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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 거서간과 사로국의 뜻

by 역맥파인더

始祖姓朴氏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國號徐那伐. 시조의 성은 박 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 [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이다. 이때 나이는 열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加里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 [혹은 간진촌이라고 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辰言王 [或云呼貴人之稱] 진한 사람들은 호(匏)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 [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 조병순(趙炳舜)의 증수보주삼국사기(增修 補註 三國史記) 중에서

한(漢) 나라에서 기원전 53년 차(茶) 나무를 재배(栽培)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은 곧 전 세계로 퍼져나가 사람들을 큰 충격(衝擊)에 빠지게 했다. 특히나 차무역(茶貿易)에 관련된 동서의 패권국가들은 중국이라는 차무역(茶貿易)의 유통 강자가 차(茶) 생산국이 되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특히나 누구나가 인정하는 차무역(茶貿易)의 종주국 쿠샨(KuShan; 辜山=背達) 제국이 받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이 사건이 한(漢) 고조 유방과 흉노(匈奴) 묵특(冒頓) 선우가 야합해 끝내 대월지(大月氏)의 수천 년 도읍지였던 한양(漢陽; 지금의 천수)을 점령당하고 황제의 목이 잘려 그 해골이 흉노 선우(單于)의 술잔으로 대대로 전승(傳承)되는 치욕이 벌어졌던 기원전 169년의 재앙을 능가하는 대사변(大事變)이었다. 대륙의 동쪽 끝 근역(槿域)과 제잠(鯷岑)에서만 생산되던 찻잎이 이제 중국에서도 생산된다는 걸 의미하는 차(茶) 나무 재배(栽培) 성공은 지금까지 찻잎의 수송로(輸送路)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했던 중국이 생산과 유통 모두를 갖춘 차산업(茶產業)의 절대 강자가 된다는 걸 의미했다. 절대 강자란 공급량(供給量) 통제를 통해 가격(價格) 결정권을 행사하는 존재를 의미했는데 그 지위를 중국이 차지했다는 뜻이었다. 당시 중국 남부에서 제잠(鯷岑)으로 불렸던 한반도와 일본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찻잎과 차(茶)가 해상으로 운반(運搬)되는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중국을 경유(經由)해 대륙의 서쪽으로 교역되는 현실에서 중국은 한 해 생산된 찻잎과 차(茶)의 대부분을 비록 경유(經由)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국 영토 내에서 수송(輸送)하는 그 기간만큼은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위험성을 가진 중국이 주된 대륙의 동서 교역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차(茶) 생산국에서 수송(輸送)을 위탁(委託)한 차(茶)를 중국이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미 전 세계 차무역(茶貿易) 공급망에 깊숙이 편입되어 많은 사람들이 차무역(茶貿易)에 생계를 매어놓고 있는 상황에서 다음 해 교역할 차(茶)를 차(茶) 생산국에서 온전히 위탁(委託) 받을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를 계약 위반에 중국이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것은 중국이 오직 찻잎과 차(茶)를 타국에서의 수입으로만 확보할 수 있는 순수입국(純輸入國)이었기에 가능한 신뢰였다. 이제 찻잎과 차(茶)를 자체적으로 생산해 내는 중국에게 그런 신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전 세계 차수입국(茶輸入國)들에게는 엄청난 위험이 되어버렸다. 매년 자신들의 필수 소비를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차(茶) 물량을 자체적으로 생산해 내는 중국이 자기 나라를 경유해 로마와 파르티아(Parthia)를 최종 목적지로 운송되는 그 수많은 차(茶)와 찻잎들을 지난날처럼 곱게 순순히 지나가게 하리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게다가 중국은 차생산국(茶生產國)중 차(茶)의 최대 소비 시장인 로마와 페르시아(Persia)에 가장 가까웠다. 운송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중국 차(茶)가 선택되어 가장 싼 값에 로마와 페르시아에 수출될 것은 뻔했다. 전 세계 차시장(茶市場)을 중국이 독점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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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움직인 건 부여(夫餘)였다. 부여(扶余)는 제잠(鯷岑)의 최북단 지역인 왜(倭)에서 채엽되어 운반되는 찻잎과 근역(槿域)에서 만들어지는 차(茶)가 중국 땅이 아닌 부여(夫余) 땅으로 확실히 보내지는 것을 담보하기 위해 또한 고품질의 차(茶)를 더 일찍 만들기 위해 기술자들과 군인들로 구성된 대규모 원정단(遠征團 Expedition)을 전한(前漢) 선제(宣帝)가 지절(地節)이라는 연호(年號)를 반포한 기원전 69년에 근역(槿域)으로 파견했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원정단의 책임자가 되어 왜(倭)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유일한 근역(槿域)인 지금의 포항(浦港) 부근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중국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 사람들은 지금 일본을 제잠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땅 모양이 소와 같은 동물의 발이 부어 오른 모습과 닮아서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땅은 활처럼 휘어져 최북단의 땅이 당시 근역이라 불렸던 우리나라의 지금 영일만(迎日灣) 지역에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중국 북부 사람들은 그 지역을 활처럼 휘었다고 해서 왜(倭)라고 불렀고 중국 복건성(福建省), 광동성 같은 남부 사람들은 제잠에서 삥 둘러 가야 닿을 수 있다 해서 왜(倭)라고 불렀다. 특히나 복건성(福建省)의 복주(福州)에서 바라본 일본 땅은 머리 부분은 크고 꼬리로 갈수록 잘록한 메기(鯷)를 닮은 모양이어서 그들은 그 땅을 제잠이라 불렀다. 왜(倭)와 제잠(鯷岑)은 동서로 길게 가로누운 땅의 북쪽 지역과 남쪽 지역을 나눠 부른 이름이었다.


