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Terah was 70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Abraham, Nahor, and Haran. Haran was the father of Lot, and Haran died in his hometown of Ur in Babylonia, while his father was still living.…Terah took his son Abraham, his grandson Lot, and his daughter-in-law Sarai, Abraham’s wife, and with them he left the city of Ur in Babylonia to go to the land of Canaan. They went as far as Haran and settled there. 데라는 칠십 세가 된 이후에 아브람과 나호르 그리고 하란의 아버지가 되었다. 하란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적 고향인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죽었는데 롯은 그의 아들이었다… 데라는 아들 아브라함과 손자 롯, 며느리 사라와 함께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우르를 떠났고 하란까지 가서 그곳에 정착했다. - 창세기(Genesis) 11장 26절- 31절
The Lord said to Abraham, “Leave your country, your relatives, and your father’s home, and go to a land that I am going to show you.…When Abraham was seventy-five years old, he started out from Haran, as the Lord had told him to do; and Lot went with him. Abraham took his wife Sarai, his nephew Lot, and all the wealth and all the slaves they had acquired in Haran, and they started out for the land of Canaan. When they arrived in Canaan, Abraham traveled through the land until he came to the sacred tree of Moreh, the holy place at Shechem. (At that time the Canaanites were still living in the land.) The Lord appeared to Abraham and said to him, “This is the country that I am going to give to your descendants.” After that, he moved on south to the hill country east of the city of Bethel on the west and Ai on the east.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떠날 때에 75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라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떠나서 마침내 들어갔더라.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아브람은 세겜 땅의 신성한 장소인 모레의 신성한 나무(생명의 나무)에 다다를 때까지 그 땅을 계속 여행했다. (그때 가나안인들은 쭈욱 그 땅에서 살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 창세기(Genesis) 12장 1. 4- 8절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우르(Ur)에 살던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Terah)와 부인 사라 그리고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Canaan)으로 이주하기 위해 길을 나선 건 수메르의 만성적인 차부족(茶不足)이 결국 절망적인 상황으로 전개되기 직전인 기원전 2091년이었다. 수메르인들의 마지막 왕조인 우르 제3왕조가 멸망한 해가 기원전 2004년이니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난 것은 차부족(茶不足)으로 인해 우르가 무정부상태가 되기 직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턱없이 부족한 차(茶)를 물에 우려내 찻물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시설인 지구라트(Ziggurat)를 건설해 차부족(茶不足) 사태로부터 도시를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노력들도 수포로 돌아가기 시작한 때였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Terah)는 아브라함을 포함해 세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우르를 떠날 때 동반한 가족은 자신보다 먼저 죽은 아들 하란의 아들 롯과 아들 아브라함 부부뿐이었다. 이는 데라가 가나안을 향해 우르를 떠날 때만 해도 가나안으로 떠나는 것은 엄청난 모험(冒險)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위험이 가득한 여정(旅程)이 아니라면 데라의 모든 가족이 함께 떠났을 터였다. 구약성서 창세기 12장 7절에는 아브라함이 왜 가나안 땅을 향해 하란을 떠났는지에 대한 이유가 또한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개정 전 한국어 번역 성서(聖書)에는 그냥 상수리나무(㰛)로 되어 있지만 영어로 번역된 성서에는 신성(神聖)한 나무라고 번역된 나무가 가나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데라(Terah)가 죽은 후 하란을 떠나 온 아브라함(Abraham)은 지금의 요르단강 서안(West Bank)의 발라타(Balata) 지역인 세겜(Shechem)의 성(聖)스런 장소인 모레(Moreh)에 있는 신성한(sacred) 나무(tree)가 있는 곳까지 나아갔다. 창세기 2장 9절에 기록된 에덴(Eden) 동산 한가운데 서 있었다는 바로 그 생명을 주는 나무였다. 그랬기에 아브라함은 그곳까지 가야 했고 그래서 그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쫓겨났다. 이미 그곳은 차(茶) 나무를 찾아 오래전부터 정착해 살던 사람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땅이었다. 아브라함(Abraham)이 가나안에 정착하지 못하고 애굽으로 들어간 연유였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온 아브라함은 그때에도 결코 사해 북쪽으로는 진출하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사해 북쪽 세켐(shechem) 지역으로 진출한 것은 기원전 1446년에 있었던 모세가 이끈 출애굽 사건 이후였다. 그때엔 이미 세켐에도 극심한 기후변화로 인해 차(茶) 나무들은 모두 사라지고 생명나무인 차(茶) 나무의 일부 약효를 가지고 기후변화에 적응되어 변형된 채 살아남은 대추야자나무와 올리브 나무들만이 있었다.
Then the Lord God plant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and there he put the man he had formed. He made all kinds of beautiful trees grow there and produce good fruit. In the middle of the garden stood the tree that gives life and the tree that gives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what is bad. A stream flowed in Eden and watered the garden; beyond Eden it divided into four rivers.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 창세기(Genesis) 2:8-10
Utnapishtim's wife convinces the old man to have mercy on him; he offers Gilgamesh in place of immortality a secret plant that will make Gilgamesh young again. The plant is at the bottom of the ocean surrounding the Far-Away; Gilgamesh ties stones to his feet, sinks to the bottom, and plucks the magic plant. But he doesn't use it because he doesn't trust it; rather he decides to take it back to Uruk and test it out on an old man first, to make sure it works. 우트나피시팀의 아내는 길가메시에게 자비를 베풀어주라고 늙은 남편을 설득했다. 그래서 그는 길가메시에게 그를 다시 젊어지게 해 줄 불멸의 비밀 나무가 있는 곳을 알려줬다. 그 나무는 망망대해의 밑바닥에 있었다. 길가메시는 자신의 발에 돌들을 매달아 물속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마법의 나무에서 잎들을 뽑았다. 그러나 그는 그 나뭇잎들이 젊음을 돌려준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에 그것을 바로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불멸의 비밀 나무에서 뜯은 잎들을 우륵으로 가져가 그것이 확실히 젊음을 되찾게 해 주는지 확인하기 위해 우륵의 노인들에게 먼저 먹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 Epic of Gilgamesh(길가메시 서사시) Tablet(점토판) 11.
Abhra (अभ्र) refers to an herbal ingredient which is included in a (snake) poison antidote recipe, according to the Kāśyapa Saṃhitā: an ancient Sanskrit text from the Pāñcarātra tradition dealing with both Tantra and Viṣacikitsā(treatments of various poisons) —an important topic from Āyurveda which deals with the study of Toxicology (Viṣavidyā or Sarpavidyā). 아브라는 카스야파 삼히타에 따르면 해독제 조제에 들어가는 한 약초 성분을 말한다. 카스야파 삼히타는 탄트라와 비사시킷사라는 다양한 독들의 치료들을 정리한 판카라트라 전통을 산스크리트어로 기록한 고대 문서인데 독성학(毒性學)의 연구들을 정리한 아유르베다의 한 중요한 주제였다. —In the Añjana or Collyrium segment of the eighth Adhyāya, Kāśyapa prescribes eight types of permutation and combination of herbs that effectively arrest poison. 안자나 혹은 콜리리움의 여덟 번째 아드야야 부분에서 카스야파는 효과적으로 독성을 잡아내는 약초들의 여덟 가지 조합과 순열을 기술하고 있다. 여덟 가지 약초들의 사용 순서가 중요한 것은 순열이고 여덟 가지 약초들의 선정이 중요한 것은 조합이다.
