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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戰과 고인돌, 거북놀이

by 역맥파인더

三門外及阿峴人成羣分隊或持棒或投石喊聲趕逐爲接戰狀於萬里峴上謂之邊戰 以退走邊爲負 삼문(三門) 밖의 주민들과 아현(阿峴) 주민들이 떼를 이루어 편을 가른 다음 몽둥이를 들거나 돌을 던지며 고함을 치면서 달려들어 만리동 고개 위에서 접전하는 모양을 하는데, 이것을 편싸움[邊戰]이라고 하며 변두리로 도망가는 편이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俗云三門外勝則畿內豊阿峴勝則諸路豊 龍山麻浦惡少結黨救阿峴方 속설에 삼문 밖 편이 이기면 경기 일대에 풍년이 들고 아현 편이 이기면 팔도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용산과 마포에 사는 불량소년들 중에는 패를 지어 와서 아현 편을 돕는다. 其酣鬪呼聲動地纏頭相攻破額折臂見血不止 雖至死傷而不悔 亦無償命之法 人皆畏石回避掌禁該司另行禁戢而痼習無以全革 바야흐로 싸움이 한창 심해지면 고함소리가 땅을 흔들 정도가 되며 머리를 싸매고 서로 공격하는데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져 피를 보고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다가 죽거나 상처가 나도 후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명을 보상하는 법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돌이 무서워 피하고 금지시켜야 하는 관에서 특별히 이를 금하는 조치를 취하지만 고질적인 악습이 되어 제대로 고쳐지지 않는다. 城內童竪亦效而爲之於鍾街琵琶亭等處 城外則萬里峴雨水峴爲邊戰之所 성안의 아이들도 이를 본받아 종각 거리나 지금의 종로 3가에 있던 비파정(琵琶亭) 부근에서 편싸움을 하였고 성 밖에서는 만리현(萬里峴)과 우수현(雨水峴)에서 주로 편싸움을 하였다. 安東俗每年正月十六日府內居民以中溪分爲左右投石相戰以決勝負 경상도 안동 지방의 풍속 중에는 매년 정월 16일에 주민들이 읍내 복판을 흐르는 시내를 경계로 삼아 좌우로 나뉘어 서로 돌팔매질하며 싸워 승부를 결정했다. 兩西俗上元亦有石戰之戱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풍속에도 정월 보름날 돌팔매질하는 놀이가 있다. 按唐書高麗傳每年初聚戱浿水之上以水石相濺擲 馳逐再三而止 此爲東俗石戰之始 내 생각에는 당서(唐書) 고려전(高麗傳)에 “매년 정초에 군중들이 패수(浿水) 가로 모여 노는데 물과 돌을 서로 끼얹고 던지며 밀고 밀리기를 두세 번 하다가 그친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우리의 돌팔매싸움(石戰) 풍속이 시작되었다.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정월대보름 중에서.

조완묵의 우리민족의 민속놀이 중에서 1880년대 아현에서의 석전 나무위키


우리 민족의 정월대보름 세시풍속(歲時風俗) 중에서 가장 특이한 민속놀이는 석전(石戰)이라 불린 돌팔매질 싸움이었다. 탄핵 편에서 설명한 차전놀이와 그와 관련된 줄다리기 그리고 앞으로 설명할 연날리기등 대부분의 정월 대보름 민속놀이가 차(茶) 나무를 발견하고 발견한 차(茶) 나무에서 찻잎(茶葉)을 따서 차(茶)를 만드는 일과 관련된 놀이였는데 석전(石戰)은 이런 차(茶)를 만드는 일과는 관련 없는 놀이였다. 게다가 편을 갈라하는 놀이여서 편전(邊戰)이라고도 부른 이 석전(石戰)은 그러나 단순히 편을 갈라 돌을 던지며 노는 놀이라고 하기에는 그 결과가 끔찍했다. 조선 헌종 15년(1849)에 홍석모(洪錫謨)가 편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을 보면 ’ 고함소리가 땅을 흔들고 서로 돌에 맞아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져 피를 보고도 그치지 않는 ‘ 그야말로 유혈(流血)이 낭자(狼藉)한, 놀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전투였다. 죽는 사람까지 속출하는 그런 전투를 서로 잘 알고 지낼 수밖에 없는 위아래 마을 사람들끼리 또는 옆동네 사람들끼리 정월대보름 놀이로 이어 온 것이었다. 돌팔매 싸움 중에 죽거나 심하게 다쳐도 서로 보상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해 왔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싸움을 왜 정월 대보름에 놀이로 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 있는 일이 된다. 무슨 곡절이 있어 관(官)에서도 특별히 금지한 이 놀이를 그토록 오랫동안 고집(固執)해 왔는지 그 의문(疑問)에 대한 답을 찾아가다 보면 왜 우리 민족(民族)이 그 넓디넓은 땅들을 다 제쳐두고 이 좁디좁은 한반도에 터를 잡았는지 그 이유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비석(飛石) 치기와 팽이치기, 물수제비와 박 터트리기 등 우리 민족에게 익숙한 아이들 놀이들이 사실은 긴 줄에 천이나 가죽으로 만든 바구니를 달아 돌을 멀리 빠르게 날려 보낼 수 있도록 고안된 석전(石戰)의 중요 무기인 무릿매(sling)를 잘 다루도록 하기 위한 사전 교육이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결국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저자인 홍석모(洪錫謨)가 추측한 석전(石戰)이 그저 ‘고질적인 악습이 되어 제대로 고쳐지지 않아’서 계속 지켜져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석전(石戰)은 고질적인 악습(惡習)이 되어서 지켜진 게 아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차산업(茶產業)에서 이씨 조선 왕가의 부역질로 중국에 의해 부당하게 축출된 것에 대해 우리 민족이 얼마나 큰 분노와 울분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지켜진 것이다. 명(命)을 어기면 치도곤(治盜棍)을 치는 서슬 퍼런 이씨 조선 왕조의 관(官)이 금지한 놀이를 저렇듯 버젓하게 이씨조선 도성 한 복판에서 대규모의 사람들이 밀집해 돌에 맞아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석전(石戰)을 그토록 오랫동안 이어 간 것은 차산업(茶產業)을 뺏어간 중국에 대한 우리 민족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며 그렇게 차산업(茶產業)이 강탈되는데 부역(附逆)한 이씨 왕가에 대한 민중들의 항의였다. 석전(石戰)은 차산업(茶產業)과 차무역로(茶貿易路)를 지키기 위해 우리 민족이 고안해 낸 수천 년을 이어온 방위산업이었다.

