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군단병(legionarii)이었던 로마 시민들은 그들의 영토를 잃고 나선 더 이상 군대의 일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또한 자녀를 키우는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탈리아 전체에서 점점 일손이 부족해지기 시작했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부유층이 제공하는 노예들이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로써 자유민 들은 실업자가 되었고, 이들의 자리를 노예가 대체한 것이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중에서
그래서 카이사르는 대대장(大隊長)이나 백인대장(百人隊長)들한테 돈을 빌려 병사들에게 보너스로 주었다. 이것은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가져왔다. 지휘관(指揮官)들은 돈을 못 받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싸웠고, 총사령관의 선심(善心)에 감격한 병사들은 전심전력을 기울여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 카이사르의 내전기 중에서
11. 여기까지 왔으므로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의 풍습에 대해 그리고 이들 종족의 서로 다른 점에 대해 서술해 본다. 갈리아에서는 모든 부족, 모든 바쿠스와 그 지역에 그치지 않고 가족에게까지 당파가 있었다. 가장 세력이 강하다고 인정된 사람이 중심인물이 되었고 모든 일의 계획과 집행은 그들의 중재와 판단으로 결정되었다… 실력자는 자기 부하의 그 누구도 압박받거나 사기를 당하게 해서는 안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하에 대한 세력을 잃고 말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이 전 갈리아에 퍼져 있었고 그 어떤 부족도 두 당파로 나뉘어 있었다. 13. 갈리아에서 존경받는 계급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승려와 기사였다. 승려는 신성한 일을 하였고… 공사의 모든 논쟁을 판정하고 범죄가 저질러지거나… 상속이나 경계(境界) 문제로 분쟁이 일어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승려들이 판결을 내리고 배상금이나 벌금을 결정했다. 개인이든 부족이든 간에 그 판결에 따르지 않으면 희생 의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 벌이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 해마다 정해진 시기에 갈리아의 중심지로 생각되고 있는 카르누테스족 영지의 신성한 장소에서 회합하였다…이 관습은 브리타니아에서 생겨나 갈리아에 전해진 듯하다. 이 사항을 더욱 자세히 알고 싶은 자는 연구를 위해 브리타니아로 갔다. 16. 갈리아의 부족은 모두 종교에 깊이 젖어 있었고… 제물로 산 사람을 바치거나 바치기로 맹세하고 그 승려가 이것을 집행했다. 생사가 걸린 일에는 사람의 생명을 바쳐야만 불멸의 신(神)들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부족의 이익을 위해 희생물을 공공연히 정해 놓았다. 19… 문화 수준에 비하면 갈리인의 장례식(葬禮式)은 훌륭하고 사치스러웠다. 죽은 자가 생전에 사랑했다고 생각되는 것은 동물까지도 모두 불에 집어넣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례식이 끝나면 소유했던 노예나 피호민(被護民)마저 함께 불태웠다. -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6권 갈리아의 사정 중에서
전적으로 차(茶)를 동쪽으로부터 수입해 와야만 하는 로마로서는 그래서 동방경략(東方經略)이 언제나 나라의 최우선 정책이었다. 로마가 레반트(Levant)와 아나톨리아(Anatolia) 그리고 이집트에서 건너오는 차(茶)들을 더 차지하기 위해 카르타고(Carthago)와 싸울 때만 해도 지중해 패권(霸權)만 가진다면 차부족(茶不足) 문제는 모두 해결될 거라고 낙관하던 시절이 있었다. 포에니(Phoenic) 전쟁이라 불린 카르타고와의 120여 년(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에 걸친 세 번의 전쟁(戰爭) 때였다. 결국 카르타고 전체를 불태우고 소금까지 뿌려 지상에서 아예 없애버리고 지중해(the Mediterranean) 패권을 차지한 로마는 곧 심각한 내분(內紛)에 휘말리게 되었다. 지중해의 차무역권(茶貿易權)을 차지하고 동쪽에서 운반(運搬)되어 온 차(茶) 분배를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패권(霸權)을 거머쥐었지만 로마가 갖게 된 차(茶)의 양(量)은 그러나 여전히 형편없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쏟아부은 비용을 계산하면 더욱 초라한 양(量)이었다. 당시의 차(茶) 부족은 카르타고인들이 불공정 무역(貿易)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차무역(茶貿易)에 있어 가장 중요한 나라인 중국에서 전쟁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일으킨 통일(統一) 전쟁(기원전 230- 기원전 221년)과 초한(楚漢) 전쟁(기원전 206- 기원전 202년), 흉노가 일으킨 동호(東胡)와 대월지(大月氏) 전쟁(기원전 200년- 기원전 169년)이 그것들이었다. 근역(槿域)과 제잠(鯷岑)의 차(茶)를 로마까지 실어 나르는 동서 무역로의 양대(兩大) 축(軸)이 차무역로(茶貿易路)의 지배권을 확충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통에 서쪽으로 운송되는 차(茶)의 양은 형편없이 축소되어 있었다. 중국에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불리는 시대가 오기 전까지 로마인들이 원하는 만큼의 차(茶)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발칸(Balkan) 반도와 그리스(希臘)와 아나톨리아(Anatolia)로 군대를 진군(進軍)시켜야만 했다. 그리스(Greece)를 차지하고 있던 마케도니아(Macedonia)를 점령해 속주(屬州;provincia)로 만든 건 기원전 146년이었다.
