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기다리며

성 조셉 성당의 기적

by 스노리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습도 없는 기분 좋은 날씨가 이어지던 몬트리올에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Guy-Concordia 콩코르디아 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Mont-Royal 몽로얄 산의 서쪽 편에 있는 L‘Oratoire St. Joseph du Mont-Royal 오라토리 성 요셉 성당에 간다.


비가 오니 기온이 확 내려가 으슬으슬 춥다.

회색빛 하늘과 언덕 위에 보이는 초록 돔의 성당이 오렌지색 우산을 쓴 남편의 뒷모습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무채색을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컬러풀한 색을 좋아한다. 나는 검은색과 흰색을 주로 입지만, 남편은 옷과 신발을 살 때도 자신에게 없는 색을 고른다.

어쨌든 밝은 옷에 스칼렛 신발을 신고 원색의 우산을 쓰고 있느니 흐린 날에도 사진발이 잘 받는다. 졸업식 꽃이 알록달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성 요셉 성당은 화려하지 않은 절제된 성당이다. 스토리가 그려진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도, 금빛 제단도, 정교하게 장식된 조각들로 이루어진 기둥도 없지만, 안도 타다오의 모던한 콘크리트 건물처럼 세련된 멋이 느껴지는 성당이다.

몽로얄 언덕의 작은 교구로 시작해 많은 사람의 기부와 헌금으로 지금의 대성당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데에는 교구의 초대 신부인 Frère André 안드레 신부의 삶과 기적이 있었다.


뇌출혈로 혼수상태에 있던 어린이의 부모가 신부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안드레 신부의 축원을 받은 아이가 기적처럼 깨어났다고 한다. 이후 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의 행렬이 계속 이어지며 기적의 성당으로 불리던 곳이다.

성당 벽면에는 사람들이 버리고 간 목발과 지팡이가 쌓인 여러 개의 기둥이 있다. 그 자리에서 목발을 벗어던진 사람들, 신부의 축원을 들은 후 더 이상 목발이 필요 없어진 사람이 보내온 것들이라고 한다.

몸이 병든 사람뿐만 아니라 마음이 병든 사람들도 절망에서 벗어나 위로받고 치유되었다고 하니 가히 기적의 성당이라고 불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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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가득 켜져 있는 Votive Chapel 봉헌 예배당에 가면 여전히 몸이 안 좋은 사람뿐만 아니라 마음이 병든 사람들이 촛불을 켜고 기도하고 있다.

안드레 신부가 누워 있는 관 옆의 성모 마리아상을 손으로 만지며 기도하는 노인의 모습에서 진실함과 절실함이 느껴진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두 손을 모으게 되는 성스러운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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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 오기 직전 같이 밥 먹다가 발목을 접질려 깁스하고 있는 동생이 생각나 6달러를 지불하고 초를 켠다.

집 근처의 고깃집에서 식사하고 출입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동생이 문 앞의 턱을 보지 못하고 발을 접질리고 말았다. 뒤에서 따라 나가다 놀라 동생을 부축하려 하는데 일어나지 못한다. 안으로 다시 들어가 카운터의 직원에게 항의한다.


“턱이 이렇게 높으면 2단으로 계단을 만들던지 경사로처럼 만들어야죠, 문 앞의 턱 조심 경고문은 너무 작은 거 아니에요?”


“많이 다치셨어요?”


“일어나지를 못해요”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고 어떤 이는 구급차를 부르라며 소란이 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니면 창피했는지 주저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걷기에 괜찮은지 알았더니, 병원에서 인대가 파열되고 뼛조각도 떨어져 나가 한 달 깁스해야 한다고 한다.

동생이 음식점에 다시 전화하니 음식점에서 보험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며칠 후 보험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직접 음식점에 가서 문 앞에 붙은 경고문의 크기를 재보고 조사를 마친 결과 경고문의 크기에는 문제가 없기에 보지 못한 동생의 책임이 커 보험 처리해 줄 수 없다고 한다.

열받은 동생이 구청에 신고했지만, 음식점에 주의하라는 경고만 주고 끝났다고 한다.

캐나다 오기 전에 목발을 짚고 다니는 게 안쓰러워 소금빵을 잔뜩 사 냉동실에 넣어 주고 왔다.


너를 위해 촛불을 켰다며 금방 나을 거라고 성당의 목발 사진들을 보냈더니 투덜대며 말한다.


“저거 다 사기야. 목발을 봐. 다 똑같이 생겼잖아. 저거 다 거기서 주문해서 걸어 놓은 거라고”


“아니야. 직접 보면 손때가 묻어 있다고. 진짜 오래된 거야”


“딱 보면 알아. 목발도 사람들 크기에 따라 다르게 만들었을 텐데 크기가 다 똑같잖아”


“같은 크기별로 진열해 둔 거라고. 좀 믿음을 가져 보라고. 그래서 낫겠냐?”


마지못해 알았다며 발 다 나으면 언니 덕이라고 말한다.


나의 절친 중 한 명은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누구보다도 크게 웃는 무한 긍정의 그녀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프리카에 갔다가 뼈가 골절된지도 모르고 고통 속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와 대퇴부에 나사를 박는 큰 수술을 받았다.

그녀를 방문해 둔감하다며 타박을 주고 그 꼴로 아프리카를 어떻게 다녔냐고 했더니 그분이 가라 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췄다고 한다. 혈관이 떨어져 파편이 되고 괴사가 있을 거라는 의사들의 예상을 뒤엎고 깨끗하게 아물었다고 하며 다시 그분의 기적과도 같은 은혜에 감사한다.


성당과 목발 사진들을 보냈더니 이렇게 답장한다.


믿음의 신비로움이 얼마나 다양한지. 기적도 있고, 기다림도 있고, 거절도 있으나, 그 모든 걸 주시는 분이 완전한 내 편인 걸 아는 평안함을 너도 알면 좋겠다.


정말 부럽다. 모든 일을 남 탓으로 돌릴 수 있는 홀가분함을 나도 느껴 보고 싶다.

점점 무거워지는 인생의 무게를 나눠 들어줄 그분, 두려운 인생의 마지막에 빛이 되어 줄 그분을 왜 마다하냐고 말하겠지만 빛과 어둠은 삶과 같이 하는 거라고, 인생의 마지막에는 빛도 어둠도 사라져 버리는 거라고 소리 없이 말한다.


줄리엣 비노쉬가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었다고 생각하는 영화, The Wait 기다리는 시간에서 아들의 여자 친구는 남자 친구를 기다리고 엄마는 기적을 기다린다.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성당의 부활절 축제에서 여자 친구는 기다리는 남자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게 되지만 엄마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맞이하려 한다.

레너드 코헨의 Waiting for the Miracle이 흐르며 빨간 드레스를 입고 춤추는 아들의 여자 친구를 바라보는 줄리엣 비노쉬의 고통과 희망이 공존하는 듯한 그 아련한 표정은 영화의 압권이다.


기적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이 불을 밝히기 위해 오늘도 오라토리 요셉 성당의 비에 젖은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온종일 계속되는 비를 추적추적 맞으며 숙소로 돌아와 불을 밝히려 스위치를 올린다. 어둑어둑한 창문 밖으로 희미한 빛만 들어올 뿐이다. 여전히 캄캄하다.

정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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