직선거리로 김해에서 찌타(Chita)까지 만리(2500km) 였고 후쿠오카에서 알카나이까지가 만리(2500km)다.


석전(石戰)은 단오(端午)를 끝으로 생산이 종료되는 수출용 차(茶)를 그야말로 만리(萬里)나 떨어진 곳까지 운반할 때 그 호송(護送)을 책임지는 사람들을 선발하기 위해 치러진 일종의 경연(競演)이었다. 이런 호송부대(護送部隊) 부대원들이 사용하는 무기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그중 가장 위력한 원거리용(遠距離用) 무기는 무릿매(sling)라 불리는 돌팔매용 무기였다. 무릿매 또는 물매로 불렸던 투석구(投石具 sling)는 긴 끈의 중간에 돌이 담길 정도의 크기의 천이나 가죽을 덧대 그 안에 돌을 넣고 끈의 한쪽 끝에는 고리를 만들어 중지(中指)에 끼고 다른 반대편 쪽 끝은 묶어 돌기를 만들어 엄지와 검지로 쥐고 돌리다가 충분한 원심력(遠心力)을 얻을 때 엄지와 검지로 잡고 있던 끈을 놓아 돌을 멀리 빠르게 날려 보내 목표물을 타격하는 무기였다. 훈련이 잘 된 성인 남자 투석꾼이 이 무릿매에 걸어 날리는 돌은 시속 140Km의 속도로 날아가고 최대 200미터까지 날아갈 수 있었다. 복합궁(複合弓)이 궁(弓)과 화살(箭) 제작에 많은 원료와 품이 들어가는 값비싼 무기였다면 무릿매는 제작에 비용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고 탄환으로 사용하는 돌 또한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것이기에 무척 저렴한 무기였다. 우리 민족이 창검(槍劍)보다 무릿매와 활 같은 무기를 선호한 것은 우리 민족이 지켜야 하는 것이 나무들이 빽빽한 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茶) 나무였다. 나무가 빽빽이 자라고 경사 또한 가파른 산에서는 비범한 창검술(槍劍術) 보다 평범한 투석(投石)이나 화살이 훨씬 치명적이었다. 돌이나 화살은 날아가는데 그리 넓은 공간이 필요 없었기에 나무가 빽빽한 산지(山地)에서는 창검(槍劍) 보다 월등히 효과적이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높은 명중률과 긴 사정거리를 가진 전문 투석꾼의 양성이었다. 우리 민족은 200미터의 거리를 시속 140km의 속도로 날아가 의도한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투석꾼을 길러내기 위해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이 놀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는데 그 1단계가 비석 치기와 팽이치기로 구성된 치기 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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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릴 때 접하게 하는 비석 치기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비석 모양의 작은 돌을 세워놓고 일정한 거리 밖에서 다른 돌을 던져 세워놓은 돌을 맞춰 쓰러트리는 놀이였다. 거리감(距離感)과 투척력(投擲力)을 어렸을 때부터 함양(涵養)해주는 놀이였다. 이렇게 비석 치기를 하며 동네 친구들과 놀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게 되면 그들은 자연스레 비석 치기를 하지 않고 또래들과 함께 팽이치기 놀이를 하게 유도(誘導)되었다. 아버지와 숙부, 나이 든 형이 아들과 조카, 동생을 위해 특별히 나무를 잘라 깎아서 직접 만든 팽이와 팽이채를 주며 팽이치기를 하라고 권유하는 식이었다. 이때의 팽이치기는 상대방의 돌고 있는 팽이를 자신의 팽이를 던져 찍거나 부딪치게 해 못 돌게 하여 이기는 놀이가 아니라 채찍질을 연마(硏磨) 하기 위한 놀이였다. 따라서 자신의 팽이를 던져 찍거나 부딪쳐 상대방의 팽이를 쓰러뜨려 이기는 놀이가 아니라 누가 팽이 채찍질을 잘해 더 오래 팽이를 돌리느냐에 의해 승부를 내는 놀이였다. 비석 치기가 타격 목표물에 대한 집중과 거리감 그리고 투척력(投擲力)을 기르기 위한 놀이였다면 팽이 치기는 채찍질의 원리를 체득(體得)하게 해 주기 위해 고안된 놀이였다. 팽이를 돌리기 위해 팽이채로 내려칠 때 힘으로 치는 것이 아니라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손목과 손에 힘을 차례로 전달하고 마지막에 팽이채를 잡은 손아귀에서 순간적으로 힘을 잡아챔으로써 팽이채 끝에 달려 있는 줄가닥들이 팽이를 휘감게 해 회전을 만들어내는 원리를 깨우치게 하려는 놀이가 팽이치기였다. 채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려는 놀이가 팽이치기였다. 망치를 비롯해 채라고 불리는 도구는 잡아채는 짓을 이용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놀이였다. 무릿매(sling)에 실린 돌의 원심력을 극대화시켜 최고의 속도로 가장 멀리 목표에 정확히 보내기 위해서는 무릿매의 한쪽 끝을 놓으면서 채야하는 순간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놀이가 팽이치기였다.

