이름을 얻게 된 연유였다. 이런 엄청난 성공이 결국 육상무역세력(陸上貿易勢力)의 메소포타미아 정벌이라는, 해양무역세력(海洋貿易勢力)이 된 수메르에 대한 알카나이(Alchanai; 아카드)의 탄압이라는 비극을 가져오게 한 거였다. 기후 온난화 기간은 육상무역세력(陸上貿易勢力)이 추웠던 오백 년 동안 기다려 온, 차무역(茶貿易)을 자신들이 좌지우지하도록 신(神)에게 허락(許諾) 받은 시간이었다. 신(神)이 그들에게 축복한 시간을 수메르가 저주(咀呪) 한 거였다. 용서받을 수 없는 신성모독(神聖冒瀆)이었다. 아카드(Akkad)의 사르곤(Sargon)과 나람신(Naram-Sin)의 정벌이 그토록 잔인(殘忍)했던 연유였다.
이런 해양무역로(海洋貿易路) 개발의 핵심은 속도에 있었다. 아사달에서 아스타나(Astana)까지 운송된 근역(槿域)의 차(茶)들을 도착시간을 지체(遲滯)시키는 서쪽으로 가지 않고 바로 남쪽으로 돌려 인더스강 유역에 건설된 모헨조다로로 보내 인더스강과 페르시아해를 이용해 수메르가 사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으로 신속히 도착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수메르가 개발한 표준화된 구운 벽돌로 건설된 계획도시 모헨조다로에 전달된 차(茶)들은 인더스강을 타고 페르시아해로 나갔고 그 바다를 통해 페르시아만(灣)으로 또한 홍해(Red Sea)로 운반되었다. 아덴(Aden)만(灣)과 홍해 그리고 아카바(Aqaba)만(灣)을 거쳐 아카바항에 하역된 차(茶)들은 이집트로 운반되었다. 강과 바다를 통한 운반은 신속(迅速)했다. 수송 기간이 길어져 차(茶)가 변질되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다. 신속성을 진정한 해결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안전성을 강화한 배(舟)들을 개발하고 건조(建造) 해야 했다. 수메르인들의 이러한 안전한 배(舟)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역풍(逆風)마저도 순풍처럼 이용할 수 있는 삼각돛과 파도(波濤)를 가르며 배가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주는 용골(keel) 구조의 선체(船體) 개발로 이어졌고 이들 신기술들은 대형 선박(船舶)의 조선(造船)으로 연결되었다. 다(荼: 茶의 다른 이름)를 실어 나르기에 다우(Dhow) 선(船)이라 불린 특수 대형 배(舟)가 개발된 연유였다. 따라서 대형(大型) 선박 건조를 위한 특수한 시설이 개발되었는데 그것이 선거(船渠)였다. 지금도 독(Dock)라고 불리며 대형 선박을 조선(造船) 하기 위한 기본 시설로 되어 있는 선거(船渠)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인더스강의 모헨조다로가 건설되던 기원전 2600년경에 함께 개발된 획기적인 조선(造船) 기술이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기록된 의거(義渠)는 바로 이 수메르의 도크 기술을 전승(傳承)한 사람들이었다. 수메르가 이런 선거(船渠; 도크)라는 대형 선박 건조(建造)를 위한 특수 시설을 개발해 낼 수 있었던 데에는 사실은 살고 있던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의 사막화(沙漠化)가 숨은 배경이었다. 수메르의 강역(疆域)이 가뭄으로 사막화(沙漠化) 되기 시작한 건 기원전 4200년경부터였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라 불리며 가뭄이라고는 몰랐던 지역이 무려 300년이나 계속된 가뭄으로 사막(沙漠)이 되어 갔다. 그 후부터 해양무역망(海洋貿易網)을 갖추게 된 기원전 2500년까지의 세월은 수메르인들에게는 가뭄을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투쟁의 세월이었다. 오늘날 인류가 관개수리(灌漑水利)에 관하여 쌓아 올린 과학(科學)과 기술(技術)의 기반(基盤)은 모두 이 시기에 수메르에 의해 확보된 것들이었다.