According to Kāśyapa saṃhitā (verse VIII.38)—The oil extracted from Śilāla, Candana, Kuṣṭha, Abhraka (Abhra) dipped in Tulasī and heated with a little of Māṃsī, Mustard and Spṛkkā soaked in Hiṅgu water form a group of poison-alleviating drugs to make an añjana. 카스야파 삼히타에 따르면 시라라, 칸다나, 쿠스타, 아브라로부터 추출한 오일을 투라시에 떨어뜨리고 힌구물에 담가놓은 약간의 맘시와 머스터드 그리고 스푸르카와 함께 끓이면 생명을 주고 지켜주는 어머니를 만들어 주는 일단의 독성을 경감시키는 약들이 형성된다.- Wisdom Library
유대(Judea)인의 시조(始祖)인 아브라함의 이름 뜻을 헤브루(Hebrew) 말이라며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Father of many)라고 새기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이란 이름의 뜻은 사실 산스크리트어로 차(茶) 나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란 뜻이다. 희랍(希臘)에서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처럼 인도에서 의학(醫學)의 아버지로 불리는 수슈르타(Sushruta)가 기원전 8세기에 입으로 전해져 오던 해부학(anatomy), 약학(medicine), 약초학(herbalism), 분류학(taxology) 등으로 이루어진 전통 의학(醫學) 체계를 글로 집대성한 아유르베다(Ayurveda)라는 의학서(醫學書)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브라(Abhra)는 해독제(解毒劑) 조제(調劑)에 들어가는 특정한 약초(藥草) 성분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유르베다라는 말도 산스크리트어로 생명 과학(science of life)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Abhraham)의 함(ham)은 산스크리트어로 가다(to go, to move)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아브라함(Abraham)이라는 이름은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father of many nations)라는 뜻이 아니라 해독제 조제에 들어가는 약초(Abhra) 즉 찻잎을 찾아다니는(ham) 사람이란 뜻이었다. 차(茶) 나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란 뜻의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Isaac)의 이름 또한 히브리어로 이쯔앜(Yitzchak)인데 이를 웃는 자(laughter)라고 해석하지만 그러나 Yitzchak은 산스크리트어로 끝까지(yita: steady) 차나무(cha)를 찾아가는 사람(Yithi: one who goes, traveler)이란 뜻이다. 차(茶)를 포기해 이스라엘로 개명된 야곱의 후손들을 가나안 사람들이 히브리인 즉 헤브루(Hebrew)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출애굽 한 후부터였다. 헤(He)는 산스크리트어로 주변에 있는 사람(someone nearby)을 뜻했고 브루(brew)는 차(茶)를 물에 넣고 함께 끓여(boil) 차(茶)의 약효를 뜨거운 물에 우려내는(brew) 것을 뜻했기에 헤브루인들은 결국 차(茶)를 뜨거운 물에 우려내는 이웃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차(茶) 나무가 생장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질소를 토양에 제공해 주는 폭풍우와 번개를 만들어 내는 신(神)인, 황소로 상징되는 바알(Baal) 신(神)을 최고신(神)으로 숭배하는 가나안과 페니키아 사람들은 얼마 안 되는 차(茶)들을 물에 끓여 우려내는(brew) 기술로 많은 찻물을 만들어 차(茶) 부족(不足) 문제를 해결하는 그들을 헤브루(Hebrew)인이라 히브리인이라 불렀다. 차(茶)를 물에 담가 차(茶)의 약효를 물에 우려내는(infuse) 기술은 우르의 지구라트(ziggurat 卨)와 모헨조다로의 스투파 그리고 욕조(浴槽)로 알려진 저수조(貯水槽)에서 보듯 기원전 2500년경부터 개발되어 사용되어 온 방법이었다. 차(茶)를 물에 담가 우려낸(infuse) 이유는 한정된 차(茶)를 가지고 많은 찻물을 만들어 부족한 차(茶)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뿐 아니라 배(舟)에 의한 수송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차(茶)를 상자에 담아 원하는 만큼을 배(舟)로 운반하려면 당시로서는 만들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배(舟)가 필요했다. 그러나 차(茶)를 물에 담가 우려내(infuse) 찻물로 만들면 기존에 개발해 놓은 배(舟)로도 충분히 수송할 수 있었다. 암포라(Amphora)라는 선박용(船舶用) 특수 용기(容器)가 개발된 건 그래서였다. 포도주를 담기 위해 신석기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암포라는 차(茶)를 물에 담가 우려내 만든 찻물을 배로 운반하기 위해 개발된 용기였다. 암포라의 암(Ama)은 산스크리트어로 끓이지 않은(unboiled)이란 뜻이고 포라(phora)는 고대 그리스어로 수지(樹脂) 운반자(gum bearer)란 뜻인 연유였다. 따라서 암포라는 차(茶)를 물과 함께 끓여 우려낸(brew) 찻물을 담는 운반 용기가 아니라 차(茶)를 그냥 물에 담가 우려낸(infuse) 즉 끓여서 우려낸 것이 아닌(unboiled) 찻물을 담아 운반(運搬)하는 용기(容器)였다. 차(茶)를 물에 넣어 끓여 우려내면(brew) 더욱 증강된 약효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낸 사람들이 물을 끓여도 깨지지 않는 용기를 개발해 낸 건 당연했다. 청동기(靑銅器)가 개발된 연유였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Issac)의 아들, 야곱(Jacob)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인(Israelites)이라 불렸다. 히브리(Hebrew)어로 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란 뜻으로 알려진 이스라엘(Israel)은 산스크리트어로는 태양신(太陽神)을 최고신(神)으로 숭배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이스(Is)는 주님(Lord)이란 뜻이고 라(Ra)는 태양(Sun) 또는 빛(light), 불(fire) 그리고 엘(El)은 신(god)이란 뜻이다. 이렇듯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이 폭풍우의 신(神)이 아닌 태양의 신(神)을 최고 신(神)인 주님(Lord)으로 숭배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는 것은 우르 시절부터 조상 대대로 이어온 차(茶) 나무 탐색과 찻잎을 우려내는 일이 아닌 농업과 목축을 야곱이 새로운 가업(家業)으로 삼았음을 알리는 사변(事變)이었다. 