투석구(sling) 출처 위키미디어. 출처 나무위키

이렇게 비석 치기와 팽이치기를 통해 거리감과 채는 것을 연습한 아이들이 어느 정도 어깨 힘을 갖출 정도의 나이가 되면 하는 것이 물수제비 놀이였다. 돌을 수면이 잔잔한 호수나 냇가에 던져 그 던진 돌이 물속에 완전히 빠질 때까지 몇 번이나 수면(水面)을 튕겨 날아가느냐로 승부를 내는 놀이였다. 이 놀이의 목적은 돌을 던지는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뭔가를 던질 때처럼 돌을 쥔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가 아래로 던지는 자세로는 던진 돌을 수면(水面) 위로 여러 번 튕겨 오르게 할 수 없었다. 즉 물수제비 놀이에서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반드시 돌을 쥔 손을 머리 위에서가 아니라 어깨 선에서 비스듬히 던져야 돌을 여러 번 수면으로 튕겨 오르게 할 수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사이드 암(side arm) 또는 언더 스로우로 던져야 돌을 수면 위로 여러 번 튕겨 오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소년들에게 알게 하고 그래서 어깨쯤에서 비스듬히 던지는 자세를 익히도록 하는 놀이가 물수제비 놀이였다. 무릿매(sling)로 가장 멀리 빠르게 돌을 날리는 투척(投擲) 자세였다. 결국 물수제비 놀이는 무릿매를 사용하는 최상의 투척 자세를 익히기 위한 놀이였다. 박터뜨리기 놀이는 공성(攻城) 능력을 함양하기 위한 놀이였다. 자신의 머리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목표물을 낮은 곳에서 목을 꺾어 위를 쳐다보며 맞추기 위한 기술을 익히는 놀이였다. 높은 성벽(城壁) 위에 있는 적군(敵軍)을 무릿매로 타격(打擊) 하기 위한 여러 거리감과 기술을 익히게 하기 위해 고안된 놀이가 박 터트리기였다. 박터뜨리기 놀이는 그러나 다른 나라를 침략해 그 나라의 성(城)을 뺏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차(茶) 나무가 자라는 우리나라의 산(山)을 혹여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뺏겼을 때 이를 되찾아오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하는 놀이였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가죽과 나무 같은 소재를 이용해 만들어 신는 신발을 우리 민족은 새끼줄을 꼬아 만드는 짚신으로 한 연유가 바로 이 무릿매(sling) 때문이었다. 전 세계에 유일하게 차(茶) 나무가 자라는 땅의 주인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했던 헤아릴 수 없는 침략이었다.


每年初, 聚戲於浿水之上, 王乘腰輿, 列羽儀以觀之. 事畢, 王以衣服入水, 分左右爲二部, 以水石相濺擲, 諠呼馳逐, 再三而止. 매년 정초(正初)에 패수(浿水) 가에 모여 놀이를 하는데 국왕은 가마를 타고 와서 우의(羽儀)를 나열해 놓고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이 옷을 물에 던진다. 군중들은 좌우로 두 편을 나누어 서로 물과 돌을 뿌리거나 던지고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세 번 되풀이한 뒤 그만둔다. - 수서(隋書) 고구려(高句麗) 전

八年 冬十一月 漢以大兵嚮我. 王問群臣 戰守孰便. 衆議曰 漢兵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答夫曰 不然. 漢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少者宜守 兵家之常也. 今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薄之 可以得志. 王然之 영城固守.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答夫帥數千騎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答夫坐原及質山 爲食邑. 8년 겨울 11월, 한나라에서 대병을 일으켜 우리를 향하여 왔다. 왕이 군신들에게 공격과 수비의 어느 쪽이 좋은가를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했다. 漢나라 군사들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경시하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적은 우리를 겁쟁이라 하여 자주 침입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명이 문을 지키면 만 명이 와도 막아낼 수 있는 격입니다. 따라서 한 나라 군사의 수가 많을지라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하소서." (명림)답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漢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습니다. 이제 그들이 강병으로 멀리까지 쳐들어 오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또한 병력이 많은 자는 싸워야 하고 병력이 적은 자는 수비해야 한다는 것이 병가의 법도입니다. 이제 한 나라는 천리길이나 되는 먼 곳에서 군량미를 수송해야 하므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성밖에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성밖의 들판에 곡식 한 알 사람 하나 없이 비워 놓고 기다리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열흘 혹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림과 피곤으로 인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강한 군사로써 육박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이를 옳게 여겨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漢나라의 군사들이 공격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장수와 졸병들이 굶주리다 못하여 퇴각하였다. 이때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전투를 벌이니 漢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 삼국사기 권 제1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제4(第四) 신대왕(新大王) 고국천왕(故國川王)·산상왕(山上王).

