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경계성 인격장애

by 경조울

고백하건대 아를에서 고갱과 반 고흐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한 동안 나 혼자 고갱을 미워했다. 함께 예술인 공동체를 만들자고 약속할 땐 언제고 반 고흐를 버리고 떠나, 이 야멸찬 냉혈한 같으니. 간혹 고갱의 전시회가 열릴 때면, 굳이 안 보러 가도 될 텐데 '우리 반 고흐 버리고 가서 얼마나 멋진 그림 그렸나 보자'라는 유치한 마음으로 찾아가곤 했다. (물론 여기서 따질 것도 없이 고갱은 정말 멋진 화가이다. 그의 작품 중에서 <타히티의 여인들>을 특히 좋아한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왜 고갱이 열대 지방의 강렬한 햇살과 생명력을 그토록 갈구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350px-Paul_Gauguin_056.jpg 폴 고갱, <타히티의 여인>, 1891, 유화, 91×69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프랑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고갱과 반 고흐는 그렇게 친했던 걸까?

반 고흐와 고갱의 첫 만남은 해바라기 덕분이었다. 반 고흐는 1886년부터 아를에 오기 전 약 2년 동안 파리에서 머무르면서, 처음으로 해바라기를 그렸다. 그중 2점을 1887년 11월의 전시회에 출품했으며, 그 전시장을 찾은 고갱이 반 고흐의 작품에 반해 자신의 <마르티니크 섬의 해안>과 교환을 제안하면서 두 사람의 교류가 시작된다. 그런데 고갱은 1888년 1월 폰타방으로 떠났고, 이어 반 고흐가 2월에 아를로 떠났으니 파리에서 두 사람이 친분을 쌓은 시간은 어림짐작해도 채 2-3개월에 불과하다. 그 사이에 정말 동거와 공동체 설립이라는 위대한 이상을 공유할 만큼 유대 관계를 형성하는 게 가능했을까? 게다가 반 고흐는 사회성이 영 떨어지는 성격이었고, 고갱도 썩 좋은 성격은 아니었는지 오만하고 괴팍한 사람이었다는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두 사람이 정말 몇 개월 만에 그런 '도원결의'를 맺었을까? 글쎄, 나는 영 회의적이다.

애초에 반 고흐의 계획이 성사된 것도 동생인 테오 덕분이었다. 빚에 쪼들리던 고갱은 테오가 반 고흐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비까지 부담하고 작품을 팔아준다는 조건으로 반 고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어쩌면 폴 고갱이 인정사정없는 배신자였던 게 아니라, 반 고흐가 정말이지 함께 살기 힘든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반 고흐가 단순히 성격이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경계성 인격 장애를 앓았다는 주장도 있다(Mehlum, 1996). 경계성 인격장애는 정신 질환의 일종으로, 이를 앓는 환자는 매우 변덕스럽고 대인관계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경향을 보인다. 경계성 인경장애 환자들은 평소 극단적인 감정을 오가며, 자제력이 약하다. 이 때문에 정서적으로 몹시 불안정하며, 반복적인 자해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사례를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본인을 사랑해주는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항상 외로움을 느끼는 30대 여성이 있다. 그녀는 시간만 나면 남자친구를 만나려 들고, 잠시라도 연락이 닿지 않으면 심하게 불안해진다. 남자친구를 백마 탄 왕자님처럼 멋지다고 생각하다가도 손바닥 뒤집 듯이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쓰레기'라고 폄하하고 비난한다. 그래놓고 남자친구가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까 봐 바로 사과하고 전전긍긍한다. 반 고흐가 저런 인물이었다면, 함께 사는 입장에서 폴 고갱도 퍽 곤혹스러웠으리라.

정신 질환의 국제 진단 표준 DSM-V에 따르면 경계성 인격장애 증상은 9가지로, ① 버림받지 않으려는 필사적 노력, ② 과대평가-과소평가의 극단, ③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 ④ 자신을 손상시킬 충동적 행동, ⑤ 자살/자해, ⑥ 기분의 불안정성, ⑦ 만성적 공허감, ⑧ 분노조절 못함, ⑨ 일시적 피해사고나 해리증상이며, 이 중 5가지 이상을 만족하면 경계성 인격 장애를 의심할 수 있다. 고갱과의 일화만 살펴보아도, 반 고흐는 진단 기준을 충분히 만족한다. 일단 고갱을 지나치게 우상화, 이상화하는 경향을 보였고(과대평가-과소평가의 극단), 고갱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귀까지 잘랐으며(버림받지 않으려는 필사적 노력, 자살/자해), 화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해했고(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 지나치게 변덕스러웠다(기분의 불안정성).

경계성 인격 장애 환자는 많은 경우 병식이 없다. 쉽게 말해 자기 성격이 이상하다는 걸 모른다. 그리고 이런 점은 환자가 아닌 주변 사람들을 괴롭힌다. 반 고흐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형을 아끼고 평생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동생 테오조차도 반 고흐와 함께 사는 건 바람 잘 날이 없었다고 표현했다. 주야장천 끝 모르고 설교를 늘어놓기도 하고, 너저분했으며, 사람들의 화를 돋우는 말도 서슴지 않게 하여 늘 테오가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가족인 테오조차 그렇게 괴로워했다면, 친분이 깊지 않은, 그러면서도 한 집에서 같이 살아야 했던 고갱은 더욱 괴로웠을 것이다. 아마도 함께 사는 두 달 동안 고갱은 반 고흐에게 감정적으로 착취당했을가능성이 높다. 고갱이 반 고흐를 인간적으로 좋아했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혹시라도 좋아했다면 반 고흐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끝없이 자책하면서 이중의 고통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고갱은 아를에서 그린 그림을 테오를 통해 팔고, 그렇게 돈을 모아 마르티니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는 아를에 머무르면서도 끊임없이 열대지방의 태양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반 고흐가 알게 되었을 때, 고갱이 영원히 자신과 함께 머무를 것이며 예술가 공동체를 주도적으로 운영해 나가리라 기대했던 반 고흐는 심하게 좌절했다. 반 고흐가 정말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았다면, 가뜩이나 마음을 잠식하고 있던 불안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을 테고, 그때부터 고갱에 대한 집착이 더 심해졌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급기야 귀까지 잘랐으니, 고갱 입장에서는 오만정이 다 떨어지다 못해 공포심까지 느꼈을 것이다.


어느 날 고갱의 전시회를 보고 나오는 길에 문득 생각했다. 고갱의 팬은 반 고흐를 어떻게 바라볼까.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사람을 시골 촌구석까지 불러다가 두 달 동안 질척대고 떠나겠다는 말에 귀까지 잘라버린 '징글징글한 껌딱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동안 고갱을 남몰래 미워했던 게 영 미안해졌다.



<참고 문헌>

Mehlum L. Suicidal process og suicidale motiver. Selvmord i lys av Vincent van Goghs kunst, livsløp og sykehistorie [Suicidal process and suicidal motives. Suicide illustrated by the art, life and illness of Vincent van Gogh]. Tidsskr Nor Laegeforen 1996;116:1095-1101. Norweg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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