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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새벽이 오는 소리

< 기획자의 나머지 시간_1 >

 지금까지 얼마나 한 밤을 새웠을까.      


  회사에서 비공식적 기록으로 19일을 연속 밤샌 적이 있다. 진부하게 ‘라테는 말이야’를 강조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대한민국이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땐 한 부서에서 다 같이 합숙 비슷하게 먹고 자고,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아침이고 밤이고 그랬던 날들이 있었다. 다들 20대여서 그랬는지 아님 사회적 분위기가 밤새워서 일하고 또 밤새워서 노는 분위기여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다시 그걸 하라고 하면 과연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래도 이렇게 죽도록 일하면 성공하는 내일이 오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 그것을 우리는 공동체의 비전이라 부르며 누구도 저는 아닙니다, 안됩니다! 하는 구성원이 하나 없었다.     

 

  절대, 요즘 시대에 그런 밤새는 문화를 재소환해서 일하자 하고 싶지는 않다. 많은 기술적 영역에서 업무가 디지털로 전환되었고, 물리적인 시간낭비를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그땐 논문 찾으러 국회도서관에 가는 시절이었다. 지금은 구글에서 실시간 번역으로 앉아서 서로 얼굴 보며 해외 협력사와 소통하는 시절이다. 내가 아쉬운 건 공동체가 한마음으로 가장 강도 높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순간 집중력의 최대치, 사장이고 말단이고 할 것 없이 인간으로서 사력을 다해 끝까지 최선을 다한 후 그 감동, 말로 다 할 수 없는 동료애 그런 것들이다. 정말 전쟁 치르듯이 우리는 경쟁에 참여했고, 목숨을 걸고 승리를 염원했다. 그리고 이겼을 때 공을 나누고, 졌을 때 아픔도 나누었다.      


  때는 1997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93년 대전 엑스포가 끝나고 90년대 중후반은 우리나라의 국립 박물관들이 본격적으로 건립이 될 시기였다. 당시 제안서들은 대부분 2백에서 3백 페이지 분량이었는데 내 앞에 떨어진 과학관 사업의 제안서는 무려 천 페이지나 되었다. 물리, 화학이 싫어서 문과에 지원한 내게 과학관 천 페이지를 작성하라고 하니 앞이 캄캄했다. 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 이렇게 교과목을 나누어 아이템을 발굴하고 각 아이템마다 예산을 뽑아내야 하는데 아무리 페이지를 나누어 봐도 한 과목당 2백 페이지는 채워야 했다. 급히 각 과목의 선생님들을 불러 급성으로 족집게 과외를 받았다. 첨단의 새로운 아이템들은 대학원생을 불러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내용 이해를 완벽히 하고 잊어버리기 전에 바로 디자이너에게 설명하여 그림을 그렸고, 작동 시스템도를 완성해 나갔다. 당시는 손으로 먼저 그리고 CAD로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생물과 야외 아이템만 맡았었는데 물리와 화학을 담당한 직원들이 너무 느리다고 결국 중간에 나에게 모든 과목이 넘어왔다. 맨날 페이지만 세는 것이 일이었다. A3 천 페이지 높이가 꽤 되기 때문에 나는 원고를 끌어안고 엎드려 잠도 잤다. 내 책상에는 <과학동아>라는 잡지가 항상 30 권정도 쌓여 있었다.      


  그렇게 난리를 떨면서 드디어 제출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상대 경쟁사는 포기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러건 말건 내 앞에는 천 페이지 날것의 원고가 떡하니 책상 위에서 마무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밤을 새웠는데도 아직 빈 페이지가 수두룩했다. 아이템 하나에 정확한 디자인, 시스템 구성도, 예산까지 함께 있어야 하는데 어떤 건 구성도가 어떤 건 예산이 없는 식이었다. 빠진 것만 세어보니 대략 100여 장이 훨씬 넘었는데 그때 시각이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혹시 제출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 겁이 덜컥 났다. 인쇄소에 원본이 넘어가야 하는 최종 데드라인은 늦어도 아침 8시였다. 아니 8시에는 인쇄소에 도착하여 출력이 들어가야 덜 마른 인쇄본이라도 나오고 그래야 영업팀에서 그걸 싣고 시간 안에 제출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엑셀에서 예산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예산은 그림이 나와야 작성을 하므로 가장 마지막에 완성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림이 없으니 대충 상상하여 작성하는 것이다. 작성이 끝나자마자 다른 사람은 프린터 앞에서 출력된 예산표를 A3 원고에 따 붙일 수 있도록 축소 복사하여 정확하게 칼로 잘라 놓는다. 이 작은 표를 A3 원고에 티 안 나게 붙이기 위해 큰 보드에다 뒷면이 보이도록 놓고, 3M 접착제를 뿌리고 난 후 원래 자리에 붙인다. 그러고 나서 예산표가 붙여진 A3 원고를 다시 한번 전체 복사한다. 덕지덕지 종이가 붙여진 원고를 인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지금처럼 제안서 원본이 하나의 파일에 모든 소스들이 얹힌 채로 한 번에 출력이 되지 않았다. 각기 다른 프로그램으로 만든 CAD, 그래픽, 표, 3D 투시도 들을 한 화면에 담을 만큼 편집프로그램이 발달하지 않았고, 호환성도 낮았고, 컴퓨터 하드 용량도 그 많은 이미지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천 페이지여서 그림 없는 텍스트만도 너무 방대했다. 한 페이지 당 신중을 기해서 집중하여 작업해야 하는 막일였다. 몇몇 중간에 빠진 구성도, 연출도는 도저히 시간이 없어 원본에다 바로 손으로 그려야 했다.      