지절(地節)이라는 연호(年號)의 반포는 중국이 야생 차(茶) 나무가 자라고 있는 지역을 발견했고 이제 중국은 차(茶) 생산국으로 가는 첩경(捷徑)에 들어섰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신호라는 것을 제대로 간파한 부여(扶餘)는 중국이 차(茶) 생산국이 되었을 경우 찻잎 생산국 왜(倭)가 가지게 될 전략적 가치에 주목해 가장 먼저 왜(倭)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에 진출한 것이었다. 그런 중국의 중요한 변화를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넘겨버리면 나라가 망한다는 교훈을 부여인들은 이미 단군조선을 통해 뼈저리게 학습했었다. 기원전 770년에 주(周) 나라 태자(太子)의 외조부였던 신후(申侯)가 서쪽에서 이동해 온 견융(犬戎)을 이용해 부당하게 태자(太子)를 교체한 주나라 유왕(幽王)을 징치(懲治)하겠다고 나선 일이 결국 단군조선(檀君朝鮮)을 망하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사람들이었다. 춘추시대(春秋時代)라 불리며 수십 개의 나라로 쪼개져 무한경쟁의 약육강식에 돌입한 중국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던 조선(朝鮮) 사람들이었다. 중국의 산동반도를 강역으로 하는 제(齊) 나라가 지금의 천안 근처 직산(稷山)에 터 잡은 월지국(月支國)과 북쪽의 낙랑(樂浪)을 통해 지금의 중국 천수(天水)에 있었던 대월지(大月氏)와 마한(발조선)으로 전달되던 근역과 왜(倭)의 차(茶)를 통제하기 위해 산동반도의 차무역로(茶貿易路)에 장벽을 설치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조선이었다. 후일 장성(長城)으로 불리게 되는 이들 장벽(障壁)은 북방 유목 민족을 막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초원로(草原路)로 전달되는 근역(槿域)과 왜(倭)의 차(茶)와 찻잎들을 통제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었다.


근역(槿域)을 통해 산동으로 들어간 차(茶)를 로마까지 보내는 무역로(貿易路)는 두 개였다. 첫째가 북쪽의 건널 수 없는 황하를 피해 남쪽의 임흔(臨沂)과 서주(徐州)를 지나 상구(商丘)와 정주(鄭州), 낙양(洛陽), 노씨현(盧氏縣)을 거쳐 서안(西安)으로 가 대월지의 한양(漢陽)인 천수(天水)와 란주(蘭州)를 거쳐 하서주랑((河西走廊: 무위(武威)-장액(张掖)-주천(酒泉)-가욕관(嘉峪关)-돈황(敦煌)-하미(哈密)-산산(鄯善)-투루판(吐鲁番)-우루무치(乌鲁木齐)로 나가는 길이었고 둘째는 낙양(洛陽)에서 맹진(孟津)을 통해 황하를 북쪽으로 도하(渡河) 한 후 안양((安陽)과 한단(邯鄲), 석가장(石家莊)과 보정(保定)을 거쳐 북경에서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넘어 장가구(張家口)로 가는 길이었다. 장가구(張家口)는 그대로 몽골고원의 마한(馬韓)에 연결되어 단군조선의 초원로로 근역과 왜(倭)의 차(茶)가 서역으로 공급되게 하는 기지였다. 이렇게 근역(槿域)과 왜의 차(茶)를 대륙으로 들여와 초원로와 실크로드로 각각 분배해 주는 이정표(里程標 milestone) 역할을 하던 산동반도는 기원전 685년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즉위해 남쪽의 유일한 무역로를 장벽(障壁)을 쌓아 막아버린 후 고율의 관세(關稅)를 징수함으로써 조선과 대륙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주는 진앙지(震央地 epicenter)로 변했다.


조선에서 보내온 차(茶)를 지중해로 유통시키면서 번영을 누렸던 아나톨리아의 프리기아(Phrygia)는 그 절정이었던 미다스(Midas) 왕 시절에 킴메르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초원로로 공급되던 차(茶)가 제(齊) 나라의 관세부과(關稅賦課)로 대폭 감소함으로써 생사의 기로(岐路)에 선 킴메르족(Cimmerian)이 차(茶)를 구하려 저지른 침략이었다. 그게 기원전 675년이었다. 프리기아가 멸망한 후 지중해의 차(茶) 무역권을 승계하며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왕의 통치아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신아시리아도 결국 기원전 627년 만성적인 차(茶) 부족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친 정세는 결국 그 대책으로 근역(槿域)의 차(茶)를 관세(關稅) 같은 보호무역의 장난질 없이 자유무역을 통해 장가구(張家口)로 보낼 수 있는 새로운 항로(航路)의 개발과 항구의 건설이 추진되었다. 묘도열도(廟島列島)를 이용하지 못해 원양항해(遠洋航海)를 통해 새로운 항구(港口)로 가는 바닷길을 여느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결국 그 사람들의 희생으로 항로(航路)는 열렸고 그곳에 새로운 항구가 건설되었다. 노룡(盧龍縣)이었다. 제(齊) 환공(桓公)은 이들을 없애기 위해 기원전 664년 북벌을 단행했다. 노마지로(老馬知路)란 고사성어가 생긴 원정(遠征)으로 영지(令支)와 고죽국(孤竹國)이 정벌되었다고 관자(管子) 소광 편(小匡篇)은 기록하고 있다. 새로운 원양항로(遠洋航路)를 개척하느라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는데 그때 일을 기록한 것이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였다. 이런 노력으로 제나라는 결국 패권을 상실했고 이런 역사의 교훈은 부여가 서라벌(徐羅伐)로 박혁거세 원정단을 파견하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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箜篌引者 朝鮮津卒霍里子高所作也. 공후인은 조선의 진졸(津卒) 곽리자고(藿里子高)가 지은 것이다. 子高晨刺船以濯 有一征夫被髮提壺 涉河而渡. 자고 가 새벽에 배를 젓고 있을 때, 한 나그네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술병을 든 채 물을 건너고 있었다. 其妻追止之不及 墮河而死. 그 아내가 뒤쫓으며 막으려 했으나 미치지 못했고 물에 빠져 죽었다. 乃呼天噓唏 鼓箜篌而歌曰 이에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공후를 타면서 노래 부르기를

公無渡河 公竟渡河 公墮河而死 當奈公何. 공은 물 건너지 마오. 공은 끝내 도하하네. 공은 물에 떨어져 죽었네. 능금(차) 나무를 지키기 위해 공이 짊어졌다네.