야곱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장자상속권(長子相續權)을 가로채 할 수 있게 된 차(茶) 나무 탐색과 차(茶)를 물에 우려내는(infuse) 일을 가나안인들의 방해와 견제 때문에 사실상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가업(家業)을 뺏긴 쌍둥이 형 에서(Hesau)가 페트라(Petra)를 거점 삼아 아카바(Aqaba)를 통해 들어오는 모헨조다로 산(產) 찻물을 담은 암포라를 이집트와 레반트에 중계(中繼)하는 일마저 독점해 버리자 차(茶) 관련한 가업(家業)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꾸려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茶)와 관련된 일을 가업(家業)으로 삼아온 아브라함 가문의 상속권(相續權)을 이어받은 야곱이 결국 차(茶)를 버리고 다른 민족들과 똑같이 농업과 목축을 생업으로 삼은 이 사건으로 지어진 이름이 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이스라엘이었다. 수메르인들이 사라져 버린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 레반트 지역에서 유일하게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찻물 만드는 일은 그들 선민(選民) 사상의 뿌리였다. 야곱은 그 선민(選民) 사상의 근거를 무너뜨린 거였다. 격심한 반대가 없을 수가 없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압복강가(Jabbok river)에서의 씨름(wrestlng) 사건은 창세기 32장 22절부터 32절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건으로 야곱은 자신이 브니엘(peniel)이라고 명명한 그 사건 장소에서 당한 부상으로 절름발이가 되었다. 차(茶) 나무를 찾아내고 찻잎(茶葉)을 물에 담가 우려내는 찻물 제조업을 포기한 벌(罰)이었다. 브니엘(peniel)은 산스크리트어로 근육(pe:muscle 筋肉)이 없어진(ni:away) 신(el:god)이란 뜻이다. 야곱이 절름발이가 될 정도로 상대방의 가격(hit)에 의해 심하게 부상당한 부위가 고관절(hip joint)이었기에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지금도 고관절 근육(筋肉)을 먹지 않는다고(32절), 야곱이 하느님을 대면(face-to-face) 해 보았고 그래서 자신의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말하며 그곳을 브니엘(Peniel)이라 불렀다(30절) 고 창세기는 기록했다.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서 생계를 유지할 충분한 농경지와 가축을 확보하지 못했던 야곱은 결국 자신의 11번째 아들 요셉의 인도로 온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이주(移住)하게 되었다. 야곱이 이집트에서 출세한 아들 요셉의 권유로 슬하의 70명 가족과 함께 이집트로 이주(移住)한 건 기원전 1876년이었다. 430년간의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생활이 시작된 연유였다.
Four hundred and eighty years after the people of Israel left Egypt, during the fourth year of Solomon’s reign over Israel, in the second month, the month of Ziv, Solomon began work on the Temple.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 The First Book of Kings(열왕기 상 ) 6장 1절
The Israelites had lived in Egypt for 430 years. On the day the 430 years ended, all the tribes of the Lord’s people left Egypt.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 Exodus(출애굽기) 12장 40-41절
Then Joseph brought his father Jacob and presented him to the king. Jacob gave the king his blessing, and the king asked him, “How old are you?” Jacob answered, “My life of wandering has last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이집트 왕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 Genesis(창세기) 47장 7절-9절
The time came for her to give birth, and she had twin sons. The first one was reddish, and his skin was like a hairy robe, so he was named Esau. The second one was born holding on tightly to the heel of Esau, so he was named Jacob. Isaac was sixty years old when they were born. 해산 기한이 찬 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 Genesis(창세기) 25장 24-26절
Abraham was a hundred years old when Isaac was born.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났을 때에 백 살이었더라-Genesis(창세기) 21장 5절
When Abram was seventy-five years old, he started out from Haran.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75 세였더라 -Genesis(창세기) 12장 4절
다른 민족들과 다를 바 없이 농경과 목축으로 살아갔기에 이스라엘인(Israelites)이라 불린 야곱의 후손(後孫)들이 아브라함의 후예(後裔) 답게 다시 차산업(茶產業)에 복귀해 히브리(Habiru)인 즉 헤브루(Hebrew)인들로 불리게 된 건 애굽에 주석(朱錫)이 없어 주석이 섞이지 않은 순동(純銅)으로 만든 청동기(靑銅器)가 본격적으로 제조되어 무른 청동솥(靑銅鍑)이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곱이 이집트로 이주할 당시 아들 요셉(Joseph)이 이집트 파라오(Paraoh)의 총애를 받고 그 총애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야곱이 팥죽으로 형에게 구매하고 임종 직전의 이삭으로부터 축복받아 인준(認准)받은 장자상속권을 가지게 되어 사용할 수 있게 된 찻물 제조 기술 덕분이었다. 이 찻물 제조 기술이 그들을 헤브루(Hrbrew), 즉 히브리(Habiru)인이라고 불리게 한 이유였다. 히브리(Habiru)라는 용어가 건너편이라는 뜻의 에베르(עֵבֶר)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며 강(江)을 건너온 자(者)라고 새기나 히브리는 하비루(Habiru)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산스크리트어로 하(Ha)는 물(water)을 뜻했고 비루(Biru)는 생명과학인 아유르베다(Ayurveda)에서 면역력(immune system)과 체력(stamina)을 높여주는 식물, 즉 차(茶)를 뜻했다. 따라서 하비루(Habiru)는 곧 찻물(茶水)을 말하는 거였다. 히브리인 요셉은 차(茶)를 물에 담가 우려내는(infuse) 것에서 더 나아가 차(茶)를 물과 함께 용기에 넣고 끓여(brew) 더욱 약효가 강한 진(津)한 찻물(茶水)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해 냈다. 