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성 장애
반 고흐가 양극성 장애를 앓았으리라는 주장은 1947년 처음 대두되었다(Perry, 1947). 양극성 장애는 조증 삽화와 우울 삽화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질환으로, 기분 장애의 일종이다. 조증이란 평소와 달리 기분이 매우 좋고 고양된 상태를 일컫는다. 그중에서도 조증이 심한 경우를 1형 양극성 장애, 조증보다는 정도가 약한 경(輕)조증과 우울삽화가 반복되는 경우를 2형 양극성 장애라고 한다. 그리고 2형 양극성 장애는 바로 내가 앓고 있는 정신 질환이기도 하다.
반 고흐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그가 양극성 장애 환자일 수 있다는 연구를 접한 뒤 내가 느낀 첫 감정은 바로 '반가움'이었다. 양극성 장애를 앓는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타인의 불행에 기뻐하는 꼴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적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기뻤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이렇게 천재적인 화가도 양극성 장애를 앓았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같은 질환을 앓았다는 점에서 홀로 친밀감을 느꼈고, 이러한 친밀감은 반 고흐에 대한 애정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반 고흐는 조증이 두드러지는 1형보다 우울 삽화가 주로 나타나는 2형 양극성 장애를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명백한 조증 삽화를 겪었다는 증거가 없다. 1형 양극성 장애에서 나타나는 조증은 비정상적으로 고양되고, 과대하거나 과민한 기분이 특징이다. 조증을 앓는 환자는 본인을 과대평가하고, 평소 하지 않던 무모하거나 과도한 시도를 하고 계획을 세운다. 익스트림 스포츠에 도전하거나 전 재산을 탕진하여 명품을 사들이는 식이다. 본인이 신이나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물과 특수한 관계에 있다는 과대망상을 보이기도 한다. 옆에서 말을 자르기 어려울 정도로 수다스럽고 목소리가 크고 빠르며, 사고의 비약이 빈번하게 나타나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조증은 주변에서 모르고 넘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괴상하다. 반 고흐가 조증을 앓았다면, 분명 동생인 테오 혹은 주변인들이 어떤 식으로라도 그에 대한 글을 남겼을 것이다.
1형에 비해 2형 양극성 장애는 진단이 어렵고 우울증으로 오진되는 경우가 흔하다. 우울증과 2형 양극성 장애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반복되는 경조증이나, 일단 경조증을 진단하기가 어렵다. 경조증은 가벼운 조증으로, 조증에서 나타나는 과대망상이나 사고의 비약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2형 양극성 장애의 전체 경과 중 아주 짧은 시간 밖에 차지하지 않으며, 조증과는 다르게 일상생활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경조증 시기의 환자들은 쾌활하고, 잠이나 음식에 대한 욕구가 감소하며,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활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겉보기에는 에너지가 넘치고, 창의적이며 자신감이 넘쳐 가족이나 지인조차도 환자가 경조증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그래서 2형 양극성 장애를 앓는 환자들은 우울한 시기에만 병원을 찾는다. 실제로 양극성 장애 환자의 절반 이상이 초기에 우울증으로 진단을 받으며(Ghaemi, 1999), 양극성 장애로 제대로 진단받는데 평균 10년 정도가 걸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Lish, 1994). 반 고흐의 경우에도 사망한 지 50여 년 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양극성 장애의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가 경조증을 앓았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있다. 그의 경조증 증상은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의 숫자나 분량이 갑자기 늘어나고,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작품을 남기는 과잉 활동으로 나타난다. 반 고흐는 아를에 머무르는 15개월 동안 테오에게 200통 이상의 편지를 썼으며, 300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또한 반 고흐의 과잉 활동은 주로 일조량이 많은 봄, 여름에 생겼는데, 일조량이 강할 때 경조증이 악화된다는 연구 결과도 그가 경조증을 겪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이 시대 최고의 화가라고 불리는 반 고흐의 천재성도 양극성 장애와 무관하지 않다. 일단 양극성 장애 환자는 높은 지능을 보인다. 연구에 따르면, 지능이 평균 이상인 사람은 양극성 장애를 앓게 될 위험이 4배이상 높다(Gale, 2013).