曲終 自投河而死. 子高聞而悲之 乃援琴而鼓之作箜篌引. 以象其聲 所爲公無渡河曲也. 노래가 끝나자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자고(子高)가 그걸 듣고 슬퍼하며 금(琴)에 힘입어 공후인을 작곡해 연주하였으니, 그 노래를 표현하여 공무도하곡(公無渡河曲)이 된 것이다. - 후한의 채옹(蔡邕, 133~192)이 편집한 금조(琴操) 중에서


부여(扶餘)의 원정단(Expedition)은 왜(倭)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지금의 포항(浦港) 지역을 점령한 후 내쳐 달려 왜(倭)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근역(槿域) 땅인 지금의 울산(蔚山) 또한 점령했다. 형산강(兄山江)과 태화강(太和江)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지금의 경주(慶州)에는 본진(本陣)이 꾸려졌다. 원정단장(遠征團長)의 이름이 박혁거세가 된 연유였다. 박혁거세(朴赫居世)란 이름의 뜻은 부여의 부(扶)를 나타내는 부 [pu]로 발음되는 박(朴 pu)을 성(姓)으로 쓰고 두 지(支)가 연합해 카라반(caravan)을 위한 특수 역참(驛站)을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혁거세의 혁(赫)이 월지(月支) 중 지(支)를 나타내는 치 [chi]로 발음되는 적(赤) 자가 두 개 합쳐져 있는 글자인 연유였고 2 백 마리가 넘는 많은 낙타(駱駝)와 말들이 사람들과 일정기간 숙식(宿食)할 수 있는 특수(特殊) 시설이 갖춰진 역참(驛站)을 거(居: 일본어로는 고 きょ )라 했기에 혁거세에 거(居) 자를 썼고 만들었다는 뜻의 세(世)를 마지막에 쓴 연유였다. 게다가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찻잎을 시루(鉹)에 찐 후 절구(臼)로 찧어 병차(餠茶) 같은 긴압차(緊壓茶)를 만드는 전문가였다.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박(朴)은 부여(扶餘)를 의미하는 부(pu)로 발음되는 것 말고도 절구에 찻잎을 찧을 때 쓰는 절굿공이를 상형한 글자였다. 병차(餠茶)를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절굿공이였다. 곧이어 시루와 절구(臼)를 이용해 만들어진 병차(餠茶)나 전차(塼茶)를 뱀과 습기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는 밀봉(密封) 포장 전문가들이 합류했다. 알영(閼英) 부인이 이끌고 들어온 이 기술자들은 경주에서 만들어진 병차(餠茶)와 전차(塼茶)들이 치치하얼(齊齊哈爾 Qiqihar)에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처음 만들어진 품질 그대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흉노(匈奴)에서 파견한 사람들이었다. 부여(扶餘)의 도읍지 치치하얼(齊齊哈爾 Qiqihar)은 월지(月支) 중에서 새(隹)와 돼지(亥)와 말(馬)을 토템으로 하는 세 지(支= 齊=qi)가 연합해 미(爾=Mi=Er)를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 夫餘 南與濊貊接.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으로 큰 바다(大海)를 접하였다. 그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서 천 리나 된다. 북쪽에는 부여와 읍루, 남쪽에는 예맥에 접하였다.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 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에 있으며, 남으로 조선 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하였다.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 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예는 남으로 진, 북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하였다.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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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朴赫居世)가 서라벌(徐羅伐)을 장악한 후 왜(倭)로부터 확보한 찻잎을 가공해 부여로 보낸 차(茶)들은 부여와 연합한 동(東) 흉노들을 통해 로마가 있는 서역으로 무역되었다. 박혁거세가 거서간(居西干)이라 불려진 연유였다. 거서간(居西干)의 거(居)는 바둑의 바, 일본말 고(go)에 해당되는 말로 카라반(caravan)의 사람들과 낙타, 말등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 뿐만 아니라 운송하는 차(茶)들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특수 창고 시설이 완비된 곳을 말했다. 거서간의 서(西)는 깃들이다, 옮기다, (서쪽으로) 가다란 뜻으로 산스크리트어로는 수레같은 운송수단(vehicle) 을 뜻했다. 즉 원거리 수송에 맞춰 제작된 특수 수레와 같은 각종 원거리 수송에 쓰이는 각종 도구들이 제작되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거서간(居西干)의 간(干)은 건조하는 시설을 말했다. 찻잎을 시루(甑)에 쪄서(蒸) 찐 찻잎을 절구로 찧어(杵) 병차(餠茶)나 전차(塼茶)같은 긴압차를 만든 다음 신속하게 건조(乾燥)시키는 시설이 간(干)이었다. 거서간은 왕을 뜻하는 칭호가 아니라 당시 사로국이 뭘 하는 나라인지 무엇을 해내는 나라인지를 알려주는 칭호였다. 부여는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한 차(茶)를 동흉노에게 전달하는 무역로(貿易路)를 동해 바닷길을 이용해 건설(建設)했다. 아산만(牙山灣)을 끼고 있는 지금의 직산(稷山)에 있었던 월지국(月支國)과 남포만(南浦灣)을 끼고 있는 낙랑(樂浪)으로 차(茶)를 보내 서해를 통해 산동반도로 들여보내던 기존의 무역로는 한나라가 흉노와 전쟁을 벌였던 때부터 흉노에 대해서는 봉쇄(封鎖)되어 있었다. 부여(扶餘)가 차무역로(茶貿易路)로 건설한 동해 바닷길은 사로국(斯盧國)을 떠난 차무역선(茶貿易船)이 지금의 동해(東海) 시에 있었던 실직국(悉直國)과 명주(溟州)로 불렸던 강릉(江陵)의 예(濊), 원산(元山)의 동예(東濊)를 거쳐 두만(Tumen) 강이 가야(Gaya; 伽倻) 강으로 연결되어 무단(Mudan; 牧丹; 모란) 강의 동부여로 이어져 있었다. 이러한 사로국(斯盧國)과 부여를 잇는 동해안 무역로는 태백(太白) 산맥으로 막혀 좁은 해안선밖에 없는 그 지역에 실직국과 예, 동예와 동부여 같은 나라들이 줄줄이 건국된 연유였고 그 길은 당시 흉노가 차(茶)를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젖줄이었다. 한(漢) 나라의 반발은 명약관화(明若觀火)했고 결국 사로국(斯盧國)의 차(茶)가 부여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이들 무역로 사이사이에는 차단벽처럼 고구려(高句麗)와 동옥저(東沃沮)가 차례로 세워지는 반작용이 벌어졌다.