단순히 물에 담가 우려내는(infuse) 것이 아니라 차(茶)를 물에 넣고 함께 끓여(brew) 차(茶)에 내재되어 있는 많은 성분을 우려내자(抽出) 찻물의 약효는 대폭 강화되었고 이로써 이집트인들의 공중보건 환경은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대로 이집트 전체의 산업 생산성을 높이는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그 공으로 요셉은 이집트 왕국의 총리가 될 수 있었고 그의 민족은 이제 이스라엘이 아니라 헤브루(Hebrew)라고 즉 히브리(Habiru: 찻물 茶水)라고 불렸다. 총 70명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인들의 애굽생활이 430년이 지난 후 출애굽할 당시에는 전쟁에 나갈 수 있는 20세 이상 성인 남성만 603,550명으로(민수기 民數記 Numbers 1장 20-46절) 늘어난 연유는 바로 이 청동기(靑銅器)의 제조와 보급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헤브루, 히브리인들이 주석이 혼합되어 더욱 강해진 청동기(靑銅器)를 만나는 행운이 있었다. 기원전 1670년경에 이집트에 힉소스(Hyksos)라 불리는 사람들이 주석을 혼합해 강력해진 청동기 무기와 마차를 몰고 대거(大擧) 침입해 온 거였다. 사실 구리를 사용해 기물을 만드는 청동기(靑銅器) 문명은 차(茶) 부족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해 조상 대대로 살던 정든 고향을 떠나 동쪽을 향해 유랑(流浪)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피 말리는 노력 때문에 생겨난 인류 최초의 문명이었다. 끓여도 끓여도 깨지지 않는 용기(容器)를 만들려 한 것도 항상 부족한 차(茶)를 어떻게 하든 더 우려내고 활용해 차(茶)를 찾으러 유랑하지 않으려는 차(茶)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의 피눈물 나는 뿌리 의식 때문이었다. 구리로 용기(容器)를 만든 것은 열전도율이 가장 높은 금속 중에서 구리가 가장 낮은 온도에서 녹았기 때문이었다. 주석(朱錫)이 없어 순동(純銅)으로만 청동기(靑銅器)를 만들던 이집트에 주석을 구리와 혼합해 강한 청동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침략해 왔다. 아무리 가열해도 우그러지지 않는 구리솥(銅鍑)을 갖게 된 헤부르인들은 이 솥을 사용해 차를 끓이는 걸 넘어 고아(simmer)서 차의 진액(津液)까지 추출(extract)해 차즙을 만들어 냈다. 더욱 강력한 약효를 가진 차즙이었다. 차(茶)를 넣고 물을 팔팔 끓여도 빨갛게 달궈져 우그러지지 않는 구리솥(銅鍑)의 출현은 끓여서 차(茶)를 우려내는(brew) 기술을 가지고 있어 헤브루라 불리던 아브라함의 후예(後裔)들을 이집트의 파라오(Paraoh)가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20세 이상 성인 남성만 60만이 넘는다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인의 총인구수(總人口數)는 최소 200만 명에서 최대 600만 명까지로 불어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이집트인들의 경계와 질시는 임계점을 넘게 되었다. 차즙 기술의 공유하라는 파라오의 명령을 히브리인들이 따르지 않자 본격적인 민족 탄압이 시작된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최초의 피라미드를 건설한 시대부터 이집트인들의 염원 사업이었던 멤피스와 아카바항을 연결하는 시나이 반도를 가로지르는 홍해길 도로 건설 작업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히브리인들을 모두 투입하라는 파라오의 명령이 내려진 연유였다.
구리(銅)에 주석(朱錫)을 혼합해 구리의 전성(展性:얇게 펴지는 성질)과 연성(延性:얇게 늘어나는 현상)을 대폭 낮춘 청동(靑銅)으로 마차의 수레바퀴를 테둘러 바퀴의 내구성(耐久性)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키고 마차의 중요 부품을 나무가 아닌 주석과 혼합한 청동으로 만들어 말이 끄는 마차를 전투에 투입하고 청동 검(劍)과 창(槍)을 만들어 사용한 건 힉소스(Hyksos)라 불린 사람들이었다. 아이레(Eire)에서 떠나왔기에 브리튼섬의 서쪽 끝 콘월(Cornwall) 지역에서 산출되는 주석(朱錫)을 알고 있던 그들에 의해 주석이 혼합된 강력한 청동기가 만들어지자 그들은 즉각 차(茶)를 확보하기 위해 동방을 향해 원정에 나섰다. 기원전 1700년경 모헨조다로를 침략해 점령한 사람들은 아리안(Arian)이라고 불린 사람들이었고 기원전 1670년경에 이집트를 침략해 점령한 이들은 힉소스(Hyksos)라고 불린 사람들이었다. 고대 이란어로 아이랴(Airya)라고 고대 페르시아어로 아리야(Ariya)라고 불린 그들과 스스로를 아이랴(Airya)라고 불렀던 아베스타(Avesta)인들은 그들의 연원(淵源)이 아이레(Eire)라고 추정할 수 있게 해주는 음운적 유사성을 보여준 좋은 보기(例)들이었다. 이런 아일랜드(Ireland) 켈트족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더욱 강력한 청동기를 제작하자 히브리인들은 힉소스인들이 가져온 주석이 섞인 청동솥을 활용해 차(茶)를 오랫동안 고와(simmer) 달인 후 압착(壓搾 squeeze)하여 차즙(茶汁)을 내는 방법을 개발해 냈다. 이 기술을 개발한 것은 히브리(Habiru)의 12지파 중 유다(Judah) 지파 사람들이었는데 이는 후일 히브리인들을 유대인이라 부르게 하는 연유가 되었다. 또한 유다(Judah)인의 땅(Judea)에 사는 사람들을 주스(Jews)라고 부르게 된 것도 그들이 찻잎을 물과 함께 끓여 우려낸(brew) 찻물보다 더 진한 차즙(茶汁)을 만드는 주스(Juice)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약재(藥材)를 물과 함께 약탕기(藥湯器)에 넣고 끓여(brew) 고와(simmer) 달여진 후 약재(藥材)를 천으로 싸 양쪽 끝에 숟가락 같은 굵은 막대(匕)를 끼워 압착(壓搾)해 즙(汁)을 짜내던 것처럼 그와 유사하게 유다(Judah)인들도 차즙(茶汁 tea juice)을 만들어 냈다. 주스(Juice)라는 영어는 고대 프랑스어 주스(Jus)에서 유래된 단어인데 주스(Jus)는 약초를 끓여서 얻은 액체(Liquid obtained by boiling herbs)라는 뜻이었다. 탈애굽(Exodus) 사건이 일어나게 된 진짜 이유도 히브리인들이 차를 끓여 우려내는(brew) 방법을 통해 찻물(habiru)을 만드는 기술을 뛰어넘는 주스(jus)라는 더욱 생산적인 방법을 통해 차즙(tea juice)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이 중국 일본과 달리 밥상에 국물(汁)과 숟가락(匕)을 젓가락과 함께 반드시 올려놓도록 하는 문화를 굳건히 지키는 연유이기도 하다. 탕약(湯藥)은 타약(沱藥)의 오기(誤記)였다. 타(沱) 자는 약탕기(宀)에서 달여진 차(茶)가 숟가락(匕)으로 꼬아 짜져(壓搾) 즙(汁)이 되는 과정을 상형한 글자였다. 신라 제4대 왕 탈해(脫解)의 탈(脫) 자는 중국어로 투오 [tuo]라 발음되고 타(沱) 자 또한 중국어로 [tuo]라 발음된다.
but their descendants, the Israelites, had many children and became so numerous and strong that Egypt was filled with them. Then, a new king, who knew nothing about Joseph, came to power in Egypt. He said to his people, “These Israelites are so numerous and strong that they are a threat to us.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해서 그들은 우리에게 위협이다. - 출애굽기(Exodus) 1:7-9.