김해 구산바위. 화순 핑매바위. 출처 위키미디어

한랭화(寒冷化)와 건조화(乾燥化)가 진행되면서 세계 각지에서 자생하던 차(茶) 나무들이 모두 변종(變種)되어 다른 나무들이 되어 사라지자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차(茶) 나무 보유국이 되었다. 그로부터 우리나라는 수많은 침략을 당해왔다. 차(茶) 나무에서 찻잎(茶葉)을 따는 시기부터 병차(餠茶)가 만들어져 건조(乾燥)되는 시기까지 시시때때로 간단없이 벌어지던 침략이었다. 우리나라에 산성(山城)이 많은 이유는 차(茶) 나무가 산(山)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적군들이 들이닥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먹을 것과 찻잎(茶葉) 그리고 삼아놓았던 짚신들만을 챙겨 산성(山城)으로 들어갔다. 가져간 짚신들을 풀어 엮어 긴 줄을 만들어 무릿매 줄로 썼고 긴 저고리 옷고름을 일부 잘라 무릿매의 돌싸개로 썼다. 우리나라 옷에 그토록 긴 옷고름이 있는 연유였다. 병장기(兵仗器) 하나 없이 갑주(甲冑) 차려입은 군인 한 명 없이 무지렁이 백성들만 맨몸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인 산(山)에 곧 무릿매로 무장한 수많은 무시무시한 척석군(擲石軍)이 배치(配置)되었다. 탄환인 돌은 바위산에서는 무진장이었다. 무릿매로 하여 짚신을 민족의 신발로 삼았고 그로써 대부분의 남자들이 새끼 꼬기에 달인이 되었다. 이는 모두가 유사시 무릿매로 무장한 군인들이란 뜻이었다. 청야전술(淸野戰術)이 석전(石戰)을 처음 했다는 고구려에서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렇듯 석전(石戰)에 우리 민족이 진심을 다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 민족의 차산업(茶產業)을 지키는 국방력이었기 때문이었다. 활(弓)과 화살(箭)이 그리고 검(劍)과 창(槍)이 특별한 재료와 많은 품을 들여야 갖출 수 있는 무기였고 가지고 다니려면 별도의 운반장비와 인력이 요구되는 것이었다면 무릿매(sling)는 아무런 운반장비(運搬裝備)도 인력(人力)도 따로 요구하지 않으면서 특별한 재료나 비용도 들지 않으면서 최고의 원거리(遠距離) 살상무기(殺傷武器)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킬 수 있는 효율성(效率性) 최강의 무기였다. 그저 새끼줄과 손바닥만 한 천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무릿매에 탄환은 지천에 널려있는 돌멩이였으니 유일한 관건(關鍵)은 무릿매(sling)를 잘 다룰 줄 아는 척석군인이 있느냐 없느냐 여부였다. 활과 화살(弓箭), 창검(槍劍) 또한 무릿매에 비교하면 엄청난 비용을 들여야 만들어 낼 수 있는 무기였지만 그것 또한 잘 다룰 수 있는 솜씨가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關鍵)이었으니 화약무기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까지 무릿매는 그 어떤 무기보다 가성비(價性比)가 좋은 최상의 무기였다. 먼 길을 가야 하는 카라반의 호송군(護送軍)으로 척석군(擲石軍)은 최상의 군대였다. 매년 차(茶)를 실어 나르는 카라반들을 호송하는 대원들을 선발하는 행사가 바로 상원(上元 정월대보름)에 거행되는 석전(石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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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석전(石戰)으로 유명한 고장이 도성(都城)인 한양의 아현과 안동, 김해 그리고 평양이었다고 하는 데에는 바로 석전(石戰)이 카라반의 호송(護送) 대원을 선발하는 경연대회(競演大會)였다는 사실이 연유로 작용하고 있었다. 왜(倭)에서 대규모로 보내진 찻잎들이 처음으로 모이는 곳은 낙동강(洛東江)의 김해(金海)와 형산강(兄山江)의 안강(安康)이었다. 김해와 안강에 각각 모인 찻잎들은 솥과 부뚜막(㸑)등이 개발되기 전에는 고인돌 밑을 파서 만든 불구덩이(화덕)에서 피워진 불로 달궈진 고인돌 위에서 지져(烙) 살청(杀靑)된 후 상자(箱子)에 담겨 수레로 바이칼 호수 근처의 알카나이(Alchanai)로 수출되었다. 안강(安康)에 모여진 찻잎(茶葉)들은 달궈진 고인돌들 위에서 지져져 살청(杀靑)된 후 안동에서 정월대보름(上元) 석전(石戰)을 통해 선발된 장정(壯丁)들로 구성된 척석군(擲石軍)의 호위(護衞)를 받으며 카라반(Caravan 隊商)들에 의해 소백산맥(小白山脈)을 넘어 한양(漢陽)으로 운송되었다. 지난 2007년에 김해(金海) 구산동(龜山洞)에서 발견되었다가 다시 파묻히고 2021년에 다시 발굴된 길이 10m, 너비 4.5m, 높이 3.5m, 무게 350~400t 규모의 고인돌은 매년 김해에서 지져(烙) 살청(杀靑)된 후 전 세계로 수출된 찻잎의 양이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로 알려진 전남 화순의 고인돌 핑매바위가 길이 7.3m, 너비 5m, 높이 4m, 무게 약 280톤이었으니 김해의 구산(龜山) 바위는 김해의 찻잎 가공 처리량이 화순의 그것보다 결코 덜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고인돌을 지석묘(支石墓)라 이름 짓고 무덤으로만 생각해 왔기에 우리 민족의 고대사(古代史)는 절름발이가 되어 오늘과 내일의 민족사(民族史)에 등짐 같은 부담(負擔)으로만 치부(置簿) 당해 왔다. 그러나 고인돌은 무덤이 아니다. 고인돌은 만리(萬里 2500km)나 떨어진 지역으로 찻잎을 운송(運送) 해도 찻잎의 약효(藥效)를 보존(保存)할 수 있도록 찻잎을 지지는(烙), 살청(杀靑)이라는 가공 과정을 처리하는 생산 설비였다. 전남 화순(和順)과 고창(高敞)에 지금까지도 집단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고인돌 단지는 당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한반도는 국토 그 자체가 전 세계로 수출해야 하는 찻잎들을 모두 살청(杀靑) 처리하는 세계 유일의 찻잎(茶葉) 가공 국가였기 때문이었다. 기후변화로 지구상에 차(茶) 나무가 생장하는 곳은 오직 한반도와 일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고 일본이 잦은 화산과 지진으로 건설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드는 찻잎(茶葉) 살청(杀靑) 공장(工場)인 고인돌들이 자주 파괴(破壞)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유골(遺骨)이 나왔다해서 무덤이라고 단정하고 지석묘(支石墓)라는 이름까지 명명된 고인돌들은 찻잎 살청(杀靑) 설비(設備)가 아니라 개인이나 조그만 마을을 위해 살청 처리된 찻잎들을 저장하는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소규모 창고들이었다. 찻잎의 산화(酸化)를 중지시켜 주는 살청(杀靑)을 해 줌으로써 찻잎의 약효를 최소 일 년간 보존시키는 찻잎(茶葉) 살청 기계로서의 고인돌은 엄청난 규모의 돌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진이 많은 일본은 자연스럽게 도태(淘汰)되고 한반도가 찻잎을 살청(杀靑)하는 설비인 대규모 고인돌들이 지천(至賤)에 깔린 고인돌 나라가 되었다. 전 세계의 돈이 몰려와 엄청나게 많은 값비싼 공장이 지어진 나라였다는 말이다.