로마가 유럽 여러 민족 중에서 유일하게 카르타고가 지배하는 지중해 무역에 경쟁자로 뛰어든 것은 그들이 다른 유럽 사람들과는 다른 민족적 기원(起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유럽 지역이 기마(騎馬) 민족인 켈트(Celt)족의 후예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데 반해 로마는 켈트족과는 다른 승주(乘舟) 민족, 즉 해양 민족의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2004년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룩했던 수메르인(Sumerian)들이 우르(Ur) 제3왕조를 끝으로 사라지면서 역사는 새로운 사람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파슈툰(Pashtun)이었고 또 다른 이들은 루위안(Luwian)이었다. 수메르인들이 기원전 2600년경 기후 한랭화(寒冷化)에 대비해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끌어들여 해상무역망(海上貿易網)을 구축할 때 근역(槿域)에서 운송되는 차(茶)를 내륙이 아니라 바다로 유도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媒介)가 인더스강이었는데 그 인더스(Indus) 강 유역에 건설한 계획도시들에 식민(植民)한 사람들이 페르시아인들이었다. 그 당시 페르시아(persia) 지역 이름은 파르스(Fars)였기에 그들은 파르시(Parsii)라고 불렸다. 페르시아에서 건너와 모헨조다로(Mohenzo-daro)를 건설한 파르시(Parsii)들은 기원전 2004년을 끝으로 사막화(沙漠化)와 육상무역세력(陸上貿易勢力)들의 핍박(逼迫)으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을 영구히 떠나 온 수메르인들과 함께 살며 혼혈(混血)되었는데 이들이 파슈툰(pashtun)이었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을 떠나 페르시아해(海)를 통해 배를 타고 인더스강(江)으로 들어간 수메르인들이 있는가 하면 유프라테스강(江)을 거슬러 올라가 아나톨리아 동부로 진출한 수메르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인더스강(江) 유역으로 떠난 사람들과는 달리 말(馬)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말(馬)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답게 아르메니아(Armenia)를 통해 들어오는 근역(槿域)의 차(茶)를 유럽 지역에 운송하는 데 있어 전차(Chariot)를 개발해 사용함으로써 아나톨리아(Anatolia)의 무역로(貿易路) 주도권을 장악(掌握)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루위안(Luwian)이라고 불렀는데 후일 흉노(匈奴)의 침략을 받아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로 쪼개지는 동호(東胡)의 원류(源流)가 바로 이들이었다. 선비족(鮮卑族)들이 후일 자신들이 세운 나라를 위(魏)라고 한 연유였다. 루[lu]는 월(月)의, 위[wi]는 위(魏)의 발음이었다. 수메르인(Sumerian)들인 루위안(Luwian)들이 수레바퀴(wheel)를 이용해 개발한 전차(Chariot)는 전투를 위해 개발된 것이 아니라 차(茶 cha)를 싣고 질주(疾走 riot) 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말들이 끄는 수레(車)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차(茶)를 신속하게 운송해 주는 루위안(Luwian)들을 꺼려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발적으로 서로 협조하는 사람들끼리 일어나는 전쟁(戰爭)은 없었다. 주거(走車)를 전차(戰車)로 바꾼 건 기원전 1700년경 인더스 문명을 폐허로 만든 아리안(Arian)들의 일족인 히타이트(Hittite)인들이었다. 로마인들은 승주(乘舟) 민족이면서 말(馬)을 다룰 줄 알았던 루위안(Luwian)들이 건설한 트로이(Troy) 사람들의 후예였다. 아에네아스(Aeneas)는 이런 로마의 시원(始原)을 기록한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노래(poems)였다.