Finally the king issued a command to all his people; “Take every newborn Hebrew boy and throw him into the Nile, but let all the girls live.” 마침내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히브리인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 출애굽기(Exodus) 1:22.
출애굽기 1장은 턱없이 부족한 차(茶)를 물에 넣고 함께 끓여 우려낸 찻물(Habiru)을 공급해 히브리(Hebrew)인들의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건강 상태 또한 이집트인들보다 훨씬 좋은 것에 대해 이집트의 파라오가 우려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집트 안에서 이집트인들보다 더 번성하고 강성해지는 헤브루인들은 이집트인들에게는 커다란 의문이었다. 결국 그 이유가 찻물 때문이라는 것을 안 파라오는 대경실색하게 되고 즉시 찻물 제조 기술을 애굽인에게도 가르쳐 공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파라오의 명령을 히브리인들이 따르지 않자 갓 태어난 히브리인들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이 내려졌다. 후일 수백만명의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모세가 태어난 건 그 명령이 내려진 때였다. 모세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동안 지금의 카이로에서 아카바항까지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도로를 건설하는 공사에 히브리인 전체가 강제동원되는 등 나날이 더욱 극렬해지는 이집트의 탄압은 히브리인들에게 차를 끓여 우려내는 기술(brewing)을 능가하는 신기술을 개발하게 하는 엄청난 자극이 되었다. 끓여 우려내는(brew) 찻물 제조 기술을 이집트에 뺏겼을 때를 대비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히브리인들은 찻물제조기술을 이집트와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모세(Moses)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합치는 것을 무시하다라는 뜻이다. 모세의 모(Mo)는 무시하다(Ignorance)라는 뜻이고 세(Se)는 합치다(come together)라는 뜻이다. 결국 모세(Moses)란 존재는 이름에서부터 찻물제조 기술을 강탈하려는 이집트의 부당한 강압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히브리인들의 민족적 결심이 집약된 표상이었다. 모세의 지도로 수백만의 히브리인들이 한꺼번에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 결정적 동인은 유다(Judah)인들이 찻잎을 물과 함께 끓여 우려낸(brew) 찻물보다 더 진한 차즙(茶汁)을 만드는 주스(Juice) 기술 개발에 성공해서였다. 아무리 민족적인 정체성을 잘 유지해 왔다 하더라도 또한 민족적으로 잘 단결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이집트는 그들이 430년을 살아온 제2의 조국이었고 고향 그 자체였다. 히브리인들만이 가진 주스 기술로 만들어 내는 차즙(茶汁)이 가나안으로 돌아가서도 자신들을 먹고살 수 있게 해 줄 확실한 경제적 기반이 되어 줄 것이라는 사람들의 확고한 신뢰가 없었다면 애굽에서의 민족 전체 탈출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스 (Juice) 기술 개발은 브루잉(Brewing) 기술 때문에 헤브루(Hebrew)인들이라 불리던 사람들을 주스(Jews)라고 또는 유대(Judae)인이라고 바꿔 부르게 된 계기였다.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탈출하자 이집트의 파라오가 군대를 파견해 그들의 이동을 무력으로 막아선 이유가 주스 기술에 있었다. 애굽을 탈출한 후 유다(Judah) 지파의 땅을 유대(Judae)라고 하고 그래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유대인(Judaean)이라고, 주스(Jus, Jews)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족한 차(茶)때문에 고통받던 지중해 모든 지역에서 유다의 주스(茶汁)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건 당연했다.
King Solomon also built a fleet of ships at Eziongeber, which is near Elath on the shore of the Gulf of Aqabq, in the land of Edom. King Hiram sent some experienced sailors from his fleet to serve with Solomon’s men. They sailed to the land of Ophir and brought back to Solomon about sixteen tons of gold. 솔로몬 왕이 에돔 땅 홍해 해안가의 엘롯 근처 에시온게벨에서 함대의 배들을 지은 지라. 히람이 자기 함대에서 바다에 익숙한 선원들을 파견하여 솔로몬의 선원들과 함께 일하도록 했다. 그들이 오빌의 땅까지 항해해 닿은 후 거기서 금 16톤(사백이십 달란트)을 획득해 솔로몬 왕에게 가져왔다. - The First Book of KINGS(열왕기 상) 9:26-27.
King Hiram of Tyre had always been a friend of David’s, and when he heard that Solomon had succeeded his father David as king, he sent ambassadors to him.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는 걸 티레 왕 히람이 듣고 그의 신하들을 솔로몬에게 보냈으니 이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 - The First Book of KINGS(열왕기 상) 5:1-2.
So Hiram supplied Solomon with all cedar and pine logs that he wanted, and Solomon provided Hiram with 100,000 bushels of wheat and 110,000 gallons of pure olive oil every year to feed his men. 솔로몬의 모든 원대로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을 주매 솔로몬이 히람에게 그의 궁정의 음식물로 밀 이만 고르와 맑은 기름 이십 고르를 주고 해마다 그와 같이 주었더라. - The First Book of KINGS(열왕기 상) 5:10-11.