김해(金海)와 안동(安東), 평양의 석전(石戰)이 역사와 규모, 그리고 맹렬성에서 그 유명세를 분명하게 남긴 것은 그 지역이 차무역로상(茶貿易路上)의 중요한 기지(基地)들이었고 따라서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그 지역에 많은 침략자가 있었다는 반증(反證)이기도 했다. 지금의 전남 지역이 해상무역로를 통해 중국에 수출되기 위해 모여진 찻잎들을 2차 가공하는 지역이라면 김해(金海)와 안강은 왜(倭)에서 갓 채엽(採葉)된 찻잎들이 모이는 1차 가공지역이었다. 따라서 갓 채엽했기에 가장 약효가 좋은 찻잎들이었기에 이를 확보하고자 전 세계의 모든 차상인(merchant)들은 곡우(穀雨 4월 20일경)가 되기 전 김해(金海)로 몰려들었다. 기원후 157년에 벌어진 연오랑과 세오녀 사건 전까지 왜(倭)의 북쪽 지역과 붙어 있어 갓 채엽(採葉)된 왜(倭)의 찻잎이 육로(陸路)로 더 쉽게 많이 들어올 수 있었고 형산강(兄山江)을 끼고 있는 등 여러 지리적(地理的) 강점을 갖고 있던 안강(安康) 지역이 김해(金海)에 눌린 건 이들 찻잎을 노리고 영덕 지역까지 깊숙이 들어와 도적질을 서슴지 않았던 예인(濊人)들과 소백산맥, 낙동강에 둘러싸여 고립된 지형(地形)때문이었다. 살청(杀靑)된 찻잎들이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북쪽과 동쪽을 향해 육상과 해상으로 거침없이 운반(運搬)될 수 있었던 김해(金海)와 달리 안강(安康)은 북쪽은 소백산맥에 동쪽은 낙동강에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해(金海)가 안강(安康)의 동쪽에 위치했기에 안강(安康)에서 살청(杀靑)된 찻잎들은 북쪽 소백산맥을 향했다. 소백산맥 너머에는 후일 말갈(靺鞨)이라 불린 예족(濊族)이라 불린 사람들이 찻잎을 노려 자리하고 있던 곳이었다. 호시탐탐 안강(安康)의 찻잎을 노리는 그들 때문에 안동(安東)의 석전(石戰)이 유명해진 것이었다. 소백산맥을 넘기 전 카라반들은 안동(安東)에서 자신들의 찻잎들을 지켜줄 호송대원(護送隊員)들을 선발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북쪽 만리나 떨어진 알카나이(Alchanai)였고 따라서 호송대원(護送隊員)으로 선발(選拔)되면 그의 가족은 한해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혹여 도중에 찻잎을 지키기 위해 다치거나 죽었다면 보상금 또한 약정된 액수의 몇 배나 되었기에 호송대원으로 선발된다는 것은 엄청난 보수(報酬)가 보장된 취직(就職)이었다. 그래서 안동(安東)의 석전(石戰)은 무릿매(sling)까지 동원된 그야말로 전쟁 그 자체였다. 김해(金海) 또한 전 세계로 수출될 찻잎이 살청(杀靑)되는 곳이었기에 살청(杀靑)된 찻잎을 노려 수많은 도적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그렇게 도적들이 창궐했던 건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에 의해 고인돌로 살청(杀靑) 처리되지 않은 찻잎은 가져가봐야 소용없는 그저 풀이었기 때문이었다. 뜨겁게 달궈진 고인돌에 지져(烙) 살청(杀靑) 처리되지 않은 찻잎은 훔쳐봐야 가져가는 도중에 약효를 잃어버려 그냥 풀잎에 불과한 것이 되기에 오직 살청 된 찻잎만이 필요했다. 찻잎을 산화(酸化 oxidation)시키는 산화효소(酸化酵素 oxidation enzyme)를 실활(失活 Inactivation)시켜 찻잎의 약효를 보존시키는 고인돌을 사용해 찻잎을 지지는(烙) 살청(杀靑) 기술은 오직 우리 민족만이 가진 독점기술이었다.