그럼에도 차(茶)의 양(量)은 부족했다. 마케도니아를 넘어 아나톨리아로 들어가야 했다. 깊어지는 전선(戰線)은 길어진 보급선(補給線)을 의미했고 그만큼 비용(費用)은 급증했다. 킬리키스(Cilicis)를 지나 카파도키아(Cappadocia)를 점령하고 그토록 염원하던 아르메니아(Armenia)까지 들어갔으나 끝내 로마가 원했던 차(茶)는 없었다. 있었으나 미미했다. 더 이상은 갈 수가 없었다. 파르티아(Parthia)라는 강력한 제국(帝國)이 로마군단(軍團)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그 적(敵)을 물리치는데 필요한 막대한 물자를 공급할 수가 없었다. 파르티아 또한 차(茶) 부족(不足)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대륙 서쪽의 모든 나라들이 차(茶) 부족으로 인한 갈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중국 때문이었다. 중국이 기원전 2380년대 중국 영역(領域)을 지나가는 차무역로(茶貿易路)를 확보하기 위해 황하(黃河)에 제방(堤防)을 쌓는 기괴한 짓을 한 것처럼 이번엔 모든 차무역로(茶貿易路)의 지배권(支配權)을 가지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한(漢) 나라는 북도(北道)라고 불렸던 천산남로(天山南路), 천산북로(天山北路)의 차무역로(茶貿易路) 지배권을 가진 흉노와 기원전 133년부터 전쟁을 시작했다. 그 전쟁의 폐해(弊害)는 해일(海溢 Tsunami)이 되어 로마를 덮쳤다. 무역로(貿易路)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무역량(貿易量) 자체가 줄어들며 야기(惹起)된 차(茶) 부족(不足) 사태는 그대로 사회 불안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차(茶) 부족을 사회정의의 문제로 생각하고 차(茶) 분배의 공정을 주장했다. 기원전 91년,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동맹으로 카르타고와 싸워 이긴 동맹시들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주지 않아 벌어졌다는 동맹시전쟁(同盟市戰爭)은 사실 불공정한 차(茶) 분배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전쟁이었다. 기원전 88년 동맹시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인들은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하라고 원로원(元老院)을 압박했다. 그리스(希臘)와 폰투스(Pontus), 카파도키아(Cappadocia), 킬리키스(Cilicis)가 있는 아나톨리아 그리고 아르메니아(Armenia)에 많은 재산(財產)을 투자해 놓은 원로원(Senate) 의원(議員)들은 차(茶) 부족 사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茶)를 무역(貿易) 하지 않고 매점매석(買占賣惜)하는 동방(東方)에 로마군(軍)을 파병(派兵) 해야 한다고 선동(煽動)했다. 옵티마테스(Optimates)라고 불렸던 정파(政派)의 대표가 술라(Sulla)였다. 기원전 88년 집정관(執政官 Consul) 술라가 이끄는 아테네(Athens)와 폰투스(Pontus) 정벌군이 파병(派兵)된 연유였다.
기원전 87년에 벌어진 마리우스(Marius) 파와 술라(Sulla) 파간의 내전(內戰)은 세계 차무역(茶貿易)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중국과 흉노의 오랜 전쟁이 가져온 필연적인 주변부의 혼란이었다. 부족한 차(茶)를 확보하기 위해 별 소득이 없다고 결론이 난 동방으로의 원정(遠征)을 술라가 계속해야 한다고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일어난 충돌이었다. 동방(東方)으로의 원정(遠征)은 차(茶)를 전리품(戰利品)으로 챙길 수 없는 원정(遠征)이기에 차라리 북쪽으로 나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진출하는 것이 차(茶)를 확보할 수 있는 원정(campaign)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마리우스파였다. 어쩔 수 없어 동방원정(東方遠征)을 일으켜야 한다면 원로원 귀족(Patricii)과 기사(騎士)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의 평민(Plebis)들에게 전리품(戰利品)이 돌아갈 수 있는 원정(遠征 campaign)이 되어야 한다는 게 마리우스파의 주장이었다. 마리우스파는 투자한 것도, 투자할 것도 없는 무자산(無資產) 로마인들이어서 더 정확한 계산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레반트(Levant)에 이미 오랫동안 많은 투자를 해놓은 옵티마테스(Optimates)라 불리던 원로원 의원들과 사업을 하는 부유한 기사계급(Equites 에퀴테스) 로마인들은 만약 로마가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재산과 사업은 보호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떤 명분(名分)을 만들어서라도 로마군(軍)이 계속 그곳에 파병(派兵)되어야 로마인의 경제적 이익들이 로마군의 군사적 보호아래 있다는 것을 아시아인들에게 계속 각인시켜 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익을 대표한 집정관(執政官 Consul) 술라(Sulla)는 동방으로의 군사력(軍事力) 투입을 계속 고집했고 결국 충돌(衝突)은 서로에 대한 살육으로 이어졌다.