인도유럽어족 계열에 속한 수많은 민족들의 신화(神話)들에는 포세이돈(Poseidon) 같은 바다의 신(神)은 없다. 인도의 베다(Veda) 신화, 북유럽의 발트(Balt) 신화, 중부 유럽의 게르만(German) 신화, 동유럽의 슬라브(Slav) 신화, 아나톨리아의 여러 신화(神話)들에는 천둥과 폭풍우의 신(神)들만이 숭상될 뿐 바다의 신(神)은 아예 없었다. 겨우 남유럽 그리스 신화에서의 포세이돈과 페니키아 지역 신화에서의 얌(Yam), 그리고 유대인들이 유일신으로 모시는 야훼(Yahweh)가 바다를 창조한 바다의 신(神)이었다. 기원전 1400년경 가나안으로 들어온 유다는 차즙(茶汁 Juice)을 만들어 티레(Tyre)의 해상무역(海上貿易)을 통해 모든 지중해 연안(岸) 지역에 수출했다. 당연히 번영(繁榮)을 누렸다. 그러나 유다(Judah) 지파가 독점한 까닭에 차즙(茶汁 Juice) 제조 기술이 없었던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다른 10개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은 그래서 상대적으로 가난했고 그래서 유다와 반목(反目)했다. 12지파(支派)중 세(勢)가 가장 약했던 베냐민(Benjamin) 지파는 유다 지파가 만든 주스(茶汁)를 페니키아의 티레(Tyre)로 수송하는 위험한 일을 해주며 유다 편에 있었다. 아카바(Aqaba)로 들어온 근역(槿域)의 차(茶)들이 유다에서 주스(Juice 茶汁)로 만들어져 요단강을 거슬러 올라가 페니키아의 티레(Tyre)까지 운반(運搬)되어 지중해로 퍼져 나가자 해상무역이 번창하게 되었다. 그러자 기원전 1100년경부터 이러한 해상무역의 번성을 막기 위한 육상무역파의 조직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블레셋(Philistine)인들이 가나안에 나타났다. 육상무역파(陸上貿易派)들의 용병(傭兵)으로 고용(雇用)되어 해상무역기지들을 파괴하던 바다 민족 중 하나였던 블레셋 인들이 가나안 지역에 정주(定住) 세력으로 선발되어 투입된 거였다. 그만큼 가나안지역은 해상(海上) 차무역망(茶貿易網)에 린치핀(linchpin)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다. 우르(Ur)에서 살던 아브라함을 기원전 2090년경에 가나안으로 보낸 것도 가나안 지역이 지중해와 페르시아해를 연결해 주는 해상무역망(海上貿易網)의 핵심 고리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안에 의해 모헨조다로가 파괴된 후 파슈툰(Pashtun) 사람들이 그 대안(代案)으로 인더스강 하류에 새로 건설한 카라치(Karachi)에서 바다를 통해 운반되는 근역(槿域)의 차(茶)들이 아덴(Aden)만과 홍해를 거쳐 최종적으로 하역(荷役)되는 곳이 아카바항이었다. 카라치에서 떠나 홍해로 들어온 근역(槿域)의 차(茶)를 하역받기 위해 수도(首都)까지 나일강 중류지역으로 천도(遷都)한 이집트의 눈물겨운 노력이 기원전 1350년부터 시작된 아마르나(Amarna) 개혁이라 불린 일이었다. 벼락을 주관하는 그리스의 제우스(Zeus) 같은 신격(神格)을 가진 아문(Amun)이 만족한다는 뜻을 가진 아멘호테프(Amenhotep)라는 왕호(王號)를 태양신(神) 아톤(Aton)에게 이로운 자라는 뜻의 아크나톤(Akhnaton)으로 개명(改名)까지 하며 근역(槿域)의 차(茶)를 확보하려던 아멘호테프(Amenhotep) 4세의 노력은 아들 투탕카멘(Tutankhamun)의 비극으로 끝났다. 이렇듯 육상무역파(陸上貿易派)의 해상무역(海上貿易) 파괴 노력은 파상적(波狀的)이었고 블레셋인(Philistine)들의 공격은 그래서 더욱 집요(執拗)했다. 블레셋이 요구하는 것처럼 아카바항에 하역된 근역(槿域)의 차(茶)를 차즙(Jus 茶汁)으로 만들어 페니키아의 티레(Tyre)로 수출하는 일을 그만둘 것인지 아니면 블레셋의 침략을 막아내며 계속할 것인지에 대한 노선 투쟁이 사울(Saul)과 다윗(David)의 갈등 원인이었다.
블레셋 인들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멜레크(melek:히브리어로 왕이란 뜻)로 등극한 사울은 베냐민 지파였다. 블레셋 사람들과 직접 맞닿아 있던 유다(Judah) 지파와 달리 블레셋 인들과 직접 국경을 맞대지 않았던 북부 지역의 10개 지파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달랐다. 그러나 군역(軍役)의 의무는 같았다. 절충을 위해 선택된 자가 간신히 베냐민(Benjamin) 지파 출신의 사울이었다. 사울과 유다 지파의 다윗과의 대립은 그래서 필연이었다. 남쪽 유다 지역(Judea)의 다윗과 북쪽 이스라엘 지역의 이해관계를 대변한 사울이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지배권을 놓고 내전을 벌인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차즙(茶汁) 제조기술을 바탕으로 조선(造船) 산업을 발전시켜 해상무역(海上貿易)을 진흥시키려는 유다(Judah) 지파와 차즙(Juice) 제조기술 없이 농업과 목축업에 기반을 두고 메소포타미아 북부 나라들과의 육상무역(陸上貿易)에 의존했던 이스라엘은 주력 산업 기반(基盤)이 달라 경제적 이해관계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는 터였다. 결국 이스라엘 왕국의 세 번째 멜레크(Melek)였던 솔로몬(Solomon)이 기원전 931년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즉위하자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북부 10개 지파는 세금 감면과 조선(造船)과 국방의 부역(賦役) 경감을 유다 지파에 요구했다. 유다(Judah) 지파가 이를 거부하자 그들은 독립해 유다 지파에게 도움을 줄 그들의 병역(兵役)과 부역(負役), 그리고 조세(租稅) 납부를 거부했다. 그들의 나라는 차(茶)와 해상무역과는 관계없었기에 이스라엘이라고 불렸다. 북쪽에서 농업과 목축으로 살아가던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취하자 남쪽에서 차(茶)와 해상무역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주스(Jus)들은 유다(Judah)를 그들의 국호로 삼았다. 결국 북부 이스라엘 왕국은 신앗시리아의 아슈르나시팔에게 기원전 722년에 점령당해 망했다. 유다왕국은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멸망당했다. 유다를 점령 하자 이집트 파라오처럼 유다의 차즙(茶汁) 제조 기술을 탐냈던 네브카드네자르(Nebuchadnezar)였다. 이를 한사코 거부한 유다인들은 결국 바빌론까지 끌려가야 했다. 기원전 597년의 일이다. 북이스라엘은 바다를 창조한 야훼의 계명을 어기고 농업과 목축에 관계된 신들을 숭배했다. 차(茶) 산업과 괴리(乖離)된 북부 사람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남유다는 달랐다. 바빌론의 공중정원(The Hanging Garden)과 에테멘앙키(Etemenanki)는 찻물을 만들어 보관하면서 도시 전체에 찻물을 보급하려는 목적으로 건설된 당대 최고의 기술이 총동원된 건축물들이었고 이슈타르의 문(門) 또한 찻물을 만들 차(茶)를 더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해주는 희귀한 청금석(靑金石)이 대량으로 확보되어 있음을 과시하려 세워진 건축물이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예루살렘 침공은 명백히 차즙(茶汁) 제조 기술의 확보에 있었다. 