그중 운하(運河) 굴착(掘鑿) 기술은 수메르인들이 그 치명적인 사막화에도 에리두(Eridu)의 전통을 지키며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버티게 해 준 버팀목이었다. 땅을 파서 인공수로(人工水路)를 만들어 물을 흐르게 하는 수리관개(水利灌漑) 시설을 거미줄처럼 엮어 가뭄을 극복하려는 그들의 투쟁은 인공 수로(水路)로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구운 벽돌을 발명하게 했고 물을 막는 제방(堤防) 공사와 땅을 팔 때 그 깊이를 달리 해 물을 자연적으로 흐르게 하되 그 속도까지 조절할 수 있게 하는 기술등 운하(運河) 공사에 필요한 모든 과학기술을 갖추게 해 주었다. 이렇게 축적된 기술을 이용해 인더스강 유역에 계획도시인 모헨조다로를 건설할 때 수메르인들과 함께 건설에 대거 참여한 사람들이 페르시아인들이었다. 지금의 호르무즈 해협 서북안(西北岸)에 자리한 파르스(Fars) 지역 사람들은 이처럼 수메르의 해양무역망(海洋貿易網) 구축에 처음부터 긴밀히 협력해 온 사람들이었다. 기원전 2334년 사르곤 원정군에 의해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해상무역기지들이 파괴될 때 많은 수메르인들이 도망쳐 간 곳도 모헨조다로였다. 결국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2000년경 우르 제3왕조를 끝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항해(航海)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수메르인들은 파르스(Fars)인들 즉 페르시아인들이 대거 이주(移住)해 발전시키고 있던 모헨조다로로 집결했다. 그들은 페르시아만(灣)을 포기하고 오만만(灣)과 아덴만(灣), 아카바만(灣)을 개발해 이집트와 가나안과 페니키아로 연결되는 해양 무역로(海洋貿易路)를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해상 무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수메르인들이 집중 발전시킨 것은 조선(造船)과 운하(運河) 만이 아니었다. 차(茶)를 포도주처럼 액체로 만드는 기술과 그렇게 액체로 만든 찻물을 선박의 제한된 공간에 최대한 적재(積載)할 수 있게 해주는 특수 운반 용기(容器)도 집중 개발했다. 근역(槿域)에서 만들어 보낸 병차(餠茶)와 전차(磚茶) 같은 긴압차(緊壓茶)를 그 모양 그대로 배(船)에 실어 운반하려면 그 부피 때문에 엄청난 숫자의 배(船)들을 새로 만들어야 했기에 비용 문제상 그것은 가능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찻잎을 물에 담가 찻잎이 가진 성분들을 우려내(infuse) 찻물을 만들고 그 찻물을 암포라(amphora)라는 선박(船舶) 수송용으로 특별히 만든 토기에 담아 배에 적재하여 운반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모헨조다로의 가장 높은 곳에 설치된 스투파와 목욕탕이라고 오인되고 있는 대형 저수조는 바로 이 긴압차(緊壓茶)를 물에 우려내어(infuse) 찻물로 만드는 시설이었다. 이렇게 모헨조다로를 건설하고 해상무역망(海上貿易網)을 함께 구축했던 수메르와 파르스(Fars)인들은 기원전 1700년경 차(茶)를 얻기 위해 아리아(Aria) 지역까지 들어와 살던 켈트인들의 공격을 받아 모헨조다로를 포기해야 했다. 아리안(Arian)의 인도 침략이라고 기록된 이 사건으로 그들이 도망쳐 모인 곳이 파슈툰(Pashtun)이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남부와 파키스탄 중서부 지역이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들을 파슈툰(Pashtun)이라고 불렀다. 페르시아(persia)의 음역어(音譯語)라고 알려진 파사(波斯)는 사실 파슈툰(pashtun)의 음역어였다.
