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희 Dec 28. 2023

단어를 영어, 한자 등 3개 이상의 의미로 만들어본다

< 기획자의 실무_5 >

전략이나 공약을 만들 때 좀 더 쉽게 오래 기억되도록 텍스트를 가공하는 것과 같다. 


  기획자는 우선 문장으로 상대를 설득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어려운 기술적 용어가 포함된 글이라도 문장으로서 완결성을 가지지 않았다면 기획자로서 기본적인 소양을 잘못 배운 것이다. 최근엔 비주얼 자료가 중요해지다 보니 텍스트도 제안서 안에서 그림의 일부로 치부되곤 한다.  세세한 텍스트는 대충 한번 쓰고 끝까지 수정 안 하는 기획자도 많이 보았다. 자세히 읽어보면 비문 투성이고 ‘추진함을 진행한다.’, ‘구성함을 연출한다’ 식의 동어반복으로 길게 늘어뜨리는 습관을 가진 친구들도 있다. 모든 것은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지 못해 벌어지는 일인데, 그 심리에는 자신이 선택한 단어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기획자는 비슷한 말잔치로 에두르기보다 바늘로 목표한 지점을 칼같이 정확하게 꽂아야 한다.      


  우리가 평소에는 따로 연습을 하기가 어렵고, 실전에 들어가야 해당프로젝트의 과제를 놓고 실습을 해 볼 수 있지만, 지나간 과거의 사례로 생각의 과정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야간 경관 명소화를 위해 안동에 있는 구시장의 장소브랜딩 및 경관디자인 제안을 할 때였다. 전통시장이라는 게 늘 지역민에게는 익숙하지만 최신의 매체를 적용해 젊은 층을 끌어들이기엔 한계가 있다. 먼저 장소에 대한 브랜딩이 젊은 층이 원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시장에 간다는 것은 ‘거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먹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 살거리, 등등을 기대하면서 오늘은 어떤 구경을 할 수 있을까 싶어 늘 크고 작은 기대감을 가지고 말이다. 그 ‘무언가’를 썸싱(something)으로 보고 ‘시장골목’에서 썸 밸리(some valley)를 떠올렸다. 골목은 영어로 Alley이지만 신도시에 주로 테크노밸리가 형성되므로 비슷한 어감으로 밸리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안동 구시장을 <썸 타는 시장골목, 안동 썸 밸리: Andong Somevalley>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제안했다. 여기서 발음대로의 썸은 ‘thumb’이라는 뜻의 최고, 엄지를 의미하기도 했는데 이는 안동 구시장의 찜닭거리가 소문대로 맛이 엄지 척(thumb up)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도 담긴 표현이었다. 하지만 시장이라는 장소브랜딩은 텍스트 자체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소리 내어 부르는 어감도 친근해야 하기 때문에 전면으로 강조하는 표현은 최종적으로 some을 택했다.      


  정리를 해보자면 우선 액면 그대로 안동의 최고 시장골목이라는 뜻을 나누어서 Andong(안동) + thumb(최고) + alley(골목)이라 나열해 놓는다. 여기서 thumb이라는 단어를 한글로 썸이라 바꾸고, 다시 썸을 친근한 의미의 some으로 바꾼 것이다. 


< 안동 구시장 장소브랜딩 및 경관디자인 제안_장소 네이밍 >


  ‘thumb’을 좀 더 알려진 ‘some’으로 바꾸자, 부르기도 쉽고 훨씬 더 유연하게 의미를 확장할 수 있었다. 다음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some으로부터 확장된 단어 sometimes, someday, someone, something을 가져와 시장골목에 추억거리, 살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의 구체적 행위와 연결한다. ‘썸 타는 시장골목, 안동 썸 밸리’라 하였으니 대 주제인 ‘썸’을 다시 여러 개의 소주제 ‘썸’으로 풀어 각 공간의 이야기를 연결하는 것이다. 가로 세로 퍼즐을 맞추듯이 이러한 작업이 기계적으로 무리 없이 진행된다면, 그리고 그 작업 시간이 괴롭지 않다면  당신은 기획이 적성에 맞는 기획자 일 것이다.