차(茶) 나무에서 채엽된 찻잎(茶葉)은 그 순간부터 산화(酸化)되기 시작해 약효를 상실해 간다. 따라서 찻잎의 약효를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서는 살청이라 불리는 산화(酸化)를 막는 가공 작업을 빨리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런 살청(杀靑) 처리는 아무나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채엽(採葉)된 찻잎의 살청이란 게 찻잎이 내재하고 있는 산화효소(酸化酵素)를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공정인데 이는 햇빛에 건조하는 방법과 뜨거운 열에 덖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살청(杀靑) 공정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찻잎을 절대로 45 °C에서 55 °C 사이의 온도에 잠깐이라도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사이의 온도에 찻잎이 노출되면 살청(杀靑)의 원래 목적이었던 산화효소(酸化酵素)의 실활(Inactivation)은 커녕 오히려 찻잎 내 폴리페놀 옥시데이스(polyphenol oxidase)라는 산화효소(酸化酵素)의 활성화를 최대화시켜 찻잎 약효의 주성분인 카테킨(Catechin)의 산화중합(酸化重合 oxidation polymerism)을 촉진해 잎의 색깔이 녹색에서 갈색으로 순식간에 변해 버리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물과 함께 끓여 마셔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을 예방해 주는 것은 물론 찻잎의 고유 항산화(抗酸化) 성분으로 체지방 감소, 혈중 콜레스테롤 개선, 노화 방지 등을 통해 면역력(免疫力) 강화라는 특효(特效)가 있는 찻잎이 그냥 풀잎이 되는 거였다. 지금처럼 온도계가 있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햇볕에 의한 건조(乾燥)는 45 °C에서 55 °C 사이의 온도를 감지해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시도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뜨거운 열로 찻잎을 지지는 덖기였는데 청동솥과 무쇠솥이 개발되기 전 이 찻잎을 지지는 덖기를 가능하게 해 준 건 돌이었다. 최대한 신속하게 돌의 온도를 80 °C에 올라가게 하기 위해 큰 돌 밑에 흙을 파내 화덕을 만들어 불을 피워 돌을 데웠다. 땅을 파기 어려운 지역이거나 고인돌의 입석(立石) 상태가 불안정한 경우에는 짧은 높이의 돌들을 상다리처럼 놓아 평형을 맞춘 후 그 위로 큰 돌을 설치했는데 이 짧은 높이의 돌들이 만드는 공간을 화덕으로 이용해 불을 피웠다. 또한 가열되어 80 °C로 온도가 올라간 돌이 최대한 오래도록 그 온도를 유지해 많은 찻잎을 덖을 수 있도록 최대한 두툼한 두께와 크기를 가진 돌들이 채석장(採石場)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잘라져 설치되었다. 지석묘라고 부르는 고인돌의 대부분이 검게 그을려 있는 연유였고 대개의 고인돌이 100톤이 넘는 이유였다. 이렇게 찻잎의 산화를 막는 덖기용 살청(杀靑) 공정의 기계로 돌을 가열해 사용하는 기술은 온돌을 개발하게 한 원천이 되었고 큰 돌 밑에 땅을 파서 화덕을 만든 것은 아궁이(竈臼)로 진화했다. 짧은 높이의 돌들을 상다리처럼 활용한 바둑판식 고인돌에서 부뚜막(㸑)이 고안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 민족이 갓난아이가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는 생후 6개월 때부터 가르치는 도리도리 잼잼 곤지곤지는 모두 찻잎을 살청(杀靑)할 때 필요한 감각을 조기에 발전시키는 교육이었다. 반드시 알아내야 하는 고인돌의 가열된 열 온도 수준을 측정하기 위해 볼을 최대한 고인돌 옆에 갖다 대어 복사열(輻射熱)의 수준을 민감하게 감지하도록 하는 훈련이 도리도리였고 가열된 돌 위에서 찻잎들을 덖은 후 찻잎들을 수거할 때 찻잎이 손상되지 않도록 긁는 지력(指力)을 조절하도록 감각을 키우는 일이 잼잼이었고 그리고 찻잎의 지져진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찻잎을 눌러보는 감각을 키우는 일이 곤지곤지였다. 척석군(擲石軍)을 길러내기 위해 아이들에게 비석 치기와 팽이치기, 물수제비와 박 터뜨리기를 단계적으로 놀게 했던 우리 민족의 용의주도한 교육체계가 차산업(茶產業)의 종주권(宗主權)을 지켜나가기 위한 차산업(茶產業) 기술자 양성 분야에서는 단동십훈(檀童十訓)이란 이름으로 영아(嬰兒) 때부터 작동되고 있었다.