당시 흉노는 한(漢) 나라의 경제봉쇄조치로 차(茶)를 확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따라서 부여의 차(茶)를 무역했던 동(東) 흉노의 제국 내 발언권은 커져갔다. 이런 편중(偏重)은 동(東) 흉노들이 서(西) 흉노들을 포섭하기 위해 우도기왕(右屠耆王)인 악연구제(握衍胊鞮)를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선우(單于)로 옹립함으로써 흉노의 대분열을 가져오게 한 원인이 되었다. 다섯 명의 선우(單于)가 동시에 난립(亂立)한 기원전 60년의 흉노의 대분열은 박혁거세의 서라벌 원정으로 촉발된 사건이었다. 부여와 연합한 동흉노의 좌도기왕(左屠耆王) 질지골도후(郅支骨都侯)는 부여로부터 전해받은 박혁거세가 서라벌에서 보낸 병차(餠茶)와 전차(塼茶)들을 파르티아(Parthia)로 무역(貿易)해 큰 이익을 남겼다. 기원전 67년부터 박혁거세가 매년 왜(倭)의 찻잎을 긴압차(緊壓茶)로 만들어 부여로 보낸 서라벌(徐羅伐)의 차(茶)는 질지골도후(郅支骨都侯)가 기원전 54년 한나라의 지원을 받는 동생 호한야 선우(單于)를 누르고 선우(單于)가 되는데 큰 재정적 발판이 되었다. 기원전 53년 난립(亂立)한 선우들을 모두 정리하고 단독 선우(單于)가 된 질지골도후는 알영(閼英)을 박혁거세의 왕비로 서라벌(徐羅伐)에 파견했다. 알영(閼英)은 차(茶)무역 패권을 잡기 위해 실크로드에 집중하고 있는 한(漢)나라에 장애(障礙)로 나선, 초원로(草原路 Steppe Road)를 운용하는 흉노의 왕비족, 연지(閼氏)족의 여인이었고 그들은 차상자(茶箱子) 밀봉(密封) 전문가였다. 흉노의 중심 5 부족 중 호연 씨(呼延氏 또는 呼衍氏)의 연(衍) 자에 상자(箱子)란 뜻이 있는 연유였다. 왜(倭)의 찻잎을 박혁거세가 독점하자 왜(倭)의 찻잎을 직산의 월지국(月支國)에 중개(仲介)하며 살아가던 변한(弁韓)은 결국 기원전 39년에 사로국(斯盧國)에 투항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여(夫餘)와 흉노의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출처 네이버 한자사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으로 유명한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의 연지(閼氏)인 왕소군(王昭君)을 후궁으로 두었던 한(漢) 원제(元帝)는 부왕인 선제(宣帝)가 짜놓은 설계대로 기원전 37년 고구려(高句麗)를 건국시켜 부여와 사로국(斯盧國)의 연결 육로(陸路)를 끊게 했고 해상활동에 특화된 옥저(沃沮)를 건국시켜 서라벌의 동해안 차무역(茶貿易)을 저지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박혁거세가 서라벌에 금성(金城)을 쌓아 올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질지선우(郅支單于)는 서라벌의 차(茶)가 끊기자 고립무원이 되어 한나라의 공격에 전사했다. 기원전 36년의 일이었다. 마한왕(馬韓王)이 사로(斯盧)의 사신으로 온 호공(瓠公)에게 조공(朝貢)을 바치지 않는다며 윽박질렀다는 기원전 20년의 삼국사기의 기사는 박혁거세의 입장이 계속 곤궁해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해 무역로의 재건은 기원전 18년 고구려에서 소서노(召西奴)가 두 아들을 데리고 한강과 영종도를 개발하는 기지를 건설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위례성(慰禮城)은 한강 하류를 통제하는 기지(基地)였고 미추홀(彌鄒忽)은 아산만과 초도(椒島) 또는 백령도를 잇는 중간기지로 개발된 것이었다. 결국 박혁거세는 백인(斯)과 토인(盧)의 연합국이란 의미의 사로국(斯盧國) 왕으로 몸이 다섯개로 잘려져 죽었다. 왜의 찻잎을 사노국(斯盧國)이 독점함으로써 결정적인 피해를 본 페르시아 상인들의 짓이었다. 일본 열도의 휘어진 북쪽에서만 자라는 왜의 차(茶)나무 잎을 중개하던 제잠(鯷岑)으로부터 찻잎을 얻어 차(茶)를 만들어 수입해가던 페르시아 상인들은 서해 해상무역로가 붕괴되면서 크나큰 손해를 보고 있었다. 박혁거세의 아들 남해(南解)가 거열형(車裂刑)을 당해 다섯개로 잘려 죽은 아버지를 보며 벌벌 떨어야 했던 연유였다. 지금의 복건성(福建省)과 절강성(浙江省)에 체류하던 페르시아 상인들이 파견한 원정대의 대장은 서라벌에 진주하자 호공(瓠公)의 집(月城)부터 뺏어 그동안 자신들에게 찻잎을 팔지 않던 책임을 물었다. 호공(瓠公)의 집인 월성(月城)이 탈해(脫解)에 뺏긴 연유였다. 남해(南解)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탈해(脫解)에게 그의 손녀를 바치며 살아남았다. 남해가 아들 유리(儒理)에게 왕위를 탈해에게 넘기라고 유언한 연유였다. 이제 부상국(扶桑國)에서만 자연적으로만 자란다던 차(茶)나무가 중국땅에서 재배(栽培)되어 자라고 있었다. 서라벌(徐羅伐)은 이제 온통 털복숭이인 서역인을 뜻하는 나(那)자가 쓰인 서나벌(徐那伐)로 불렸다. 라(羅)자는 나선형(螺旋形) 문양을 표식(標識) 상징으로 하는 켈트인들을 가리키는 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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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匈奴)는 흉한 노예여서 흉노라 이름 붙여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신라의 금령총(金鈴塚)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騎馬人物形 土器)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모두 전차(戰車)가 아닌 말등에 올라타 이동하는 기마족(騎馬族)이었다. 기마인물형 토기에서와 같이 그들은 동복(銅鍑)이라는 솥을 말등에 싣고 다녔다. 동복(銅鍑)은 솥이었기에 고기와 같은 음식을 조리(調理)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동복(銅鍑)의 가장 중요한 용도는 차(茶)를 달여 마시는 데 있었다. 등자(鐙子)도 없던 시대였기에 차(茶)를 담은 동복(銅鍑) 같은 중요한 물건을 눈에 보이지 않는 등뒤의 말등에 싣고 다닌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동복(銅鍑)을 말등에 싣고 다닌 건 등자(鐙子) 같은 말에 관련된 여러 장구(裝具)들이 개발된 이후였고 그전에는 분실의 위험 때문에 거의 품에 안고 탄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몸에 묶은 채 말을 타고 다녔다. 등자가 없기에 말 몸을 다리로 꽉 감싸고 상체를 숙인 채 가슴엔 피 같은 차(茶)를 담은 동복(銅鍑)을 싸매고 허리 숙여 고삐를 쥔 채 말 달려 나가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가 흉(匈)이었다. 흉노는 부여(扶餘)의 사출도(四出道)를 본떠 선우(單于)족인 연제(攣鞮)씨와 왕비(閼氏)족인 호연 씨(呼衍氏) 그리고 도기왕(屠耆王)족과 곡려왕(谷蠡王)족이 이끌어가는 통치체제를 만들었는데 그중 가장 하위(下位)를 구성했던 곡려왕(谷蠡王)족은 개와 돼지를 앞세워 차(茶) 나무를 탐색하던 골(Gaule)이라 불렸던 갈리아 지역에서 활동했던 켈트인들의 후예인 수박씨(須卜氏)와 뿔소라를 가공해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이라는 자줏빛 염료를 만들어 낸 페니키아인이 속해있던 바빌로니아를 건국했던 아무르(Amurru, Amorite)인들의 후예인 목란(牧蘭)씨의 연합 부족을 말하는 것이었다. 수복 씨(須卜氏)의 수(須) 자에 찾다, 탐색하다란 뜻이 있는 연유였고 곡려왕(谷蠡王)의 려(蠡) 자에 고둥, 소라라는 뜻이 있는 연유였다. 목란(牧蘭)은 중국 발음으로 무란[mulan]인데 아무르(Amurru)인의 음차(音借)였다. 목단(牧丹)을 모란이라고 하고 목단강을 모란강으로 부르는 연유는 우리 민족이 아무르인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장대에 꿰어 매다는 아시리아 부조. 출처위키미디어. 유럽에 진출한 하티안들이 켈트인이 되어 퍼져나간 지도. 출처 위키미디어