  마지막에는 열 명 정도가 늘어서서 마치 가내수공업처럼 출력기에서 복사기로 이동, 축소복사, 복사지 회의테이블로 운반, 칼로 자르기, 보드 잡기, 3M 스프레이 뿌리기, 떼어내어 붙이기, 다시 전체 복사, 취합, 이런 식으로 공정을 쪼개어 모두가 숨도 쉬지 않고 새벽을 넘기며 천 페이지를 완료했다. 아무도 어떤 말을 하지 않고 컨베이어벨트처럼 기계식 작동으로 마침내 완성된 천 페이지. 인쇄소로 달려가야 하는 기획실 직원이 분홍색 보자기로 그것을 쌌다. 야속하게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8시를 좀 넘긴 시각에 겨드랑이로 움켜잡은 분홍색 보자기가 떠나자 우리는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둘 자신의 책상에 엎어졌다. 그러나 나는 기획자, 아직 인쇄소에 도착하지 않았고, 인쇄가 종결되지 않았기에 엎어질 수 없었다. 인쇄기를 돌린다는 전화를 받고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내 손을 떠난 제안서는 하늘의 운명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엎어져 있는데 누군가 황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일 것이다. 그는 열 명이 한 자 세로 쓰러져 있는 방문을 빠르게 열었다. 사장인지 알았지만 나는 도저히 고개가 들려지지 않았다. 그는 불을 끄고 암막커튼을 치고 조용히 문을 닫아주었다.      


  경쟁사는 제출하지 못했고, 결국 제출한 업체는 우리 하나였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천 페이지의 입찰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날 밤, 새벽이 오는 소리는 집단 무음이었다. 마치 이어폰은 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느낌이었달 까. 우리 모두는 각자 동물적인 본능에 의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제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그리고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단 1초의 쉼도 없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멈추지 않았다. 가끔 올림픽에서 쇼트트랙이나 양궁, 배구나 축구 같은 단체 팀 들이 금메달을 딸 때 나도 모르게 그날의 감동이 겹쳐진다.      


  젊은 시절 워낙 강하게 훈련받은 탓인지 아직도 이 나이에 밤을 새울 땐 물러나기 싫은 근성이 살아나곤 한다. 밤 샘 작업에서 가장 체력적으로 힘든 시간대는 5시이다. 눈이 절로 감기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오탈자도 정확히 찾지 못하는 시점이다. 대세에 지장 없는 건 대충 하고 싶은 시간이기도 하다. 기획자는 이 마무리 시점에 마지막 에너지를 써야 하기 때문에 그때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최종 취합 자는 모두가 맛이 가 있을 때 끝까지 가장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기획자의 정신력은 바로 이때 길러지며 이 시점에 한 번 더 힘을 내는 자가 실수 없는 완성을 습관화한다. 물론 요즘은 거의 밤을 새우지 않으며, 어쩌다 밤을 새우게 되더라도 옛날처럼 죽기 살기로 모든 열정을 다해 작업을 하는 분위기는 사라졌다. 돌아보면 내가 20대 때 들었던 새벽이 오는 소리, 그 무음의 합창들이 결국 훗날에 실력자 소리를 듣는 자양분이 되었던 것 같다.      


  기획자는 희생을 밥 먹듯이 하며 모두를 환생시키는데 기여하는 사람이다. 그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새벽이 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다. 그중에 하이라이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마침내 아침을 완성하는 무음의 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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