왜(倭)라고 불린 땅에서 채엽(採葉)된 찻잎(茶葉)들이 근역(槿域)이라 불린 지금의 한반도에서 고인돌들을 이용해 살청 처리되어 전 세계로 수출되던 시절, 배를 이용한 해상 운송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수출차(茶) 전량이 모두 알카나이(Alchanai)로 수출되었다. 알카나이로 모인 찻잎들은 서쪽으로 운송되어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대대(代代)로 살아온 자신들의 고향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던 시절이 지나고 해상무역(海上貿易)이 본격화되면서 결국 근역(槿域)에서 수출되는 찻잎에 대해 새로운 경쟁이 발생했다. 김해와 지금의 서울, 평양에서 벌어진 석전(石戰)은 이제 찻잎을 운송하는 카라반을 지키는 호송대원을 선발하는 석전(石戰)이 아니라 해상 무역로(海上貿易路)와 육상 무역로 중 어느 무역로(貿易路)로 수출용 찻잎들을 보낼 것인지를 결정하는 석전(石戰)이 되어갔다. 경쟁이 과열되어 전쟁이 되려는 순간 이를 진정시켜 준 것은 청동기(靑銅器)의 개발이었다. 청동솥(鼎)의 제작은 찻잎을 덖는 살청(杀靑) 공정을 용이하게 해 주었고 고인돌로만 살청(杀靑)이 이뤄지던 때와 비교하면 비교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의 엄청난 양의 찻잎들이 살청(杀靑)되어 수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된 차수요량(茶需要量)의 전 세계적 증가는 결국 해상무역로(海上貿易路)와 육상무역로(陸上貿易路)의 경쟁을 다시 격화시켰다. 육상무역로가 알카나이로 이어진 전통 무역로(貿易路)였다면 해상무역로는 중국 산동반도를 거쳐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로 이어진 새로운 무역로(貿易路)였다. 중국 산동반도로 살청 처리된 찻잎이 배로 수출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는데 그것은 원양항해(遠洋航海)를 할 수 있는 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조선(造船) 기술의 발전과 칠흑 같은 바다에서도 방향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천문학(天文學)과 항해술(航海術)이 갖춰져야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암포라(amphora) 같은 선박 운반(運搬) 전용(專用) 용기(容器)까지 만들어지자 고인돌을 이용해 찻잎을 지져(烙) 살청(杀靑)하던 가공 방법이 혁명적으로 개량되었다. 찻잎을 시루(甑)에 찐(蒸) 후 절구(臼)에 찧어(精) 떡(餠)으로 만드는 새로운 차(茶) 제조방법이 개발된 거였다. 이렇게 시루와 절구를 이용해 찻잎을 떡으로 만든 곳은 충남 직산(稷山)의 동남변에 있던 증평(曾坪)과 평양의 서북변에 있던 증산(甑山)이었다. 이렇게 되자 평양과 아산(牙山)은 전 세계 해상무역로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항구가 되었고 평양은 그로 인해 석전(石戰)의 격전지가 되었다. 그 후 계속된 조선기술과 항해술, 토기 제작 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차(茶)의 해상무역(海上貿易)을 폭발적으로 확대시켰고 그로 인해 육상 무역로는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김해(金海)를 통해 북쪽으로 올라온 찻잎(茶葉)들의 거의 전량이 증평(曾坪)에서 시루와 절구에 의해 떡차(餠茶)로 만들어져 직산(稷山)의 통제를 받는 아산(牙山)에서 배에 선적(船積)되는 것과는 달리 울산과 경주에서 소백산맥의 줄기인 월악산의 계립령(雞立嶺)과 소백산의 죽령(竹嶺)을 통해 올라온 찻잎들은 해상무역로에 공급할 것인지 육상 무역로에 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곳이 두 군데였는데 그 하나가 지금의 경기도 광주(廣州)였고 마지막 결정지가 지금의 서울 아현(阿峴)이었다. 아현(阿峴)의 만리재(萬里峴)에서 삼문밖 사람들과 용산, 마포 사람들까지 가세한 아현 사람들 사이의 석전(石戰)이 큰 규모로 격렬하게 치러지게 된 배경이었다. 아현에서 석전이 벌어진 고개를 만리재(萬里峴)로 부르는 이유는 마포(麻浦)에서 중국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까지의 거리가 해로(海路)로 만리(萬里)였기 때문이었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