곡려왕족 위에는 도기왕(屠耆王)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창(槍)에 밧줄을 매달아 반복해서 사용하는 창(槍)인 주살(弋)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기반으로 활(弓)을 발명해 낸 아시리아를 건국한 아수르(Assur; Ashur)인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도(屠) 자는 자신들에게 반역한 사람들을 창(槍)에 꿰어 매달아 죽였던 아시리아(Assyria)인들의 독특한 처형(處刑) 방법을 상형(象形)한 글자였고 기(耆) 자는 찌[zhi], 치 [chi], 지[qi]로 발음되는 글자로 월지(月支) 중 지(支)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글자였다. 그런데 이 지(支) 자는 투창에 밧줄을 매단 모습을 상형한 글자였다. 겨레 족(族) 자의 갑골문과 금문은 이 지(支) 자가 어떤 모습을 상형한 글자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킴메르(Cimmer)족의 활 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리스인들의 그림은 스키타이(Scythia)와 사르마티아(Sarmatia)인들이 누구의 후예인지 가늠하게 해 준다. 이 아슈르 인들은 월지(月支) 중 지(支)에 해당되는 민족들의 원조격인 사람들이었다. 월지(月支)중 월(月)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왕족과 왕비족이었다.

등자없이 기마한 채 뒤로 돌아 활을 쏘는 킴메리안들의 파르티안 사법을 그린 고대 그리스인들의 도기 그림. 개를 차나무 탐색견으로 활용한 켈트인들의 후예다. 출처 위키미디어


흉노는 차(茶)같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채엽(採葉)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모두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새 토템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흉노의 조상을 그들이 사용했던 도기(屠耆)와 녹려(谷蠡) 또는 곡려라는 관직명으로 살펴보면 그들은 아수르 인들과 아모리인, 그리고 갈리아(Gaule) 켈트인들이었다.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를 건국한 아수르인과 아무르인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메소포타미아인들로서 후르리인(Hurrian)의 후예(後裔)였고 갈리아 켈트인들은 흑해가 바다가 된 후 갈라진 아나톨리아와 흑해(黑海) 북쪽 지역에서 기원(起源)한 사람들로서 하티(Hatti), 해치(獬豸)인들의 후예(後裔)였다. 이들 중 일부 켈트인들은 후일 사상적(思想的)으로 분명한 차이를 가진 페르시아(persia)가 아닌 아리아인(Arian) 즉 이란(Iran)인으로 역사에 등장하는데 그들은 페르시아만 연안에 터 잡아 처음부터 메소포타미아와 연결되어 역사를 만들어 갔던 파르스(Pars) 즉 페르시아 사람들과 달리 지금의 아일랜드(Ireland)까지 갔다가 기원전 2500년경 카스피해 북쪽지역으로 되돌아와 자신들이 동서 무역의 길목으로 생각하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헤라트(Herat) 지역에 터 잡은 사람들이었다. 카스피해 동남부에 자리한 파르티아(Parthia)라고 불리던 지역의 동남쪽 경계에는 아리아(Aria)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지역에 돌아와 터를 잡아 정착했기에 그 이후부터 아리안(Arian)이라고 불렸다. 이들이 인더스 강변에 건설한 모헨조다로(Mohenzo-daro)와 하라파(Harappa) 같은 수메르인들의 해상무역도시들을 파괴하면서 인도에 진출한 역사가 바로 아리안의 침입이었다. 인더스 문명을 파괴하며 그곳에서 살던 드라비다인(Dravidian)들을 축출(逐出)하며 진출한 그곳에서 아리안(Arian)들이 세운 것은 철저한 계급(階級) 사회였다. 카스트(Cas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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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扶餘)는 단군조선의 마지막 차교역로(茶交易路)가 운영되던 케를렌(Kerlen) 강 유역을 스키타이(Scythia) 또는 사카(Saka) 일족인 북적(北狄; 프리기아 유민)이 침탈하고 캐를렌강 중류지역에 있는 지금의 쿠른부이르(Kulunbuir)에 탁리국(橐離國)을 세우자 그곳을 떠나 나하(那河)라고도 불린 지금의 눈강(嫩江, Nen Jiang) 동쪽지역으로 옮겨간 마한(馬韓)과 귀방(鬼方)의 연합세력이 기원전 425년에 세운 나라였다. 연방국가 부여(夫餘)의 한축인 마한(馬韓)은 기원전 1260년에 히타이트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강 지류인 카부르(Al Khabour) 강 북동 유역에 있던 미탄니(Mitanni)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축인 귀방은 개와 돼지를 이용해 차(茶) 나무를 찾아내는 탁월한 능력 때문에 몽골 고원에서 차(茶) 나무를 필사적으로 찾던 단군조선 정부에 의해 거의 같은 시기에 고용되어 들어온 흑해 북쪽과 발칸 지역에 살던 브루게스(Brughes) 또는 브리게스(Bryges)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부여(扶余)는 흉노를 통해 초원로로 차(茶)를 흑해 북부지역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흉노는 항상 분열된 채 살아가던 초원 유목민들이 기원전 230년경에 두만 선우라는 지도자를 내세워 연합해 단일 통치체제를 만들어 낸 유목민 최초의 국가였다.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된 기후한랭화와 건조화는 그전 천년동안 기후변화 없이 살아온 인류에게는 큰 재앙이었다. 게다가 그 기간 동안 사람들이 발전시켜 온 농업화와 도시화라는 문명은 그전까지 경험해 왔던 기후 한랭화와 달리 그 피해 정도를 매우 광범위하고 정도도 매우 심하게 악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윤회사상을 뜻하는 켈트인 고유의 문양인 트리스켈리온(Triskelion). 나선형 문양이다. 나선형 문양의 원조 문양이 새겨진 하티에서 발굴된 금동그릇. 출처 위키미디어