71세가 된 마리우스의 죽음으로 결국 12만 명의 민중파(民衆派) 군대가 술라의 7만 5천 명 폰투스 원정군(遠征軍)에게 패배함으로써 이 충돌은 옵티마테스의 승리로 끝났다. 마리우스파(派)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된 로마 최고 부자들인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지원을 받는 술라(Sulla)는 작성된 살생부 명부(名簿)에 따라 4700명의 마리우스파(派) 로마인들을 죽였다. 그 살생부에는 마리우스파의 지도자였던 킨나(Cinna)의 사위, 율리우스 카이사르(Caesar)도 있었지만 많은 명망가(名望家)들의 탄원(歎願)으로 카이사르는 살생부(殺生簿)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 그건 기원전 69년에 있었던 부여(扶餘)의 서라벌 경략(經略) 때문이었다. 기원전 69년 부여(扶餘)가 박혁거세를 근역(槿域)으로 파병해 서라벌을 점령하게 하고 왜(倭)의 찻잎을 독점해 그 찻잎들로 만든 긴압차(緊壓茶)를 흉노를 통해 대거 파르티아(Parthia)에 공급함으로써 폰투스(Pontus)와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정세는 급격히 변화했다. 기원전 69년 킬리키아(Cilicia) 속주 총독 루쿨루스(Lucullus)는 아르메니아(Armenia) 남부로 쳐들어가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엄청난 양의 차(茶)를 약탈(掠奪)했고 이 소식은 로마에도 전해졌다. 파르티아로 갑자기 많은 차(茶)가 들어오고 있다는 첩보는 곧 이 차(茶)를 확보해야 한다는 옵티마테스들의 공감대를 만들었고 이는 그동안 민중파(民衆派)를 못 죽여 안달했던 그들에게 완전히 정반대의 입장(立場)을 취하게 했다. 파르티아 원정(遠征)에 나갈 군인(軍人)을 모집(募集)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동방(東方)에 많은 재산을 투자해 놓고 있는 폼페이우스가 직접 나서기로 하고 루쿨루스는 기원전 66년 교체되었다. 루쿨루스는 저항했으나 약탈한 차(茶)를 소유하는 대가로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그 차(茶)들로 단번에 로마 최고의 졸부(猝富)가 되었고 그 끝을 보였다. 약탈한 차(茶)에서 나온 그의 부(富)로 부리는 사치(奢侈)가 얼마나 강렬했는가는 그의 이름을 딴 영어의 lucullan 이란 단어가 사치(奢侈)스러운 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로 지금까지 쓰이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기원전 69년부터 시작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서라벌 경영이 로마의 정치 지형도(地形圖)를 일거에 바꿔놓고 있었다. 기원전 66년 루쿨루스를 내쫓은 폼페이우스가 킬리키아에 도착하자 본격적인 폰투스 (Pontus) 전쟁이 시작되었다.