페르시아(Persia)라고 불리던 나라를 이란(Iran)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한 건 그들 스스로였을 만큼 이란(Iran) 사람들은 페르시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어로 이란은 아리아인(Arian)의 땅이라는 뜻이다. 페르시아라는 이름을 이란으로 바꾼 것은 그들 스스로가 페르시아인(Persian)과 아리아인(Arian)을 구분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세계 문명사(文明史)를 선도(先導)한 메소포타미아에 눌려 항상 변방(邊方)으로 여겨져 왔던 페르시아를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건 키루스 2세였다.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 2세에 의해 바빌론에 강제로 끌려와 억류되어 있던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귀환시킨 것으로 유명한 키루스(Cyrus) 2세가 발전시킨 아케메네스(Achaemeneid) 왕조의 페르시아는 그러나 30년이 안돼 나라를 다리우스 1세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다리우스(Darius) 1세가 아케메네스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자신을 아케메네스 후손(後孫)으로 조작(操作)하면서 왕조(王朝)가 달라진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키루스 2세의 아케메네스가 파르스(Fars:Persis)라고 불렸던 지금의 이란 남부의 페르시아만 연안 지역을 기반으로 왕조(王朝)를 이룬 해양세력(海洋勢力)이었다면 다리우스 1세의 아케메네스는 부친 히스타스페스(Hystaspes)가 박트리아 샤트라프(satrap 총독)를 지낼 정도로 북부 내륙에 토대(土臺)를 둔 육상무역세력(陸上貿易勢力)이었다. 지금의 이란 케르만샤(Kermanshah) 주 비소툰(Bisotun)에 위치한 베히스툰(Behistun) 산에 새겨 넣은 부조(Behistun incarnation)에서 다리우스 1세는 자신이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신(神)에 의해 세워진 정당한(rightful) 군주(君主) 임을 여러 번 강조할 만큼 자신이 반란(叛亂)을 통해 왕좌에 앉지 않았음을 강변(強辯) 했다.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 2세가 아버지가 시작한 해양무역망(海洋貿易網) 구축(構築)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집트 원정에 나간 사이 육상무역(陸上貿易)으로 기반을 다진 박트리아(Bactria)와 아리아(Aria) 지역에 연고(緣故)를 둔 6개 가문(家門)으로 대표되는 육상 무역파(陸上貿易派)의 지원을 받아 반란에 성공한 다리우스는 그래서 오랜 세월을 페르시아 각지의 반란(叛亂)을 진압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또한 키루스 2세의 지원(支援)을 받아 대형 무역선(貿易船)들을 갖추고 해양 무역파(海洋貿易派)의 중추로 떠오른 아테네 같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해 해양무역(海洋貿易)의 기반도 파괴해야만 했다.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가 그 엄청난 비용을 치르면서 그리스 원정을 계속 한 연유였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 원정을 떠난 사이 지금의 이란 남부 파르스(Fars)의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 남아 국정을 챙기던 키루스 2세의 차남 바르디야(Bardiya) 왕자를 암살한 건 소그디아나(Sogdiana)의 사카인들이었다. 사카(Saka)인들은 육상무역(陸上貿易)에 사활을 건 기마민족(騎馬民族)이었다. 그들과는 달리 배를 만들어 해상무역(海上貿易에 나선 해양민족(海洋民族)은 파슈툰(Pashtun)이 된 파르스 인들과 수메르인들이었다. 다파니국(多婆那國)의 파(婆)는 바로 이 파슈툰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계속)
After Terah was 70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Abraham, Nahor, and Haran. Haran was the father of Lot, and Haran died in his hometown of Ur in Babylonia, while his father was still living.…Terah took his son Abraham, his grandson Lot, and his daughter-in-law Sarai, Abraham’s wife, and with them he left the city of Ur in Babylonia to go to the land of Canaan. They went as far as Haran and settled there. 데라는 칠십 세가 된 이후에 아브람과 나호르 그리고 하란의 아버지가 되었다. 하란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적 고향인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죽었는데 롯은 그의 아들이었다… 데라는 아들 아브라함과 손자 롯, 며느리 사라와 함께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우르를 떠났고 하란까지 가서 그곳에 정착했다. - 창세기(Genesis) 11장 26절- 31절