후일 기원전 3세기까지 계속되어 칼 야스퍼스에 의해 축(軸)의 시대(Achsenzeit)로 불린 그 기간 동안 사람들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불확정성(不確定性)의 시대를 죽음과도 같은 불안을 안고 통과해야 했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초원로를 통해 낙타와 말들에 의해 아무 일 없이 무역되던 차(茶)는 지구 기온이 떨어지는 기후 한랭화 주기가 도래하자 모조리 바다로 빼돌려져 초원로(草原路 Steppe Road)에 사는 유목민들은 추위와 건조해지는 기후 변화에 따른 사막화란 고통에 더해 차(茶) 부족이라는 치명적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거의 4백 년마다 순환하는 기후변화주기에 따라 초원(草原)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변화에 순응하며 살았었는데 천년의 기후온난화 세월은 그 기억을 잊히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워진 기후는 반드시 차가워지고 차가워진 기후는 반드시 따뜻해진다는 기후변화의 진리는 그들로 하여금 떠나간 건 반드시 돌아오고 돌아온 건 다시 반드시 떠난다는 윤회(輪廻)의 의미를 가진 나선형(螺旋形)의 문양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게 했다. 또한 하늘이 벌이는 기후 변화는 언제나 차(茶) 부족을 가져왔기에 그 변화(變化)를 빨리 알고 싶다는 사람들의 바램이 날아다니는 것이기에 하늘과 가장 가까울 것 같은 새들을 하늘의 전령(傳令)으로 숭상하는 새(鳥) 토템을 가지게 했다. 트리켈리온(Triskelion) 또는 트리켈(Triskele)이라 불리는 켈트족 문양(文樣)은 삼신(三神) 할매와 환구(圜丘) 사상(思想)이 응축된 상징이었고 솟대는 하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문천(聞天) 사상의 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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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탄니(Mitanni)는 동서 무역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어버린 말(馬)을 사육(飼育)하는데 최고의 솜씨를 가졌다고 모든 나라가 인정하는 국가였다. 본디 사람이 타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동물이 아니었던 말을 나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동물로 만들어 낸 사람들이 미탄(Mitan) 사람들이었다. 사르곤(Sargon) 대왕의 아카드(Akkad) 제국과 마지막 수메르(Sumer) 제국인 우르(Ur) 제3왕조, 동복(銅鍑)을 만들어 낸 하티의 후손 아시리아 그리고 함무라비 법전을 만든 아모리(Amorite)인들의 바빌로니아가 차례로 모두 멸망한 다음 유프라테스강의 지류인 카부르(Khabour) 강과 티그리스강 사이 지역에 터 잡아 기원전 1600년경에 나라를 세운 미탄(Mitan) 사람들은 후르리어(Hurrian language)를 사용했는데 후르리어는 인도유럽어 같은 굴절어(屈折語)가 아닌 한국어 같은 교착어(膠着語)였다. 이런 교착어인 후르리어(Hurrian language)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에 나타난 건 기원전 2300년 경이라고 언어역사학자들이 밝힌 것을 보면 그들은 기원전 2334년에 아사달에서 메소포타미아로 파견된 사르곤 원정대에 포함되어 들어온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이 사람들을 이집트인들은 나하린(Naharin)이라 불렀고 그들이 사는 땅을 나흐리나(Nahrina)라고 불렀는데 인도의 갠지스(Ganges)처럼 강들이란 뜻의 나(那)흐리나는 구약에서는 두 강의 사이라는 뜻의 나하라임(NahaRayim)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이를 강들 사이란 뜻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로 번역했다. 결국 메소포타미아란 말을 실질적으로 만들어 내게 한 사람들이 미탄(Mitan) 사람들이란 뜻이다. 또한 아시리아를 건국한 아슈르(Assur)인들과 지금의 시리아 라타키아 지역인 우가리트에서 시작해 메소포타미아로 건너가 바빌로니아를 건국한 아무르(Amurru) 또는 아모리(Amori)인들은 미탄(Mitan) 사람들을 전차병(Charioteer: 馬夫)이란 뜻의 한이갈바트(Hanigalbat)라고 불렀는데 그건 그들이 두 마리 이상의 말들이 끄는 마차(Chariot)를 마치 한 마리 말이 끄는 마차처럼 잘 몰았기 때문이었다. 전차병이란 뜻의 한이갈바트를 한이라바트(HaniRabat) 또는 칸이갈바트(Khanigalbat)라고 아슈르 인들이 혼용해 부른 것을 보면 지금은 전차(戰車)라고 번역되는 채리엇(Chariot)이 전투(戰鬪:combat)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차(茶)를 실어 나르기 위해 제작된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고 또 그런 차(茶)를 어떤 지역에서는 카(檟)라고도 불렀다는 것 또한 미루어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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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우리나라 평양 서쪽에 있는 대동군(大同郡) 상리(上里) 용악면(龍嶽面)에서 발굴된, 서기 14년경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수레 부속구(車輿具)들 중 유독 눈길을 끈 것은 권총형 동기(拳銃形銅器)라고 이름 붙여진 유물이었다. 동물을 조종하기 위해 사용하는 고삐를 끼우는 구멍이 있는 구리쇠고리인 권총형 동기(銅器)는 수레를 끄는 여러 마리의 동물들을 한 사람이 조종할 수 있도록 고안된 장치였다. 이런 권총형 동기(銅器)를 고안해 낸 게 미탄(Mitan)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은 주변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말들이 끄는 전차(戰車)를 조종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란 감탄을 받았고 그래서 전차병(戰車兵)이란 민족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받은 전차병(戰車兵)이란 이름은 戰車兵이 아니라 戰茶兵이었다. 전차 또한 戰車가 아니고 戰茶였다. Chariot란 차(cha 茶)를 누구보다 먼저 확보하기 위해 또는 누구보다 먼저 운송하기 위해 마차들이 미친 듯이 떼 지어 질주(riot 暴動)하는 모습에서 회의(會意)된 글자였다. 기원전 1260년경 미탄니(Mitanni)를 멸망시켜 에게해를 포함한 지중해 차무역(茶貿易)을 관장하는 레반트(Levant) 지역의 영유권을 차지해 번영을 구가한 히타이트(Hittite)인들은 미탄 사람들의 나라를 미탄인의 땅이란 뜻으로 미탄니(Mitanni)라고 불렀다. 그들은 또 미탄인들을 후리(Huri or Hurri)인 이라고도 불렀는데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땅을 후르릴리(Hurrlili)라고 불렀다. 구약에는 호리(Horite)라고 기록되어 있는, 주변 민족들이 제각각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미탄(Mitan) 사람들은 그러나 자기 자신들을 마잇탄(Maittan)이라고 불렀다. 미탄니라고 역사에 기록된 마잇탄은 우리 민족의 고대사(古代史)를 다룬 사서(史書)에 자주 나오는 단어들인 호(胡 Hu, Ho), 한(韓 Han), 미(爾, 尔 Mi), 마(馬 Ma), 나(那, 耶 Na), 리(離 Ri, Li), 칸(杆 Khan)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게 해 준다. 생명의 나무인 차(茶) 나무가 자라는 독보적 지역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각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민족들이 모여들어 찬란한 색동(色同) 문화를 만들어 낸 조선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바로 마잇탄들이었다. 수없이 많은 민족들이 명멸해 간 초원에 새겨진 금언은 “성공한 유목민족은 동쪽으로 가고 실패한 유목민족은 서쪽으로 간다”였는데 대륙에서 성공한 사람들만이 갈 수 있다는 그 동쪽이 바로 조선이었다. 우리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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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王欲殺之. 婢對曰 有氣大如雞子 從天而下 我故有娠 後産子. 捐於豬溷中 豬以口氣噓之不死. 復徙置馬欄中 欲使馬借殺之 馬複以口氣噓之不死. 王疑以爲天子 令其母收取奴畜之 名東明 令牧牛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掩水 以弓擊水 魚鱉浮爲橋 東明得渡 魚鱉解散 追兵不得渡 因都王夫餘 故北夷有夫余國焉. 북이(北夷) 탁리국왕의 시녀가 임신(娠)하였다. 그래서 왕이 그녀를 죽이고자 했다. 시녀가 말하기를 크기가 달걀만 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제가 아이를 뱄습니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돼지우리 안에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 말이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왕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동명이라 이름 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은 활을 잘 쐈다. 왕은 나라를 뺏었길까 두려웠다. 죽이려 하니 동명이 달아났다.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서울을 정하고 왕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 왕충의 논형(論衡) 권 2 길험 편(吉驗篇) 중에서