더부살이했던 나라의 주인인 이집트 파라오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민족의 기술이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따위에게 알려줄 비밀이 아니었다. 그래서 끌려간 바빌론 유수(幽囚)였다. 기원전 597년과 587년에 연이어 일어난 일이었다. 두 차례로 나뉘어 유수(幽囚)가 일어난 건 첫 번째 유수를 협박용으로 사용해 차즙(茶汁) 제조 기술을 넘겨받으려는 바빌론의 간계 때문이었다. 겁먹고 기술을 넘겨줄 줄 알았던 유대인들이 저항하자 솔로몬의 성전(聖殿)이 파괴되는 본격적인 두 번째의 유수가 일어났다. 이 60여 년에 걸친 유수(Captivity)에서 풀려난 사람들 중 일부가 차(茶)를 찾아 동쪽으로 떠나 도착한 곳이 삼국사기에서는 다파나국(多婆那國)으로 수이전(殊異傳)을 참고한 삼국유사에서는 용성국(龍城國)으로 기록된 나라였다.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 키루스(Cyrus) 2세가 기원전 539년 바빌론(Babylon)을 함락시킨 후 그곳에 잡혀 와 있던 유대인(Jew)들을 그다음 해에 모두 풀어준 것은 그들이 바다를 만든 신(神), 야훼(Yahweh)를 숭배하는 희귀(稀貴)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근역(槿域)에서 수출되는 차(茶)를 인더스강과 페르시아해 그리고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해양무역망(海洋貿易網)으로 거래하려는 원대한 꿈을 가진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게는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해 주는 아카바(Aqaba)항과 가나안(Canaan) 지역을 맡아줄 해양민족(海洋民族)이 꼭 필요했다.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칼데아(Chaldea)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차즙(茶汁) 제조 기술을 가로채고 이집트의 부활을 막고자 기원전 597년과 587년 두 차례에 걸쳐 가나안에서 잡아와 바빌론에 억류(抑留)했던 수만 명의 유대(Judah)인들을 키루스 2세가 다시 가나안으로 귀환(歸還)시킨 연유였다. 아카바(Aqaba)항과 수에즈(Suez)를 거쳐 이집트 기자(Giza)와 연결되는 육상 무역로를 관리하고 아카바항에 하역된 차(茶)들을 가나안과 페니키아로 운반(運搬)해 지중해로 퍼져 나갈 수 있게 해 주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근역(槿域)에서 수출한 차(茶)를 대륙의 서쪽 끝까지 보낼 수 있는 해상무역망(海上貿易網)이 구축될 수 있었다. 이때 이런 키루스 대제(大帝)의 원대한 계획에 따라 근역(槿域)의 차(茶)를 처음부터 확실하게 확보해 파슈툰이 장악한 카라치(Karachi)로 보내는 임무를 수행할 요원들로 선발되어 지금의 중국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으로 파견된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지금의 중국 절강성과 복건성으로 보내진 것은 그곳이 찻잎을 수출하는 제잠(鯷岑)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고 차(茶)를 수출하는 근역(槿域)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곳(浙江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용모(容貌)는 당시 대부분의 동아시아인들과 확연히 달랐고 특히 그들의 덥수룩한 구레나룻과 짙은 눈썹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록 차별적이었다. 중국인들은 그 용모(容貌)를 나(那)라는 글자로 상형 해냈다. 절강성과 복건성에 파견된 유대인들은 확보한 차(茶)와 찻잎(茶葉)을 주스(jus)해서 차즙(茶汁)으로 만들어 암포라(amphora)에 담아 장강(長江)에 올렸다. 지금의 절강성 온주항(温州港) 바로 남쪽에 위치한 용항(龍港)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들이 암포라를 만들기 위해 도기용(陶器用) 흙과 풍부한 땔감, 그리고 각종 광석(鑛石)이 풍부한 지금의 절강성과 복건성 접경 지역인 돌배(突背) 지역에 들어가 자기들의 영역(領域)을 넓혔다. 지금의 용천요(龍泉窯)가 있는 지역이었다. 청자(靑瓷)로 유명한 용천요가 개발된 연유였다. 키루스 2세가 바빌론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켰던 기원전 538년에 지금의 항주(杭州) 지역에 있던 월(越) 나라에 새로운 군왕(君王)이 즉위했다. 기록상으로는 월나라의 제34대 군주(君主)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실상 월나라의 초대 군왕(君王)이 되는 윤상(允常)이었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오자서(伍子胥)와 와신(臥薪)으로 유명한 오(吳) 나라의 부차(夫差)와 오월동주(吳越同舟)란 고사성어를 남기며 회계지치(會稽之恥)를 범려(范蠡)와 함께 극복하고 끝내 승리를 거머쥐는 구천(句踐)이 바로 윤상의 아들이었다. 범려(范蠡)가 승리한 구천(句踐)의 곁을 떠나며 남긴 장경조훼(長頸烏喙:목이 길고 입이 까마귀 부리 같은 모습)는 그의 용모(容貌)가 평범한 동아시아 남자의 그것이 아니었다는 생생한 증거였다. 또한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를 이용해 카라치(Karachi)로 차즙(茶汁)을 보냈던 다파나국(多婆那國: 용성국龍城國)이었기에 그들이 생명줄로 여겼던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를 자신들의 영토로 삼고 있던 초(楚) 나라와 엮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용성국(龍城國) 사람들은 초(楚) 평왕(平王) 시절 일어났던 오자서(伍子胥) 일가(一家)의 비극과 깊은 인과관계(因果關係)를 갖고 있었다.
기원전 970년 페니키아 티레(Tyre)의 왕 히람이 이스라엘 왕국의 솔로몬에게 그토록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은 다윗왕 시절부터 이뤄져 온 아카바(Aqaba)항으로 들어온 근역(槿域)의 차(茶)를 티레(Tyre)까지 안전하게 운반해 주는 것에 대한 대가였다. 당시 아카바항에 하역된 차(茶)의 무역 경로는 아카바항에서 사해(死海) 남단까지 운송해 유다(Judah)에 전달하는 것이 첫 번째였고 사해(死海) 지역에서 갈릴리(Galilee) 호수 지역까지 수송하는 것이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이 갈릴리 호수에서 티레까지 운송하는 경로였다. 