The Lord said to Abraham, “Leave your country, your relatives, and your father’s home, and go to a land that I am going to show you.…When Abraham was seventy-five years old, he started out from Haran, as the Lord had told him to do; and Lot went with him. Abraham took his wife Sarai, his nephew Lot, and all the wealth and all the slaves they had acquired in Haran, and they started out for the land of Canaan. When they arrived in Canaan, Abraham traveled through the land until he came to the sacred tree of Moreh, the holy place at Shechem. (At that time the Canaanites were still living in the land.) The Lord appeared to Abraham and said to him, “This is the country that I am going to give to your descendants.” After that, he moved on south to the hill country east of the city of Bethel on the west and Ai on the east.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75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떠나서 마침내 들어갔더라.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아브람은 세겜 땅의 신성한 장소인 모레의 신성한 나무(생명의 나무)에 다다를 때까지 그 땅을 계속 여행했다. (그때 가나안 사람들은 쭈욱 그 땅에서 살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 창세기(Genesis) 12장 1. 4- 8절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우르(Ur)에 살던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Terah)와 부인 사라 그리고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Canaan)으로 이주하기 위해 길을 나선 건 수메르의 만성적인 차부족(茶不足)이 결국 절망적인 상황으로 전개되기 직전인 기원전 2091년이었다. 수메르인들의 마지막 왕조인 우르 제3왕조가 멸망한 해가 기원전 2004년이니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난 것은 차부족(茶不足)으로 인해 우르가 무정부상태가 되기 직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턱없이 부족한 차(茶)를 물에 우려내 찻물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시설인 지구라트(Ziggurat)를 건설해 차부족(茶不足) 사태로부터 도시를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노력들도 수포로 돌아가기 시작한 때였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Terah)는 아브라함을 포함해 세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우르를 떠날 때 동반한 가족은 자신보다 먼저 죽은 아들 하란의 아들 롯과 아들 아브라함 부부뿐이었다. 이는 데라가 가나안을 향해 우르를 떠날 때만 해도 가나안으로 떠나는 것은 엄청난 모험(冒險)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위험이 가득한 여정(旅程)이 아니라면 데라의 모든 가족이 함께 떠났을 터였다. 구약성서 창세기 12장 7절에는 아브라함이 왜 가나안 땅을 향해 하란을 떠났는지에 대한 이유가 또한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개정 전 한국어 번역 성서(聖書)에는 그냥 상수리나무(㰛)로 되어 있지만 영어로 번역된 성서에는 신성(神聖)한 나무라고 번역된 나무가 가나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데라(Terah)가 죽은 후 하란을 떠나 온 아브라함(Abraham)은 지금의 요르단강 서안(West Bank)의 발라타(Balata) 지역인 세겜(Shechem)의 성(聖)스런 장소인 모레(Moreh)에 있는 신성한(sacred) 나무(tree)가 있는 곳까지 나아갔다. 창세기 2장 9절에 기록된 에덴(Eden) 동산 한가운데 서 있었다는 바로 그 생명을 주는 나무였다. 그랬기에 아브라함은 그곳까지 가야 했고 그래서 그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쫓겨났다. 이미 그곳은 차(茶) 나무를 찾아 오래전부터 정착해 살던 사람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땅이었다. 아브라함(Abraham)이 가나안에 정착하지 못하고 애굽으로 들어간 연유였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온 아브라함은 그때에도 결코 사해 북쪽으로는 진출하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사해 북쪽 세켐(shechem) 지역으로 진출한 것은 기원전 1446년에 있었던 모세가 이끈 출애굽 사건 이후였다. 그때엔 이미 세켐에도 극심한 기후변화로 인해 차(茶) 나무들은 모두 사라지고 생명나무인 차(茶) 나무의 일부 약효를 가지고 기후변화에 적응되어 변형된 채 살아남은 대추야자나무와 올리브 나무들만이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