후한(後漢)의 왕충(王充 27-97 AD)이 쓴 논형(論衡)에는 부여(夫餘의 건국자 동명왕이 탁리국(橐離國)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탁리국(橐離國)은 색리국(索離國) 또는 고리국(高離國)이라고도 불린 나라였는데 북적(北狄)이라 불린 프리기아(Phrygia)인들이 미다스(Midas) 왕이 죽은 후 아나톨리아를 떠나 동쪽으로 이동해 이미 국력이 쇠잔해질 대로 쇠잔해진 조선에게서 케를랜(Kerlen) 강 유역을 빼앗아 세운 나라였다. 탁리국(橐離國)이라 불린 이유는 프리기아(Phrigia)인들이 자신들의 상징처럼 쓰고 있는 모자가 낙타의 등에 솟은 혹처럼 생긴 고깔모자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아시아의 낙타는 단봉(單峯)인 아랍 낙타와는 달리 쌍봉(雙峯)이었고 혹의 정상이 둥그스름한 아랍 낙타와 달리 원뿔처럼 솟아오른 완전한 고깔모자 형태였기에 프리기아인들은 탁리(橐離)라고 불렸다. 또한 그들은 풀지 못하자 칼로 잘라버렸다는 알렉산더 대왕의 고사(故事)로 유명한, 묶어놓은 매듭을 풀면 아시아의 왕이 된다는 신탁을 가진 고르디우스(Gordius)의 매듭을 만들어 낼 만큼 한번 묶으면 잘 풀어지지 않는 강한 동아줄을 잘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색리(索離)라고도 불렸다. 탁리(橐離)와 색리로 불린 그들을 후일 고리(高離)라고도 부른 것은 프리기아인들보다 한발 늦게 동쪽으로 이주한 킴메르(Cimmera)족 때문이었다.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쌓은 장벽 때문에 벌어진 차(茶) 부족 사태 때문에 프리기아로 쳐들어 간 그들을 히브리(Hebrew) 성경에서는 고메르(Gomer)라고 기록했고 이를 받아 로마는 가메르(Gamer)라고 적었다. 중국말로 가오리라고 발음되는 이유로 고리(高離)라고도 불린 연유다. 프리기아인들과 킴메르 인들은 모두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건 뫼(Me )를 잘 받기 위해서였다. 수메르인들은 과학과 기술, 예술 같은 문명을 이루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창조해 내는 능력을 신이 인간들에게 내려줄 때 그것을 수신하는 것을 뫼(Me)라고 생각했다. 그 뫼가 일어나는 곳을 정수리라고 여겼고 그 정수리에 수신탑(受信塔)으로 세운 것이 고깔모자였다. 우리 민족이 상투를 튼 연유였다. 그래서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뫼(Me)가 아주 좋은 사람들이라 하여 수메르(SuMer)라고 스스로 불렀다. 산스크리트어로 수(Su)는 아주 좋은(auspicious, high quality)이란 뜻이다.