첫 번째 경로를 담당한 것은 쌍둥이 동생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 축복권을 팔았던 에서(Esau)의 후손들이 페트라(Petra)를 중심으로 다스리는 에돔(Edom) 왕국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경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의 두 딸과 낳은 후손들이 세운 모압(Moab)과 암몬(Ammon)이 사해(死海) 동쪽 지역의 차교역로(茶交易路)를 메소포타미아 세력들로부터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해(死海) 동쪽 연안 중남부 지역에 남북으로 위치했던 고모라(Gomorrah)와 소돔(Sodom)은 이러한 아카바와 티레를 연결하는 차(茶) 무역로의 중간 경유지로서 그 때문에 실크 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처럼 에돔(Edom)의 페트라(Petra)와 함께 경제적 번영을 누렸었다. 그러나 사해 동쪽 지역의 무역로(貿易路)를 책임졌던 소돔과 고모라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모든 카라반들을 사해 서쪽 지역의 유다 지역으로 쏠리게 했고 이는 유다 지파의 경제적 패권(霸權)을 공고히 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해주었다. 차(茶) 무역로가 유다(Judah) 지역 중심으로 재편되자 사해(死海)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헤브론(Hebron)과 사해(死海)의 최북단 지역에 자리한 예루살렘이 고모라와 소돔처럼 무역로의 중심축으로 떠올랐다. 카라반들의 차(茶) 수송이 몰리면서 사해 (死海) 서부 연안의 중간 지점인 헤브론(Hebron) 지역은 카라반들의 경유지(經由地)로 반드시 기착(寄着) 해야 하는 지역이 되어 번영했고 사해(死海) 최북단 지역에 있는 예루살렘 또한 갈릴리 호수로 떠나는 채비를 하는 카라반들의 기착지(寄着地)가 되어 역시 번영했다. 사해 북쪽부터 갈릴리 호수를 거쳐 티레까지 요단강을 따라 차(茶)를 수송하는 임무는 베냐민(Benjamin) 지파가 담당했다. 베냐민 지파가 다른 10개 지파가 경원시(敬遠視)하는 유다 지파와 한사코 연합했던 연유였다. 이렇게 운영되던 가나안의 차무역로(茶貿易路)가 솔로몬 왕 때 크게 변화했다. 그건 솔로몬(Solomon)이 티레(Tyre)의 지원을 받아 함대(艦隊)를 건조해 육상운송(陸上運送)이 아닌 해상 운반(運搬)으로 차(茶)를 운반했기 때문이었다. 수입한 차를 전량 끓이고(boil) 고와(simmer) 압착(squeeze)해 차즙(juice)을 만들어 암포라(amphora)에 담아 운반(運搬)하는 것을 차무역(茶貿易) 정형(定型)으로 확정해 시행했다. 이를 위해 아카바에서 사해까지 운하(運河)를 파 항행(航行)이 가능한 수로(水路)를 확보한 솔로몬이었다. 그 때문에 페트라는 폐허가 되었고 에돔(Edom)은 망했다. 아카바항에서 출발한 솔로몬 함대가 운하를 타고 예루살렘까지 곧장 항행했기에 헤브론의 번영도 쪼그라들었고 예루살렘에서 출발해 요단강을 거슬러 갈릴리 호수의 항구들에서 기착한 솔로몬 함대 때문에 갈릴리 호수의 항구들은 번성했다. 가버나움과 막달라, 디베랴와 벳세다는 대표적인 갈릴리 호수의 번창했던 항구였다. 티레까지 차를 운송할 때도 갈릴리 호수 북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요단강을 거슬러 운항해 실어 날랐다. 결국 이스라엘 왕국의 차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은 오직 유다 지파만이 독점했다. 이익의 독점은 왕국의 분열을 예정했고 멸망을 약속했다. 솔로몬의 함대가 티레 왕의 지원으로 홍해 연안에서 건설되었다는 기록이 남게 된 연유였다. 바빌론 유수가 풀렸을 때 많은 유다인들은 키루스 대제의 안내에 따라 차나무가 자라는 동쪽 나라로 떠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일천 리 밖에 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조(條) 중에서
我本龍城國人(亦云正明國, 或云玩夏國, 玩夏或作花厦國, 龍城在倭東北一千里) 나는 본래 용성국 사람이다… 용성은 왜국의 동북쪽으로 일천 리 밖에 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탈해왕(脫解王) 중에서
다파나국(多婆那國)은 타파나국(沱婆那國)의 오기이고 타(沱) 자는 약탕기(宀)에서 끓여 고와져 달여진 차(茶)가 숟가락(匕)으로 다시 꼬아 짜져(壓搾) 즙(汁)이 되는 과정을 상형한 글자였다. 다(多)자는 중국어로 두오[duo]로 발음되고 타(沱) 자는 투오[tuo]로 발음된다. 탈해(脫解)의 탈(脫) 자도 중국어로 투오[tuo]라 발음된다. 탈해(脫解)가 투[tu]로 발음되는 토(吐) 자를 써서 토해라고도 한다(一云吐解)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중요한 건 투오 또는 투라는 발음이고 그 핵심은 즙(Jus)을 만드는 과정을 상형한 타(沱 tuo) 자다. 그리고 함께 기록된 천리(千里)라는 거리의 기준이 되는 왜국(倭國)은 기원후 157년에 발생한 연오랑과 세오녀 사건으로 지각이동하기 전, 제잠(鯷岑)으로 불리던 땅을 가리킨다. 땅의 북쪽 끝은 영일만(迎日灣)에 붙어 있고 남쪽 끝은 대만(臺灣) 섬과 붙어 전체적인 땅 모양이 태평양을 향해 볼록하게 휘어져 있어 왜(倭:구불구불하게 삥 돌다)라고 불린 땅이었다. 특히 대만섬과 붙은 남쪽 끝 땅모양은 동물의 갈라진 발굽 모양을 하고 있어 제잠(蹄涔)이라고도 불렸던 땅이었다. 지금의 대북시(台北市)를 기준으로 하여 일천 리에 해당하는 250km 거리에 존재하는 지금의 중국 땅은 절강성(浙江省) 최동남단에 자리한 사정항(沙埕港)이다. 다파나국의 다른 이름인 용성국(龍城國)의 성(城) 자는 중국어로 창[cheng]이라 발음되는데 사정항(沙埕港)의 정(埕) 자도 창[cheng]이라고 발음된다. 사정항(沙埕港)의 사(沙) 자가 페르시아(Persia)의 음역어(音譯語)인 파사(波斯)의 파(波) 자와 같은 글자인 것은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중국어로 사정강(ShaCheng Gang)이라 발음되는 사정항(沙埕港)은 특이하게 강(江)을 지앙(jiang)이라 발음하는 중국어 발음 규칙과 다르게 강(江)을 강(gang)이라 발음하는 한국어 발음을 그대로 따르는 사정강(沙埕江 ShaCheng Gang)이 동지나해로 빠져나가는 땅에 건설된 항구다. 사정항(沙埕港) 바로 북쪽에는 용성국(龍城國)의 용자를 쓰는 용항(龍港)이 있다. 다파나국의 다(多)는 차즙(茶汁) 제조 기술을 개발한 유다인들을 말하는 거였다. 다파나국의 파(婆)는 페르시아 음역어인 파사(波斯)의 파(婆) 자였고. 따라서 다파나국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가 파견한 바빌론 유수에서 풀려난 유다인들과 파슈툰인들이 함께 근역(槿域)의 땅 가까이로 건너와 안정적인 차(茶)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개척한 나라였다. 탈해(脫解)는 바로 이러한 나라에서 태어나 근역(槿域)으로 건너온 털북숭이(那) 사람이었다. 그 목적은 물론 더욱 확고히 안정된 차(茶) 물량의 확보였고. 용연검(龍淵劍)이라 불린 용천검(龍泉劍)은 파슈툰인들이 강력한 풀무와 숯을 개발해 선철(銑鐵)에 함유된 탄소를 줄여 강철(鋼鐵)을 만들어 내는 기술을 보여주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파슈툰인들이 월나라의 역사에 폭넓게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탈해는 유다인과 파슈툰인의 후예였다. 그런 그가 구지가(龜旨歌)의 김수로왕이 장악한 가야(伽耶)에 나타난 연유를 다음 편에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