< 안동 구시장 장소브랜딩 및 경관디자인 제안_스페이스 콘셉트 >

   비슷한 단어의 반복이나 나열 같아 보이는 이 작업은 단어와 문장의 위계에 대한 훈련이 기본적으로 탄탄하게 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예를 들어 지금 과일의 종류인 수박, 사과 말고 딸기, 바나나에 대한 리스트 업을 하고 있는데 혼자 다른 위치에서 과일이 아닌 커피, 아이스크림, 케이크 같은 디저트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보자. 언뜻 크게 보면 같은 음식이라는 점에서 딸기와 아이스크림이 비슷해 보이지만, 하나는 과일의 종류이고, 하나는 디저트의 종류이니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을 던지는 것은 같으나 떨어지는 지점은 조금씩 다르게 방향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렇듯 기획자는 간격이 촘촘하게 짜인 씨줄과 날줄의 단어 신경망을 보유하고 있어야 미세한 차이로도 다른 표현을 할 수 있다. 어쩌면 결국은 같은 말을 여러 개의 방법으로 달리 표현하는 사람이 기획자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기획자는 생각을 줄이고 함축하여 하나의 단어로만 표현하면 안 된다. 기획자는 시인이 아니다. 단어의 절대성보다는 융통성이 강해야 한다. 


  결론은 하나 일 수 있어도 표현만은 길고 긴 문장으로도, 전략을 함축한 다이어그램으로도, 복잡한 표로도, 일러스트나 이미지 합성으로도 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중에 화려한 표현의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콘셉트를 시나리오 작성하듯 체계적으로 세분화하여 가이드라인을 작성하는 일이다. 


  ‘광화문발상’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해보자. 이 단어도 주어진 미션에 따라 만든 합성어인데, 쉼표를 어디 찍느냐에 따라 한자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선 ‘광화문 발상發想’이라고 했을 땐 누군가가 광화문이라는 장소에서 떠올리는 생각을 의미한다. 혹은 광화문이라는 장소를 의인화, 주체화하여 광화문 지역에 살거나 그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하는 생각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광화문발, 상: 光化門發, 想’이라고 하면 어떨까. 같은 단어지만 모두 한자로 바꾸고 쉼표를 상想 앞에서 끊어주면 한자인 ‘상想’의 의미는 배로 커진다. 여기서 주제 확장성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광화문이라는 장소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자 서울의 상징이다. 광화문은 국가의 행사가 개최되는 열린 마당 이기도하다. 소통과 부활의 통로로서, 광화문에서 역사와 오늘을 잇고, 세계를 이끌어갈 빛의 미소를 발신하고자 광화문에서 출발하는 이미지라는 의미로 <광화문발, 상: 光化門發, 想>이라는 콘셉트를 도출하였다. 사업 명을 언급하지 않아도 광화문에서 연출되는 미디어 아트와 같은 시각적인 이벤트를 연상할 수 있는 주제이다. 발상(發想)을 발, 상(發, 想)으로 바꾼 발상으로 또 하나의 주제가 완성되었다. ‘광화문발’은 오래된 대중가요의 노래가사 ‘대전발 0시 오십 분’을 연상시킨다. 대전에서 출발한다는 의미이므로 광화문발 역시 광화문에서 시작한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하나의 단어를 두드리고, 뒤집어보고, 벗겨보고, 갈라보고, 겹쳐 보다 보면 기획일이라는 것이 정말 재미날 때가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전에 없이 어려운 것 같은데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는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이겨내었을 때의 느낌, 그 느낌이 반복되다 보면 어려워 보이는 일을 해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뜻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더 할 수 없는 경우의 수를 펼쳐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