또한 양극성 장애와 천재들이 가지는 고유한 창의성이 연관이 있다는 연구 결과는 수 십 편에 달한다. 신경생물학자인 제임스 팰론은 양극성 장애 환자가 심한 우울증에서 벗어나 조증 혹은 경조증으로 향하기 시작할 때 뇌의 전두엽 아랫부분 활동이 저하되면서 윗부분이 강하게 활성화되며, 이때 창의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반 고흐는 1888년 2월 아를에 도착한 뒤 그 해 겨울이 되기도 전에 과수원 연작 14점, 자신을 포함한 초상화 46점, 60여 점의 유화를 그렸다. 특히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고갱을 기다리며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유화를 그렸는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해바라기> <밤의 카페테라스> 등 유명 작품이 모두 이 시기의 작품이다. 반 고흐는 아마도 아를에 도착한 뒤 경조증을 앓았던 것 같다. 그 시기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흥분을 느낄 수 있다.
이번 주에는 그림 그리고, 잠자고, 먹는 일 외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한 번에 6시간씩 총 12시간의 작업을 했고, 12시간 동안 잠을 잤다.
1888년 9월,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반 고흐는 고갱이 아를에 오면 그와 형제처럼 동거하면서 예술가 공동체, 혹은 유토피아를 건설하기를 꿈꿨다. 반 고흐와 고갱이 얼마나 친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두 명의 무명 화가가 아를이라는 작은 마을에 성공적인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고 이를 전유럽으로 확장할 수 있으리라는 그의 믿음은 사뭇 엉뚱하고 허무맹랑하게 느껴진다. 경조증 환자가 겪는 고양된 기분과 빠른 사고 전환이 이러한 믿음의 근거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갱을 기다리며 신이 나서 붓을 놀리는 반 고흐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애틋하고 짠한 마음이 든다.
경조증을 겪을 때, 적어도 나는 행복했다. 잠을 자지 않아도, 밥을 먹지 않아도 항상 에너지가 넘쳐흘렀고, 끊임없이 떠오르는 영감에 쉴 새 없이 글을 썼다. 들뜬 기분과 에너지 덕분에 자존감도 높아져 아주 오랜만에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경조증 시기의 나는 자신감이 넘쳐흘렀고,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경조증을 겪는 반 고흐도 그랬을까?
반 고흐는 고갱이 도착하기 전 해바라기 연작을 그려 그의 방에 걸어두며 반가움과 존경의 마음을 드러냈다. 아를에서 반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는 행복하다. 밝고 경쾌한 노란 색채 속에 고갱을 기다리며 들뜬 그의 설렘과 희망이 묻어난다. 늘 동생 테오에게서 지원을 받으며 정서적으로 위축되어 있었을 그가 해바라기를 그릴 때만이라도 행복했기를, 나도 모르게 바라게 된다.
<참고 문헌>
Perry IH. Vincent van Gogh’s illness: a case record. Bull Hist Med 1947;21:146-172.
Ghaemi SN, Sachs GS, Chiou AM, et al. Is bipolar disorder still underdiagnosed? Are antidepressants overutilized? J Affect Disord. 1999;52:135–44.
Lish JD, Dime-Meenan S, Whybrow PC, et al. The National Depressive and Manic-Depressive Association (DMDA) survey of bipolar members. J Affect Disord. 1994;31:281–94.
Gale CR, Batty GD, McIntosh AM, Porteous DJ, Deary IJ, Rasmussen F. Is bipolar disorder more common in highly intelligent people? A cohort study of a million men. Mol Psychiatry. 2013;18(2):190-194.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서울: 위즈덤하우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