출처 위키미디아


이들이 또한 북적(北狄)이라고 기록된 것은 그들이 꼬치구이(炙)를 즐겨 먹었기 때문이었다. 땅을 파서 화덕을 만든 후 그 안에 불을 피우고 고기와 야채들을 조리한 후 함께 긴 막대기에 끼워 그 불 위에서 빙빙 돌려가며 구워(炙) 먹는 음식문화를 가진 그들을 개(犬, 戌)를 중요시했던 켈트인을 가리키던 융(戎)과 구별하기 위해 적(狄)이라고 불렀다. 중국인들을 춘추전국시대란 혼란의 시대로 들어서도록 한 문을 연 견융(犬戎)은 한 마리의 훌륭한 차(茶) 나무 탐색견 알버(Ailbe)를 왕국내 모든 자원(資源)과 맘먹는 보물로 생각하는 켈트인들이었다. 융(戎)이란 한자(漢字)가 개를 뜻하는 술(戌) 자와 똑같은 연유였다. 이렇듯 프리기아인과 킴메르 인들이 건국한 나라에서 도망쳐 도올강(Taoer 洮儿河)을 건너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東明王)이 닭(鷄)과 관련된 민족의 후예이면서 돼지(豕)와 말(馬)에 관련된 민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음을 왕충(王充)은 논형(論衡)에서 밝혀 놓았다. 내몽고 아미산(阿爾山)에서 시작해 길림성 백성시(白城市)를 끼고 눈강(嫩江, 那河)으로 흘러드는 도올강(洮儿河 Taoer river))은 아이(儿)가 도망(逃亡) 간 강이란 뜻인데 부여(扶餘)의 개창자(開創者) 동명왕이 탁리국 병사들에게 쫓기다 맞닥뜨린 강이었다. 강물을 활로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물속에서 솟아 나와 다리를 만들어줘 건너가게 해 주었다는 고사(故事)에서 생긴 이름이었다. 이런 동명왕(東明王)이 계자(鷄子:닭이 낳은 알)라고 기록되어 동명왕(東明王)이 닭과 관련된 민족이라면 그건 해족(奚族)이라 불렸던 갈리아(Gaule, 谷) 켈트인들이었다. 말(馬)과 관련된 민족이라면 그건 당연히 마잇탄(馬韓) 사람들이었다. 돼지와 관련된 민족은 귀방의 후예였는데 그들이 귀방(鬼方)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암퇘지에게 탈을 씌우고 암퇘지의 발정(發情)을 이용해 차(茶) 나무를 찾아내던 온몸 가득 흉터 투성이었던 대머리(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귀(鬼) 자의 삐침별은 고삐줄을, 밭 전(田) 자는 돼지들 머리에 씌운 탈을, 어진 사람 인(儿) 자는 대머리를, 마늘모(厶) 자는 고깔모자를 각각 뜻하는 글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괴물(方)로 불렸고 고깔모자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후일 프리기아인들로 불렸고 더 나중엔 소나 말이 아닌 돼지를 주된 가축(家畜)으로 기른 숙신(肅愼)과 읍루(挹婁)로 불렸다. 타라스 불 바라는 영화에 나왔던 카자크족이 후일 대머리가 가장 큰 특징이 된 귀방(鬼方)의 대표적인 모습이었다. 또한 닭의 원조격인 새 토템은 하티(Hatti)족의 상징이었다. 우리 민족은 새 토템으로 하늘과 땅을 그리고 동과 서를 순환(巡還)하는 그들을 환족(桓族)이라고 기록했다. 석유환국(昔有桓国)의 환국(桓国)은 떠난 것은 돌아오고(還) 돌아온 건 다시 떠난다는 나선(螺旋)으로 상징되는 환(環) 사상을 가진 환(圜)족의 지도자 환인(桓因)이 세운 인류 최초의 국가였다.

윤회사상을 보여주는 우에서 좌로 도는 삼태극문양. 나선형 문양의 원조를 보여주는 하티의 도기들. 출처 위키미디어


지금은 온통 바다로 채워져 있는 흑해(黑海)는 기원전 5500년 전에는 분지(盆地)였던 땅이었다. 지금 지도(地圖)를 보면 알 수 있듯 흑해는 북쪽을 제외한 삼방(三方)이 높은 산들이 즐비한 산맥들로 둘러싸여 있어 차(茶) 나무가 생장하기 알맞은 자연조건을 갖춘 땅이었다. 서쪽으로는 발칸(Balkan) 산맥, 동쪽으로 캅카스(Caucasus) 산맥, 남쪽으로는 폰투스(Pontus) 산맥이 각각 둘러싼 흑해 땅은 그래서 푸른 차(茶) 나무들이 밝은 태양 아래가 아닌 그림자 진 채 우거져 있는 땅이었다.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이 이 곳을 자신들의 말로 검푸른(axsaina) 곳이라 부른 연유였다. 타타르(투르키예)와 캅카스 사람들은 그 땅을 검다는 의미로 카라(kara)라고 불렀다고 하지만 그러나 카라는 검다는 뜻이 아니었다. KhaRa. 차나무로 이뤄진 나라. 차(茶)와 나선(螺旋; ra) 모양을 뜻하는 말이었다. 꼬불꼬불하게 흐르는 강들이 이룬 땅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땅의 주인은 하티(Hatti)라고 해치(獬豸)라고 기록된 사람들이었다. 차(茶) 나무에 질소비료를 제공하는 폭풍우의 신(神) 타루(Taru)와 수확(harvest)을 관장하는 모신(母神 mother goddess)으로 태양의 여신 부르세무(Furusemu)를 섬겼던 그들은 차(茶) 나무에서 찻잎을 딸 수 있게 되는 시기가 되면 채엽(採葉)을 허락해 준 신(神)들께 감사를 올리는 푸르리(Puruli)라는 봄축제를 벌였다. 하티(해치)인들이 찻잎을 관리하기 위해 사용한 것은 돌(石)이었다. 돌(石)로 찻잎을 지키는 성(城)을 쌓았고 찻잎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었으며 찻잎을 가공하는 고인돌(dolmen)을 만들었다. 위대한 돌(石)의 문명(文明)을 건설한 사람들은 하티(Hatti; 해찌)였다. 동쪽의 후르리(Hurruri)인들이 티그리스강과 그 지류인 카부르(Khabur) 강 유역에 터 잡고 흙으로 빚는 도기(陶器)로 문명(文明)을 이뤄갈 때 유프라테스강과 카부르(Khabour) 강, 키질이르마크(Kizilirmark) 강이 만드는 유역(流域)에 돌로 문명을 건설했던 하티(Hatti; Khati)인들도 기원전 5500년경 지진과 기후온난화로 지중해(地中海)의 바다가 카라(Kara)로 넘쳐흘러 들어와 차(茶) 나무들이 모두 물에 잠기자 결국 카라를 떠나야 했다. 기원전 5천 년경 차(茶) 나무를 찾아 카라를 떠난 하티(Khatti)들이 아나톨리아 서부와 발칸과 판노니아와 갈리아를 거쳐 차(茶) 나무가 있는 아일랜드에 도착했을 때 돌멘(Dolmen)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주기적(週期的)으로 교차해 이뤄진 기후 한랭화와 건조화로 아일랜드와 브리튼에서 차(茶) 나무들이 모두 사라지자 하티(Khati)인들은 켈트(Celt)인이 되어 기원전 2500년경 다시 카라로 돌아왔다(還; 亘). 발칸반도와 흑해 북쪽에 터 잡은 그들은 이제 하티(해치)가 아닌 브루게스(Brughes)로 또는 브리게스(Bryges)로 불렸다. 떠날 때와 달라진 건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그건 오미(五味)의 변(變)을 일으킨 죄로 일찍이 마고성(麻姑城)에서 내쫓긴 백소씨(白巢氏) 예하의 지소씨(支巢氏) 사람들과 혼혈(混血)된 결과였다. 그들 중의 많은 수가 백인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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