마리우스와 함께 민중파(民衆派)의 지도자였던 킨나(Cinna)의 사위인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마리우스파라면 일단 죽이고 시작하는 술라파의 최대 주주들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같은 로마 최고 부호(富豪)들과 연합하는 기원전 60년의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소위 삼두정치(三頭政治)를 이뤄낸 것은 부여(夫餘)에서 수출해 파르티아(Parthia)에 풀린 서라벌 차(茶)가 만들어낸 나비효과였다. 동방(東方)에 이미 포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투자를 해놓은 전통의 로마 부자들이 자신들도 생전 처음 보는 막대한 양의 차(茶)들이 유통되는 파르티아로 가기 위해서는 많은 군대(軍隊)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상앙(商鞅)의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이 시행된 기원전 360년 이후 이렇게 많은 차(茶)들이 파르티아에 풀린 역사는 없었다. 중국이 자신들이 통제하는 남도(南道)라 불린 차무역로(茶貿易路) 외에 흉노가 관리하던 북도(北道)라 불린 차무역로(茶貿易路)의 통제권까지 갖겠다고 나선 기원전 133년 이후로는 더더욱 처음 있는 일이었다. 레반트(Levant)와 아나톨리아에 많은 투자를 해 놓고 있던 대다수 원로원 의원들은 이런 기회에 로마군을 파병해 자신들의 재산을 불릴 계산으로 조바심 내고 있었다. 당시 로마 최대의 부호(富豪)였던 크라수스(Crassus)가 이를 모를 리 없었고 크라수스와 원로원(元老院)은 대규모 로마군단(軍團 Legion)을 파병할 묘책을 짜내고 있었다. 기원전 66년에 루쿨루스를 내쫓고 킬리키스 로마 속주군(屬州軍)을 지휘해 폰투스와 아르메니아 공략에 성공해 자신의 성가를 높인 폼페이우스 또한 퇴역 병사들에게 지급을 약속한 토지를 마련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기원전 69년의 박혁거세의 서라벌 경략(經略)이 일으킨 로마 원로원과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Pompeius)의 각기 다른 속셈이 민중파(民衆派)의 일원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카이사르(Caesar)가 로마의 프린켑스(Princeps; 일인자)가 될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기원전 60년, 카이사르는 그들의 도움으로 집정관(執政官 Consul)이 되어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에게 지급(支給) 하기 위한 토지(土地)와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군(遠征軍) 모병(募兵)을 도와주고 갈리아 정벌에 나섰다. 알프스가 가로막은 로마의 북쪽을 피해 갈리아로 돌아 나가 도나우(Donau) 강을 도하(渡河)하여 동쪽에 있다는 차(茶) 생산국으로 가는, 마리우스 이래로 민중파들이 꿈꿔왔던 차무역로(茶貿易路)를 개척(開拓) 하기 위해서였다. 로마가 이미 장악하고 있던 발칸반도에 흐르는 도나우(Danube) 강(江)은 로마군이 도하(渡河)할 수 있는 강(江)이 아니었다. 수심(水深)도 깊은 발칸반도의 다뉴브(Danube) 강폭(江幅)은 1000m가 넘었고 강변엔 사르마티아인들(Sarmatians)의 후예(後裔)인 기마민족들의 목책(木柵)들이 줄지어 설치되어 있었다. 갈리아(Gaul)를 10년 전쟁으로 겨우 평정한 카이사르(Caesar)는 알프스를 서쪽으로 돌아 동방으로 가는 차무역로(茶貿易路)를 개척하겠다는 오래된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로마가 도나우강 북안(北岸)의 기마민족(騎馬民族)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카이사르는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차렸다. 카이사르가 갈리아(Gallia)에서 악전고투(惡戰苦鬪)하는 동안 파르티아에 들어온 부여의 차(茶)를 노리고 유프라테스(Euphrates) 강을 도하(渡河)해 지금의 시리아 하란(Harran) 지역의 카르헤(Carrhae)까지 밀고 들어간 크라수스(Crassus)는 아들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기원전 53년의 일이었다. 서라벌 박혁거세의 차(茶)를 무역해 얻은 이윤(利潤)으로 질지선우(郅支單于)가 흉노를 통일하고 그 여세로 흉노가 지배하는 무역로(貿易路)로 부여의 차(茶)가 속속 파르티아로 들어오고 있었다. 차(茶)가 없어 활기를 잃었던 옛날의 파르티아가 아니었다. 그걸 모르고 무력(無力)하기만 했던 예전의 파르티아만 떠올리며 파르티아군을 무시하고 진격하던 로마군단은 궤멸(潰滅)되었다. 로마 최고의 부호(富豪)였던 크라수스(Crassus)의 시신(屍身)이 파르티아의 왕(王) 오로데스(Orodes) 2세에게 능멸(凌蔑)당할 때 전한(前漢) 선제(宣帝)는 차(茶) 나무 인공재배(人工栽培)에 성공했음을 알리는 연호(年號), 신작(神爵)을 반포했다. 기원전 53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