석전(石戰)처럼 정월대보름에 거행되는 놀이 중에는 거북놀이라는 것도 있었다. 경기도와 충청도,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 행해지던 놀이였는데 경기도 광주(廣州)와 충남 천안(天安) 그리고 예산(禮山)에서 지금도 정월대보름 중요 민속으로 전승되는 놀이다. 옥수숫대를 벗겨 거북이 모양을 만든 후 두 사람이 앞과 뒤를 맡아 거북이처럼 돌아다니게 하며 동네와 동네의 유력한 집안들의 무병장수(無病長壽)와 행운을 빌어주는 굿들을 하면서 노는 이 놀이에서 특이한 것은 이 거북이가 동해바다를 건너온 거북(龜)으로 소개된다는 것이다. 북청 사자놀이처럼 두 사람이 들어가 움직이는 거북이를 안내하는 거북몰이꾼이 길놀이를 끝내고 동네의 유력 집안을 방문하면서 건네는 말은 거북이가 동해바다를 건너오느라 지쳤으니 먹을 걸 달라는 말이었다. 집주인이 먹을 걸 푸짐하게 내오면 굿을 주도한 상쇠가 무병장수(無病長壽)를 축원해 주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일본에서 동해 바다를 통해 건너온 찻잎들이 김해뿐만이 아니라 강릉과 동해 같은 지금의 강원도 항구를 통해 들어와 충청도 서해안까지 운반되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강릉과 동해에서 천안(天安)과 예산(禮山)으로 오려면 증평(曾坪)을 거쳐와야 하는 길이니 증평(曾坪)에서 떡차(餠茶)로 만들어져 도착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예산(禮山)과 천안(天安)은 아산(牙山)을 관문(關門)으로 삼는 지역이고 이들 지역은 직산(稷山)을 도읍으로 마한 전 지역을 다스렸던 월지국(月支國)의 영역이니 이들 차(茶)들은 해상무역로를 통해 중국 복주(福州)로 수출되는 것이 마땅했다.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김해(金海)에 나타난 곳이 구지봉(龜旨峯)이었고 그때 불려진 노래가 구지가(龜旨歌)이고 보면 거북(龜)이 상징하는 것은 해상무역 세력이라는 것은 확실해진다. 김해를 통해 근역의 땅에 들어온 찻잎들 거의 전량이 해상무역로로 수출되었고 강릉 같은 동해안의 항구들로 들어온 찻잎들도 가공되어 해상무역로를 통해 수출되었음을 광주(廣州)와 천안, 예산의 거북놀이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결국 육상무역로로 수출되는 차(茶)들은 경주 울산에서 가공되어 죽령과 계립령을 통해 소백산맥을 넘어온 안강의 차들뿐이라는 것이 한양(漢陽) 아현(阿峴)의 만리재에서의 석전(石戰)을 더욱 격렬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만리재에서의 석전(石戰)에서마저 패한다면 육상무역로를 통해 북방으로 수출되는 차(茶)는 거의 없게 되었다. 용산과 마포에서 차(茶)를 운반하기 위해 일 년을 기다려 온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해상무역로로 올릴 차(茶)를 확보하지 못할까 봐 노삼초사하고 있었다. 용산과 마포 사람들이 아현 사람들 편에서 만리재(萬里峴) 석전(石戰)에 참여한 연유였다.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문), 서대문(敦義門)의 삼문(三門) 밖 사람들과 용산, 마포 사람들까지 가세한 아현 사람들이 서로 맞붙는 대규모의 석전(石戰)이 매년 정월대보름 행사로 벌어진 연유였다.


國俗於端午 無賴之徒 群聚通衢 分左右隊 手瓦礫相擊 或雜以短梃 以決勝負 謂之石戰. 나라 풍속에 단오가 되면 무뢰배들이 떼를 지어 큰 거리에 모이고는 좌우로 패를 나누어 기와조각이나 돌멩이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면서 때로는 몽둥이까지도 사용하여 승부를 가렸는데, 이것을 석전이라고 한다. - 고려사 高麗史 신우(禑王) 6년(1380년) 5월


석전(石戰)에 관하여 또 다른 기록을 남긴 이는 정조(正祖) 대의 유득공(柳得恭)이었다. 1849년에 편찬된 홍석모의 동국세시기보다 이른 정조 연간(年間:1776-1800)에 유득공(柳得恭)에 의해 편찬된 경도잡지(京都雜志)는 경도(京都)인 한양(漢陽 서울)의 풍속(風俗)과 세시(歲時)를 각각 기록(記錄) 한 2권(卷) 1 책(冊)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중 음력 정월대보름을 말하는 상원(上元)의 세시(歲時)로 석전(石戰)이 기록되어 있었다. 경도잡지(京都雜志) 2권(卷) 세시(歲時) 석전조에서 유득공도 ‘삼문(三門:숭례문·돈의문·흥인문) 밖과 아현(阿峴) 사람이 만리재(萬里峴)에서 돌을 던지며 서로 싸웠는데 삼문(三門) 밖 사람이 이기면 경기도(京畿道)에 풍년이 들고, 아현(阿峴) 사람이 이기면 다른 도(道)에서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고 동국세시기와 동일한 기록을 남겼다. 석전(石戰)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은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禑王) 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정조(正祖)와 우왕(禑王) 모두 우리 민족사(民族史) 그 자체인 차산업(茶產業)과 아주 깊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려말 우왕과 조선말 정조 때의 석전(石戰) 기록에 얽힌 슬픈 민족사(民族史)와 왕조사(王朝史)는 만고충신 정몽주 선생편에 다룬다. 거북이(龜) 놀이를 통해 자신들의 영역을 보여주고 자신들이 한반도 역사의 주인이었음을 분명히 남긴 귀상왕(貴霜王)과 월지족(月氏族)에 대해서는 백제가 왜 쿠다라일까에서 자세히 다룬다. (諸國稱之皆曰貴霜王. 漢本其故號 言大月氏云. 여러 나라들은 모두 그것을 칭하여 귀상왕(貴霜王)이라 하지만 한나라는 그 옛날의 칭호를 써서 대월지라고 부른다. - 후한서 後漢書 96권 서역전 西域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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